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27화 (327/425)
  • 세상은 넓고 실력자는 많다 (5)

    황당해서 선희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봤더니, 타마노의 충고를 잘 따른 방식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상상.

    자신이 생각한 복잡한 기계의 모습을 멋진 장갑으로 과감하게 덮어버리고 단순하게 묘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 모든 것을 복잡하게 그리는 선희에게 단순하게 표현하라고 주문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이 그림은 그런 나의 충고와 일맥상통한다.

    나도 다른 것에 열중하느라 잊고 있었는데.

    선희도 완벽한 그림에 대한 환상을 쫓아 간 덕분에 결국 벽에 부딪쳤던 게 아닐까싶다.

    복잡하고, 어려운 그림.

    그것이 결국 방향성을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것을 단순화시키는 기술일지도 모른다.

    “혹시 메카닉 그림에 대한 공부를 더 해보고 싶으세요?”

    타마노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던지자 그림을 그리던 선희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멀뚱멀뚱 눈알을 굴리더니 날 돌아본다.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선희가 다시 타마노를 돌아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소개해 주고 싶은 분이 있는데, 한번 만나보실래요?”

    “소개요?”

    내가 묻자 날 돌아본 타마노가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제가 그림을 배운 분인데요. 이쪽 계통에선 아마추어 계에서 꽤나 유명하신 분이에요. 다이콘 필름 멤버였던 여기 가이낙스 분들이 영업하려고 하려고 할 정도였죠.”

    그때 이야기를 곁에서 듣고 있던 마사키가 끼어들었다.

    “누구? 후카미 씨?”

    “그래.”

    타마노가 머리를 끄덕이자 마사키가 눈살을 찌푸렸다.

    “에이, 후카미 씨는 좀, 그렇지 않나?”

    “그래도 후카미 씨 정도의 메카 디자인 재능을 가진 사람은 드물잖아.”

    “그야 그렇지만······.”

    마사키가 묘한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거렸지만, 타마노는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나와 써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실력은 확실해요. 아마 집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이번엔 마사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 후카미 씨 집 알지?”

    “뭐, 그렇긴 한데.”

    “잘 됐다. 잠시만.”

    그렇게 말하더니 전화기를 들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더니 뭔가를 얘기하고는 금세 끊었다.

    “뭐, 예상대로 집에 있어. 한 번 찾아가봐.”

    마사키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한번 차면서도 머리를 끄덕였다.

    “······쯧, 뭐. 알겠어.”

    “써니 선생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골치 아팠던 것도 해결하고. 감사합니다.”

    “그림 배워서 고마워요.”

    선희의 대답에 타마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뭘요. 아 참, 가시기 전에 사인이라도 한 장.”

    *

    가이낙스를 빠져 나온 우리들은 다시 86을 타고 이동했다.

    그런데 운전을 하고 있는 마사키가 아까부터 계속 묘한 표정을 하고 있다.

    “뭐, 문제라도 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그 후카미라는 남자가 좀 별나서.”

    “별나요?”

    “네. 좀 음침하거든요.”

    “음침?”

    뭔가 애매한 말이다.

    “그래도 타마노의 말대로 이쪽 계통에선 진짜 실력자니까.”

    “그 후카미라는 사람은 왜 가이낙스에 영입이 안 된 거죠? 그렇게 실력이 있다면서. 다른 곳에서 영입된 겁니까?”

    “아뇨. 원래 사람들이랑은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거기다 가이낙스도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 쉽게 어울리지 못해서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타마노 씨가 제자라는 거 보면 아예 사람들과 안 어울리는 건 아닌 모양이던데.”

    “타마노랑은 오래전에 같은 연구회 멤버였던 모양이에요. 아마 열심히 쫓아다녔겠죠. 그 친구야 원래 그림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자존심은 버릴 수 있는 친구니까.”

    그렇게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는데, 어느새 자동차는 주택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한산하다 싶은 곳으로 진입하더니, 곧 멈추었다.

    “자, 여기에요.”

    마사키가 운전석에서 내리자 우리도 따라 차문을 열고 나갔다.

    도쿄인근임에도 텃밭이랑 공터가 많은 지역이라 시골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그 때문일까.

    코로 공기를 잔뜩 빨아들였더니, 상쾌한 기분이다.

    선희도 나를 힐끔 보더니 콧구멍을 확장시키며 따라한다.

    “후아.”

    그런 선희를 보며 웃음을 짓고 있는데, 마사키가 ‘뭐하는 거지?’하는 표정으로 우리들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우리를 데리고 2층짜리 낡은 주택의 앞으로 갔다.

    허리밖에 오지 않는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마사키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빼꼼히 열렸다.

    안에서 경계하는 눈빛과 함께 약간은 걸걸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아, 후카미 씨. 전 가이낙스에서 일하는 아스카 마사키라고 하는데요.”

    “가이낙스엔 안 갈 거라고 얘기했는데.”

    “아뇨, 그건 알고 있어요. 오늘 찾아온 건요······.”

    그때 문이 탁하고 닫혀버렸다.

    “······아.”

    말하다 멈칫한 마사키가 우리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뭐, 이런 분위기라.”

    “아까 타마노 씨가 전화를 한 것 같았는데, 전혀 모르는 눈치네요?”

    “그냥 인사정도만 해요. 누가 찾아간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한참을 두드리고 나서야, 다시 문을 살짝 열렸다.

    “아, 진짜.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거요?”

    눈빛도 그렇고 음성도 그렇고, 아까보다 짜증이 잔뜩 묻어있다.

    “아, 타마노 이사오의 추천으로 온 겁니다.”

    “······타마노가 추천?”

    “네. 그 친구가 이분을 후카미 씨한테 모시고 가보라고 했거든요.”

    “······왜?”

    “그림 때문에요.”

    “······.”

    문이 살짝 더 열리며 후카미의 시선이 선희 쪽으로 이동한다.

    아까는 얼굴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젠 대충 보인다.

    이마가 많이 들어난 떡 져 보이는 긴 머리, 통통한 볼 살에 키는 작아 보인다.

    대충 30대 중후반의 느낌이다.

    하지만, 타마노가 31살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묘한 눈빛으로 선희를 바라보았다.

    경계를 하면서도 호기심이 약간 어린 표정으로.

    그때 다시 마사키가 입을 열었다.

    “써니 선생님이세요. 삼사라로 유명하신 만화가.”

    “······모르는데.”

    “아, 그럼 파시엔시아요. 요즘엔 머신건 잭도 그리고.”

    “······.”

    “아, 메갈로폴리스 인 캣이라는 만화도.”

    그때 후카미가 움찔한다.

    아, 이건 아는 만화인 모양이다.

    “타마노에게 들은 기억이 있군요. 하지만 별로 관심은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속 선희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선희도 그런 후카미를 마주 바라봤다.

    선희의 무심한 눈빛을 받은 후카미가 곧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는 다시 마사키에게 말했다.

    “타마노에겐 미안하지만, 역시 관심이 없······.”

    그때 선희가 빼꼼히 열린 문 쪽으로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뭔가 했더니 아까 가이낙스에서 그렸던 그림들이다.

    아무튼 그 때문에 깜짝 놀란 후카미가 멈칫했다가 그림을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곧 문안에서 손이 나와서는 종이를 받아갔다.

    그렇게 문 하나를 두고 대충 5분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선희는 별다른 행동변화 없이 서 있었지만, 곁에 서 있던 마사키는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이다.

    그렇게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곧 문을 벌컥 열렸다.

    그리고 일주일은 안 씻은 것 같은 후카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런 그가 여전히 경계의 눈빛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들어와요.”

    “아, 고맙습니다. 자 들어가죠.”

    “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좁은 거실마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퀴퀴한 냄새도.

    이거 홀아비 냄새인가?

    주변을 돌아보니, 청소라고는 하지 않는지, 잡다한 물건들이 사방에 쌓여있다.

    옆으로 지나치는 방문 사이로 보이는 곳도 마찬가지.

    정면에 보이는 부엌도 더럽기는 마찬가지다.

    후카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는데, 계단도 각종 책자들과 옷가지들이 널려있다. 그것들을 그가 발로 대충 툭툭 걷어내며 올라간다.

    나무 계단은 낡아서인지 계속 삐걱거린다.

    이거 무너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주변을 돌아보는 마사키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있다.

    집의 꼴이 이렇게 말이 아니니, 이해는 된다.

    아무튼 2층으로 올라가자 바로 나타난 방문을 후카미가 열고 들어갔다. 그런 그를 따라 우리도 들어갔다.

    “······?”

    들어가자마자 마사키가 깜짝 놀랐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

    이곳은 아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장소여서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

    그럭저럭 깔끔한 방의 벽장에 전시되어 있는 수많은 프라모델들.

    그리고 짙은 갈색의 엔틱한 책상까지.

    이곳은 공기마저 전혀 다른 느낌이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그가 선희의 그림을 들고 책상으로 가서 앉는다.

    그리고는 ‘어설퍼, 어설퍼.’라고 중얼거리며 종이 한 장을 꺼내 뭔가를 슥슥 그리기 시작했다.

    집 주인이 아무런 말도 없이 저렇게 행동하자, 얼떨떨해하던 마사키가 우리를 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자, 모두 앉을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나도 바닥에 앉아서는 방을 둘러봤다.

    방에 있는 것들만 봐도 후카미라는 사람의 취향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온통 로봇이나, 비행기 같은 메카닉 프라모델에다 벽에 붙어 있는 그림도 건담이나 모스피타, 레이즈너, 드라고나 같은 로봇들뿐이다.

    그런데 선희는 우리와 달리 바닥에 앉지 않고,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후카미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림에 빠져있던 후카미가 움찔 놀라더니 불편한 표정으로 선희를 돌아봤다.

    “그냥 앉아 있으면 좋겠는데. 그림 그리는 모습, 누가 보는 거 안 좋아해서.”

    그렇게 말하는데도 선희는 여전히 그가 그리던 그림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 때문에 후카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마사키 쪽으로 돌아봤다.

    마치 ‘얘 좀 데려가 줘.’ 하는 표정으로.

    하지만 마사키는 앉은 채로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때문에 후카미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때.

    “이거, 이상해.”

    선희가 여전히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하자, 후카미가 이번엔 더 크게 움찔했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인 표정과 음성으로 선희에게 버럭 했다.

    “뭐라는 거야! 건방지게!”

    후카미가 소리를 질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선희는 그림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다시 말했다.

    “이거, 대칭이 틀렸어.”

    “대칭? 네가 뭘 안다고·······.”

    후카미가 진짜 화난 모양이다.

    그러자 이번엔 선희가 그에게서 연필을 빼앗아 그의 그림에 뭔가를 슥슥 그린다.

    그 때문에 후카미가 더 놀랐다.

    이제까지 접한 적 없는 강적이겠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선희는 옆에서 흥분한 채 씩씩 거리고 있는 후카미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빠른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뭘 그리나했더니, 머신건 잭의 새로운 디자인이다.

    이건 아까 가이낙스 사무실에서 타마노랑 같이 그리던 그림인데, 그게 좀 바뀌어 있다.

    왜 그런가했더니, 방금 후카미가 새롭게 바꾼 디자인인 모양인데, 확실히 디자인이 멋지다.

    과연 타마노가 추천할 만하다 생각했는데, 그것을 다시 선희가 그리고 있다.

    이번 디자인은 양손 형 머신건이라 대칭이 어쩌고 했던 모양이지만 내 눈엔 그가 그린 그림이랑 선희가 그린 그림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그런데 선희가 그림을 완성해가자 후카미의 표정이 분노에서 점점 충격을 받은 얼굴로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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