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실력자는 많다 (2)
“그래. 네가 좋아하는 건담이라든가, 단바인 같은 거 디자인 하는 사람.”
내 말에 선희가 날 빤히 쳐다본다.
“왜?”
“건담은 좋아하는 거 맞는데, 단바인은 별로.”
“아, 그랬냐?”
하긴 단바인의 디자인은 좀 투박하긴 하지.
“그런 사람들을 오빠가 알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모르지.”
“그럼 어떻게 만나려고?”
“뭐, 지금부터 알아보자.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내 말에 선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하긴, 근거도 없이 자신 있게 떠들었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그런데 우리의 대화를 듣던 경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있다.
“너는 또 왜?”
내 질문에 후다닥 달려들더니 내 팔을 꽉 붙들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데려가줘라.”
대학생이 되더니 근력이 상당히 좋아졌군.
하지만, 본체의 근력이 좋은 탓에 힘들이지 않고 잡혔던 팔을 슥 뺐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 방학에 데려가 줄게. 지금은 대학공부 열심히 해야지. 네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 아니었어?”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럼 얘기는 여기서 그만.”
“그러지 말고······.”
“끝.”
단칼에 끊어버리자 경희가 울상이 되었다.
“잉.”
*
- 일본에 오신다고요?
“네. 개인적인 일 때문에요. 선희랑 함께.”
개인적인 말 때문인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유는 묻지 않았다.
- 써니 선생님이랑 두 분이서 말입니까?
“네.”
- 그럼, 초청서류랑 호텔까지 예약해 두겠습니다.
날짜를 알려주자 지로가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며칠 후, 일본에 도착한 우리는 공항에서 곧바로 지로가 예약해두었다는 호텔로 향했다.
대충 5일정도 머무를 예정인데, 솔직히 그 짧은 시간동안 선희를 일깨울만한 만남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물론,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도 그들에 대한 정보는 머릿속에 있으니까, 일단 부딪쳐보는 수밖에.
지로를 통한다면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우리 원고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사람이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볼 참이다.
물론 잘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냥 선희랑 오랜만에 관광이나 하는 셈 치는 거지 뭐.
물론 선희는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아,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너무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아무런 결과 없이 돌아가면 경희에게도 바가지를 긁힐지 모른다.
‘이렇게 그냥 놀다올 거면 날 데려갔어야지! 너무하잖아!’
으, 그렇게 말할 경희가 눈에 선 하구나.
생각해보니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일단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부터 걸었다.
지금 이시기에 가장 바쁜 사람들에게.
바로 에반게리온으로 유명한 가이낙스다.
물론 지금은 그리 유명한 제작사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제작사라고 할 만큼의 위치도 아니다. 그저 자신들이 꿈을 위해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는 오타쿠들일 뿐.
현재는 개봉을 앞두고 있는 ‘왕립우주군’ 준비에 한참 정신이 없을 시기였다.
물론 정확하게는 애니메이션 제작 때문이 아닌 돈을 빌리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건담완구회사로 유명한 반다이에게 투자받은 3억 엔은 이미 몽땅 다 써버린 상태니까.
- 네, 여보세요.
뭔가 힘이 없으면서도 신경질적인 남자의 음성이다.
“거기가 제작사 가이낙스가 맞습니까?”
- 네, 그런데 누구십니까?
“네, 전······.”
- 아, 정말 제작비 더 빌릴 곳도 이젠 없다니까. (야, 그래도 제대로 만들려면 이래야지.) 야, 그래도 돈을 그렇게 쏟아 부으면 어떡하냐. 나중에 감당 못하게. (성공하면 되지.)
전화기를 든 채 그들의 대화를 그냥 듣고만 있었다.
지금은 제작 마무리 단계이고, 곧 개봉을 할 상황임에도 아직 돈이 들어갈 구멍이 더 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망하게 된다.
오타쿠, 아니 아마추어들이 가장 흔하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잘 만들면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잘 만들어진 것과 잘 팔리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장점은 열정이 뛰어나다는 것이지만, 문제는 현실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후자가 너무 치명적이라 앞으로 그들이 겪어야 할 고난이 많다는 게 문제지만.
주어진 자본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제작비가 한없이 불어난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저 완벽한 애니를 만들겠다는 욕심만으로 뛰어들었으니 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전화기를 든 채로 누군가와 떠들던 남자가 다시 물었다.
- 어디시라고 했죠?
갑자기 질문을 던지자 깜짝 놀랐다.
“아, 네. 전 텐겐이라고 하고요, 써니랑 함께······.”
- 네. 알겠어요. 텐겐, 써니······. 다음에 연락드리죠.
뚝.
뭐야?
연락을 어떻게 주겠다는 건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노려보다가 그냥 끊었다.
쯧, 뭔가 첫 단추부터 꼬인 느낌이다.
“······.”
그런데 그런 날 선희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
쓴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그때,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호텔보이인가?
문을 열었더니 생각지도 못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가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여어.”
“키도 형.”
오는 걸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찾아온 거지?
그런데 키도는 그런 내 의아한 표정엔 관심이 없다는 듯 안으로 쓱 들어왔다. 그리고는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는 선희를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오, 써니야, 이 오라버니께서 오셨다.”
“안녕.”
선희가 그런 키도에게 손을 살짝 흔들었다.
머리를 끄덕인 키도가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뭐야,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건가? 호텔이라도 너무 누추하군.”
“이정도면 상당히 고급인데?”
“급이 맞지 않는다는 거다. 급이.”
“급?”
“쯧, 말해 뭣하겠냐.”
그러더니, 아직 제대로 풀지 않은 가방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키도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자자, 선희야. 너도 가방 챙겨라.”
“응.”
선희는 별다른 저항도 없이 창가에 있는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선희가 가방을 다 싸자 그것을 내 가방과 함께 키도가 번쩍 들었다.
“자자, 이젠 나가자.”
“어딜?”
“어디긴, 당연히 우리 집이지. 이제까지 너희들 한 번도 우리 집에서 묵은 적 없었지. 이젠 일본 오면 호텔 같은 거 잡지 말고 우리 집으로 와라. 전에도 올 때마다 다른 곳에서 묵으니까, 이 형 마음이 안 좋더라.”
그렇게 말하면서 다짜고짜 두 개의 가방을 들고는 앞장서서 나간다.
그런데 그런 키도를 선희는 별다른 반응 없이 순순히 따라간다.
곧 나도 할 수 없이 한숨을 푹 쉬고는 곧장 두 사람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는 아래로 내려가서 체크아웃을 한 뒤 키도의 86을 탔다.
진짜 이 차는 볼 때마다 문 옆에다 ‘후지와라 두부점’이라고 쓰고 싶다는 충동을 생기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키도에게 맞아 죽겠지.
아직은 이니셜D가 나온 시기도 아니라서 그렇게 쓰면 그냥 두부배달부 차량이 되어버리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여기 있는 걸 알았어?”
“테고시가 너희들 일본에 왔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아카기, 그 친구에게 물어봤지. 어디에서 묵냐고. 뭐, 나랑 네 사이를 잘 아니까 금방 말해주더구나.”
그렇게 말하더니 곧 혀를 쯧쯧 하며 찬다.
“좋은 호텔이었으면 내가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천하의 써니와 텐겐이 저런 누추한 호텔에서 묵는다니. 서둘러 오길 잘했지.”
“일은 어쩌고?”
“지금 일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아이고, 만화가가 원고작업이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한데? 그렇게 일 밀리면 또 어시들 날밤을 세워야 할 거고. 어휴, 진짜. 이게 뭐라고 자꾸 화실식구들을 괴롭혀?”
“······너, 잔소리가 많이 늘었구나.”
“형은 잔소리 들어도 싸지.”
“너무 하는군.”
키도가 그렇게 말하며 쩝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살 살피며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슬쩍 뒤돌아봤더니, 뒷자리의 선희는 평소처럼 차창 밖의 도시 풍경에만 집중하고 있다.
잠시 동안 실내엔 자동차 구동음 이외엔 들리지 않자, 그 어색함이 싫은지 키도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곧 뭔가 떠올랐는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참, 너희들 일본엔 무슨 일로 온 거냐? 두 사람만 온 걸보면 단순히 관광은 아닌 것 같고.”
“선희의 그림공부.”
“뭐?”
키도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림공부라니, 써니 쟤가 할 그림공부가 아직 있었나?”
“머신건 잭에 등장하는 새로운 머신건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야. 예전부터 메카닉 디자인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고.”
그 말에 어이가 없는지 키도가 머리를 쳐들고 웃었다.
“앞을 봐, 앞! 사고 나겠다.”
“어이가 없구만.”
“뭐가?”
“아니, 모든 그림에 만능인 만화가가 어디 있어? 하다못해 디테일한 그림과 연출의 귀재라는 오토모를 보라고. 인물 캐릭터가 개성이 있긴 해도 솔직히 등장하는 사람들 죄다 못생겼잖아.”
“······.”
“그리고 또 말이지. 잘 그린다고 하는 사람들도 조금씩은 자신이 약한 그림들이 있기 마련. 애초에 써니 정도의 그림을 그려내는 만화가는 전무하다시피 하는데, 뭐가 부족하다는 건지. 내가 써니 같은 실력이 있다면 니시다 그 녀석부터 비웃어 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혼자 또 뭐가 좋은지 낄낄거렸다. 그리고는 룸미러를 힐긋거렸다.
뒷좌석의 선희를 보고는 다시 피식 웃었다.
“대단한 아이야. 써니 저 녀석은. 그 실력을 갖고도 그런 욕심이라니.”
나도 슬쩍 돌아봤더니, 평소처럼 멍 때리며 창밖만 볼 뿐이다.
어쨌건 이 부분은 키도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선희의 지금 그림 실력은 이제 일본 최고의 만화가들과 비교해도 우위에 있을 정도니까.
그러나 내 기준으로 어설프게 선희를 판단하고 싶지 않다.
그저 선희가 더 나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면 도와줄 뿐.
그것이 선희 자신이 행복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림이 주는 행복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하게끔 하는 게 이 오라비가 할 역할이지.
“그런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선희의 그림을 더 보강할 참인데?”
“애니메이션 메카닉 관련 일러스트레이터와 만나게 하려고. 아까 호텔에서 가이낙스에 전화를 걸긴 했는데, 뭐. 바쁜 모양인지 전화를 그냥 끊어버려서 제대로 얘기도 못했지.”
“가이낙스?”
“어. 형은 잘 모를 거야, 오타쿠들이 모여 만든 애니메이션 창작 집단인데······.”
“모르긴 왜 몰라, 다이콘3, 4에서 그 정신 나간 오프닝을 만든 오사카 출신 녀석들이잖아.”
“어? 형이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처남 녀석이 거기에 있는데.”
“정말?”
“그렇다니까.”
이건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다.
가이낙스 멤버 중에 키도부인의 남동생이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