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26화 (326/425)
  • 세상은 넓고 실력자는 많다 (4)

    키도의 86을 타고 마사키의 안내를 받으며 가이낙스의 사무실로 갔다.

    가는 도중에 그가 말했다.

    “원래는 월세 70만 엔짜리 고급 사무실에서 제작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작비를 몽땅 다 써버려서 17만 엔짜리 작은 곳으로 옮겼어요.”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는다.

    물론 나는 알고 있는 이야기다.

    “제작은 이미 작년에 다 끝난 상태였어요. 그런데, 좀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후반작업을 추가로 하고 있어요. 뭐, 작업하는 사람들이 다 완벽주의자라서.”

    그것도 알고 있다.

    세계관을 만든다고, 쓸데없이 세세한 것까지 새롭게 만든다고 돈을 엄청 쏟아 부었을 테니까.

    특히 에바의 안노는 프레임단위까지 분석하면서 로켓발사장면에 매달린 덕분에 제작비가 미친 듯 상승했을 거고.

    아무튼 곧 개봉할 예정이라 팀 전체가 신경이 날카롭다는 모양이다.

    뭐, 그렇겠지.

    아마추어들이 모여 자신들의 모든 열정을 다 쏟아 부어 만든 작품이니까.

    가이낙스라는 이 회사도 원래는 왕립우주군 단 한편을 끝으로 해산할 예정일 테고.

    물론, 결과는 대실패.

    결국 빚을 갚기 위해 가이낙스는 해산도 못하게 될 것이다.

    덕분에 온갖 패러디가 난무하는 건버스터를 결국 제작하게 되겠지.

    물론 유명한 작품이지만, 빚 갚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나마 프린세스메이커라는 게임으로 빚을 어느 정도 갚아나가게 될 것이다.

    애니 제작사가 게임으로 돈을 벌게 되는 아이러니.

    그 다음에도 나디아를 만들지만 또 제작비를 다 탕진해버려 빚은 더 늘게 된다.

    결국 대망이 1995년 에반게리온이 대박을 치고 나서야 빚에서 탈출하게 된다.

    빚 때문에 장장 10년 동안이나 노예생활을 하게 될 불쌍한 중생들인 것이다.

    물론, 팬들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곳에 가고 있다.

    아 참, 원래 왕립우주군은 3월 중순쯤에 개봉하는 것이 원래 역사지만, 도중에 무슨 일 때문인지 5월로 연기되어버렸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분명 내가 한 행동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나비효과라는 것 밖에는.

    아무튼 말대로 생각보다 사무실의 크기는 조촐하다.

    물론 그 덕분에 그곳은 온갖 잡동사니들과 책상, 그리고 사람들로 붐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가는데도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좀 재밌다.

    그저 좀비 같은 몰골의 사내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만 보였을 뿐이다.

    우리를 안내한 마사키가 누군가에게 다가가서는 물었다.

    “오카다 씨는 어디 갔어?”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없어?”

    “없는데?”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 양반이 뭐 제대로 붙어있나? 또 어디 놀러갔겠지.”

    “그럼 야마가 씨는?”

    “당연히 돈 빌리러 갔지. 그나저나 아직도 돈을 빌릴 수 있다니, 그 사람도 진짜 대단하다.”

    자기들 일인데 남의 일처럼 말하고 있다니.

    “그래? 그럼 안노는?”

    “저기 저 쪽.”

    남자가 구석자리를 가리킨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낡은 점퍼를 걸친 채 구석에서 TV를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는 마른체형의 남자가 보인다.

    젊은 시절의 안노가 맞다.

    아무튼 안노의 위치를 확인한 마사키가 우리를 데리고 그쪽으로 갔다.

    나도 처음부터 안노를 만나려는 게 목적이었는데, 이번엔 운이 좋다.

    그런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저기, 안노.”

    “······나, 지금 바쁜데.”

    “어, 그래. 알았어.”

    마치 TV 속에라도 들어갈 태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 더 이상 말 걸기가 어려운지 마사키가 대번에 포기해버렸다.

    “저렇게 몰두하고 있을 땐 건드리기 힘들어요. 여유가 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사키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건드리면 곤란할 것 같은 분위기다.

    뭘 보나 했더니, 각종 애니의 화려한 액션장면만 따로 편집된 영상이다.

    쯧.

    이번 단추도 헛발이다.

    음.

    역시 이곳에선 무린가?

    하기야, 조만간 인생을 모조리 쏟아 부은 작품이 개봉하려는 시점이니 시기는 좀 안 좋기는 하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이곳을 고집한 이유는 그래도 제작사들 중에 유일하게 만화가 좋아서 모인 오타쿠들의 회사는 이곳이 유일해서다.

    그런 사람들은 일반 제작사 직원들과 달리 열정도 뛰어나서 선희에게 좋은 영향을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분위기가 이래서야 원.

    “저기 자리에 앉으세요.”

    결국 멀뚱거리며 서 있는 우리에게 소파 쪽으로 안내한 그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놓인 잡다한 물건들을 서둘러 치운다.

    우리가 앉자마자 그가 말했다.

    “커피 드릴게요.”

    그리고는 서둘러 간의 부엌으로 보이는 곳으로 간다.

    그 모습을 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래도 내가 덕후가 맞는 모양인지 가이낙스의 초창기 때 사무실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기는 하다.

    그저 선희에게 실망을 준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그런데 선희는 아까부터 어딘가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

    처음엔 안노를 보는 줄 알았는데, 거기 근처에 있는 책상에서 몸을 숙인 채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시선이 가 있다.

    누구지?

    얼굴만 봐서는 전혀 모르겠다.

    아는 얼굴도 있지만, 대부분 모르는 얼굴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주변을 슬쩍 돌아봤더니, 모두 자신들의 일에 몰두하느라 우리 쪽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뭐, 그렇다면 방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슬쩍 선희를 툭 건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선희도 날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피해가며 선희의 시선이 닿은 사람 쪽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우리가 다가갔음에도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지 정신없이 그림에 몰두해있었다.

    뭘 그리나 싶었는데, 왕립우주군에 등장하는 전투기와 많이 닮아있다.

    그런데 뭔가 묘하게 다르다.

    실제 애니에선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디자인인가?

    연필로 그리고 있음에도 상당히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 그림을 보던 선희도 관심 있어 하는 눈치다.

    아무래도 이곳에 온 목적이 메카닉 디자인 때문이었으니, 이런 그림도 관심이 가겠지.

    그런데, 그림을 보던 선희가 인상을 쓰더니 머리를 갸웃했다.

    뭔가 그림에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그때 마사키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뭐 문제라도 있어요? 써니 선생님?”

    그런 마사키의 말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남자의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우리를 돌아봤다.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지만, 얼굴의 윤곽이 뚜렷한 미남형 얼굴이다. 그런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써니······ 선생님?”

    “응. 타마노 네가 좋아하는 써니 선생님. 그런데 너 오늘 편의점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냐?”

    “잘렸어.”

    “뭐? 잘려?”

    마사키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검은 뿔테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응.”

    “······.”

    “그런데 정말 써니 선생님?”

    마사키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타마노라 불린 남자는 놀란 눈빛으로 선희를 쳐다봤다.

    이제는 저런 모습을 하도 많이 봐서 나도 익숙해져 버렸다.

    아무튼 그런 그의 그림을 계속 쳐다보던 선희가 입을 열었다.

    “저기, 저거 좀······.”

    “왜? 뭔가 문제라도 있어 보여?”

    “응.”

    하지만 더 이상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선희를 보던 타마노가 자신의 그림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곧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선희를 한번 힐긋거리고는 물었다.

    “혹시, 문제가 보이세요?”

    그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이상은 반응을 보이지 않자, 타마노가 눈치를 보더니 곧 종이 한 장을 책상에서 꺼내 펼치며 말했다.

    “저기, 여기에 그려주실 수 있나요?”

    조심스럽게 말하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이번엔 마사키가 근처에 비어있는 의자를 끌고 와서는 선희 앞에 놓았다.

    “여기 앉아서 그리세요. 넌 좀 비켜봐.”

    “아, 그래.”

    그렇게 대답한 타마노가 슬쩍 물러나자 선희가 빈 종이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유의 빠른 손놀림으로 그림이 그려지는데, 아까 타마노가 그리고 있던 비행기의 모습이다.

    한번 본 것일 뿐인데도 그것을 정확하게 복제하듯 그려낸다.

    그런데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그냥 똑 같은 그림 같은데.

    “오,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타마노는 선희의 그림을 보고는 금방 반응했다.

    역시 뭔가 이들에게만 보이는 게 있는 모양이긴 한데.

    나도 한때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역시 그림만큼은 내공이 부족한 모양이다.

    뭐, 곁에 있던 마사키도 표정 보니까 나와 별반 달라보이진 않는다.

    아무튼 그게 시작이 되었는지 두 사람은 그림에 대한 의견교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대화가 아닌 그림으로.

    선희가 그림을 보여주면, 그저 타마노는 ‘아’ 혹은 ‘역시’ 따위의 감탄사를 내뱉을 뿐이다.

    그리고 선희의 그림이 끝나면 그것을 보고 난 뒤 타마노가 다른 형태의 비행이기를 그린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조금씩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현실에 존재하는 비행기는 모형을 참고해서 그리면 오류를 줄일 수 있지만, 처음부터 상상으로 만들어진 비행기다보니, 머릿속에서 그려진 것과 실제는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묘한 차이를 느끼고는 있지만,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던 상황에서 선희가 그 오류를 고쳐주니 저렇게 감탄할 밖에.

    선희의 진짜 강점은 바로 이거다.

    몇 가지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그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니까.

    그러나 새로운 것을 창작을 하는 것에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른 작품들을 참고해서 그렸던 거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를 느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이런 내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타마노의 오류를 수정해준 선희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머신건 신작에 등장하는 새로운 디자인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남자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며 의견을 묻는 것이다.

    선희의 그림을 말없이 바라보던 타마노가 입을 열었다.

    “조잡해요. 이건. 좀 더 다른 디자인이 필요한 거죠?”

    그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곧 선희의 머신건을 이리저리 살피던 타마노가 백지를 가져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희의 그림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머신건.

    기계가 덕지덕지 붙어있던 복잡한 그림을 간단한 선 몇 개만으로 깔끔하게 처리한다.

    그런데, 그게 상당히 세련된 느낌이다.

    뭐랄까?

    선희의 그림을 승용차에 비유하자면, 외피가 다 벗겨져 기계가 들어난 느낌이지만, 타마노는 기계는 보이지 않고, 유려한 외부의 디자인으로 그려진 느낌이랄까.

    적은 선으로 더 멋지고 효과적인 느낌으로 변한 것이다.

    “상상을 이용하세요. 복잡한 기계는 이 철판 아래 숨겨져 있다, 뭐 그렇게요.”

    “상상······.”

    “네. 상상이요. 독자들에게 다 보여줄 필요가 없어요. 만화 속에서 그림자를 이용하는 것도 비슷한 경우죠. 실제로는 거의 검은색으로 표현하지만, 그 속에 온전한 것을 떠올리는 독자들, 혹은 애니메이션의 시청자들은 상상하거든요. 그러니까 다 그릴 필요가 없는 거죠. 그리고 그런 착각이 더 퀄리티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요.”

    “······.”

    선희는 그 말을 이해했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상상이라.

    그러고 그 것을 잘 이용한 건 후에 등장할 만화인 ‘로쿠데나시 블루스’ 같은 만화로도 잘 표현된다.

    거기에 등장하는 교복들은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반 이상이 검은색 그림자로 채워져 있고, 빛을 받은 부분만 톤으로 묘사한 덕분에 묘하게 사진처럼 디테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기법은 배경을 그릴 때도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다.

    하지만, 선희는 그런 방식이 아니다.

    뭔가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부분은 굳이 다 일일이 그리는 타입이니까.

    그게 오히려 발전을 막는 독이 되는 것이다.

    하긴, 이 문제는 내게도 책임이 일정부분 있다. 만화가가 되고, 어시들을 들이고 부터는 거의 연필로만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것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음, 대부분 연필로 작업한 덕분에 얻은 것도 있지만, 그만큼 잃은 것도 많았던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덕분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생략법보다는 세련된 디자인이 더 중요하지만.

    그런데 이 친구가 금방 황당한 소리를 했다.

    “네. 맞아요. 와, 역시 그림에 대한 감각은 천부적이네요. 이렇게 금방 가르쳐 줄게 다 떨어질 줄은 몰랐는데.”

    뭐?

    벌써 다 익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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