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23화 (323/425)

세상은 넓고 실력자는 많다 (1)

키도 일행들은 다음날 우리화실을 다시 한 번 더 들른 후, 오후 늦어서야 일본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날은 어시들에게 화실견학이라도 시켜주자는 의도였던 모양이다. 물론 그쪽 어시들이 모두 남자들뿐이라 다른 것도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뭐, 그런 것은 알아서들 할 문제고.

어쨌건 우리 쪽 어시들도 일본 어시들과 만나 지식, 정보 등을 교환할 수 있는 기회라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찾아왔을 땐, 여자어시들은 죄다 키도 부인에게 몰려갔다.

당연히, 그녀들의 관심은 키도부인의 빵 굽는 실력이었고.

은근 우리 화실의 여자 어시들 미모가 제법 좋은 탓에 키도 쪽 어시들이 뭔가 기대를 한 모양이었는데, 그건 그냥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 남자들끼리는 뭔가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별로 정보교환은 이뤄진 게 없어보였고.

나중엔 그냥 여자들이 만든 빵이나 실컷 먹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키도 측 어시들의 실망어린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그들이 모두 돌아간 뒤 그 다음날부터는 점심시간이나 잠시 짬이 생기면, 키도부인이 가르쳐준 요리를 만드느라 부엌이 분주하다.

어느 샌가 화실에선 빵 굽는 묘한 풍경이 생겨났다.

그 덕분에 이젠 빵 굽는 고소한 냄새가 계속 풍겨서, 이곳이 화실인지 제과점인지 가끔 헷갈릴 정도다.

“제과점 빵보다 더 맛있어.”

“응, 더 맛있어.”

가끔 놀러오는 꼬맹이들.

어느새 초등학생이 된 박미령과 성준모도 빵 맛에 감탄할 정도였으니.

뭐, 백설기 이 녀석도 빵에 아주 환장하고.

그 때문에 요즘엔 화실에 거의 죽치고 살다시피 하고 있다.

약삭빠른 빵냥이 녀석.

그나저나 아침부터 맡는 빵 냄새는 묘하게 기분 좋게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렇게 모두는 빵 냄새를 맡으며 작업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적응해가고 있었다.

며칠 후.

“어머, 빵 냄새가 너무 좋아요.”

화실에 들어오던 미치코가 코를 킁킁거리며 눈을 반짝거리며 좋아한다.

미치코도 은근히 빵을 좋아해서 화실에 올 때 제과점 빵을 자주 사오는 편이다.

그런 그녀였으니 이런 냄새에 크게 반응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자, 이거 맛보세요.”

“네, 고맙습니다.”

경희가 가져다준 평범한 모양의 빵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냄새를 맡더니 행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와, 냄새 너무 좋아요. 방금구운 빵 냄새 너무 좋아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빵을 살짝 손으로 뜯어서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오물거리더니 눈을 번쩍 떴다.

“이거 뭐예요? 맛이 왜 이렇게 좋은 거죠?”

“그렇죠?”

경희가 양팔을 허리에 턱 올린 채 우쭐거리며 좋아한다.

“일본에서도 이런 맛을 내는 빵가게가 드문데. 이걸 직접 만드신 거예요?”

그렇게 미치코가 감탄하자, 며칠 전에 키도 일행이 찾아왔던 일과 키도 부인에게 빵 굽는 방법을 배웠던 그 일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미치코가 이해했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 얘기는 저도 담당 분들에게 들었어요. 어시들만 빼고 꽤 즐거웠다고 하더라고요.”

“어시들만 빼다니? 이상하네? 그땐 즐거워하는 것 같았는데.”

경희가 머리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다른 어시들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다른 이들은 미치코의 말을 금방 이해한 모양이지만, 경희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눈치다.

대충 사정을 눈치 챈 미치코가 어색하게 웃었다.

“뭐, 아무튼. 담당 편집자들은 모처럼 쉬게 되었다고 엄청 좋아하시더라고요.”

그 말에는 경희도 이해를 했는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테고시 씨는 키도 오빠한테 너무 시달려서 불쌍하다니까요. 오죽하면 저에게 하소연을 했겠어요?”

“테고시 씨가요?”

“네.”

“아참, 그분 경희 선생님의 담당이셨죠?”

“에이, 저 가끔 알바로 하는 일이니까요. 전화는 가끔만 해요. 그나저나 선생님이라니.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쑥스럽게.”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좌우로 내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분은 좋은지 발그레한 얼굴로 헤헤거린다.

누가 봐도 그런 말을 듣기 원하는 게 얼굴에 다 써 있구만.

“아참, 선생님도 이젠 대학생이 되셨으니까, 본격적으로 스토리 써보실 계획은 없어요?”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경희가 머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있어요, 있어. 이젠 키도 오빠도 혼자 잘 하고 있으니까, 전 다른 걸로요.”

“혹시, 생각해둔 건 있어요?”

“그럼요.”

“뭔데요?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당연하죠.”

그렇게 말하더니 새롭게 구상중이라는 스토리를 미치코에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나도 그동안 경희가 새로운 신작을 준비 중이라는 건 처음 안 일이지만, 평소에도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다.

“평범한 사회 속에서 일반인들이랑 함께 살아가는 암살자의 이야기에요.”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 소재를 가지고 뭔가 대단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고르고13과는 다른 느낌의 킬러이야기군요.”

“네. 그리고 그쪽은 너무 심각한 느낌이지만 제가 구상한 건 좀 가벼운 거예요.”

“어떤 식으로요?”

“트럭을 끌고 다니며 야채를 파는 남자죠.”

“오, 재밌어, 재밌어. 그리고요?”

“의뢰를 하는 이는 주로 야채를 사러온 아줌마들 사이에 있죠. 무를 집어 들면서 암호를 말하죠. 그럼 암살자 총각의 눈빛이 싹 바뀌는 거예요.”

“총각이에요?”

“유부남보다는 총각이 좋지 않겠어요?”

쩝, 글재주는 인정하지만, 역시 경희의 말재주는 좀.

하지만 미치코는 정말 재밌는지 손뼉까지 치며 경희의 말에 몰두하고 있다.

“와, 새로워, 새로워.”

뭐가 새롭다는 건지.

“흥미진진하고요.”

진짜냐?

아무튼, 두 사람이서 신작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던 그때, 소파 맞은편에서 늘어져 자던 백설기가 소란 때문에 잠에서 깼는지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저 조그만 얼굴에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하긴 어지간한 내공으론 감당하기 힘든 수다들이니.

나도 나름 내성이 많이 생기긴 했지만, 저 두 사람의 수다는 좀.

하지만 다행하게도 그들의 수다는 길지 않았다.

“이거, 어느 정도 완성되면, 저에게 꼭 보여주세요.”

“그럼요. 카와다 씨가 일순위에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 써니 선생님이 작화를······?”

“에이, 아니에요. 선희는 오빠 작품만 하잖아요. 전 그냥 아무나 해주셔도 돼요.”

“그럼 그 부분은 제가 따로 알아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경희가 꾸벅 인사를 하며 좋아라한다.

경희가 한동안 진심의 남자 스토리를 돕고 나서 달라진 건 취향이 많이 남자 같아졌다는 거다. 이번에 짰다는 스토리도 들어보니, 암살자라는 거 보니 더 그렇고.

그런데 키도에게 받은 영향은 그게 끝이 아니다.

이야기의 진행도 많이 엉뚱해졌다는 거다.

아마 콘티도 약간 황당하면서도 개그스럽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그건 그렇고······.

선희는 아까부터 머신건 잭의 콘티를 한참 쳐다보고 있다.

뭘 저렇게 보나 싶어서 슬쩍 다가가서 봤더니, 잭의 변신장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만 있다.

그제야 뭣 때문에 저러는지 알 것 같다.

아마도 머릿속에선 신형 머신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겠지.

이제까진 평범한 스타일이었지만, 연재의 회차가 거듭될수록 디자인이 점점 세련되고 있으니, 나름 욕심이 생긴 탓일 것이다.

최근 일본 애니들의 메카닉 디자인이 점점 정교해지면서 동시에 화려해지고 있었으니, 선희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얼마 전에 지로에게 부탁해 신작애니의 디자인관련 책자를 몇 권 받았는데, 그것에도 영향을 받았을 테고.

하긴 지금의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스타급 메카닉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한참 활동하기 시작하던 시기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그리는 만화가가 메카닉만을 전문으로 하는 일러스트레이터보다 기계를 더 잘 그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희는 묘하게 경쟁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누군가에게 그림으로 밀리는 건 싫어하는 선희니까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한참을 고민하던 선희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이내 세라믹 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 저 세라믹 펜은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펜인데, 일반 볼펜에 비해 부드럽게 써진다며 선희와 경희가 상당히 좋아한다.

내 입장에서야, 솔직히 미래에선 흔한 볼펜도 이거보단 좋은 게 널려있어서, 특별할 건 없지만 그래도 이 시대엔 상당히 고급 펜에 속하는 것이다.

볼펜이야 어찌되었건, 데생 없이도 상당히 디테일하게 새로운 머신건의 디자인을 각도별로 그려내고 있다.

마치 애니메이션 설정집에 나오는 것처럼 잭의 모습을 앞과 뒤, 그리고 신형 머신건만 따로 확대시켜 세세한 묘사까지 다 그려내고 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 보자면, 저렇게 한 장면이야 어찌어찌 그려낸다고 해도, 각도별로 복잡하게 생긴 머신건의 모양을 똑같이 그려내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저런 복잡한 기계가 마치 컴퓨터 캐드로 작업한 그림들 마냥 각도별로 정교하게 그려진다는 건, 결국 머릿속에서 그만큼 완벽하게 그려져 있다는 뜻이니까.

그동안 수많은 배경을 데생해오면서 그림을 입체로 이해하는 건 이제 달인의 경지도 넘어선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여러 장을 그려대면서도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계속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음,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간섭하기엔 애매하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방법이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

그날 저녁.

어시들이 모두 퇴근하고 난 뒤, 아직 머신건 디자인에 몰두하고 있는 선희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일본에 가볼까?”

“일본에?”

“그래. 너, 지금 머신건 잭 디자인 때문에 고민 중이잖아.”

내 말에 선희가 갑자기 딸꾹질을 한다.

그러자 소파에 누워 책을 보던 경희가 벌떡 일어나더니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가서는 물잔을 들고 나온다. 그리고는 그것을 선희에게 들이밀었다.

“자자, 마셔, 마셔. 쭈욱, 쭉. 오올치!”

선희는 경희가 내민 물잔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쭉 들이켰다. 그러고 나자 딸꾹질이 잠잠해진다.

“어휴, 갑자기 무슨 일이래? 중학교 때 이후로 딸꾹질 처음이지?”

경희의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렇게 놀란 거야?”

“·······.”

놀랐다고?

내가 놀랄만한 말을 했었나?

일본에 가자는 말에 놀라지는 않았을 거고, 그럼, 결국 그림에 대한 고민을 들켰기 때문인가?

하기야, 선희의 입장에선 그림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일 테니, 그걸로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 일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다 경희처럼 수다로 그것을 풀어내는 스타일도 아니니, 더 그렇겠지.

괜한 말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저,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

“뭔데, 뭘 없었던 일로 해?”

“일본 가는 거.”

“뭐? 또 일본에 가는 거야?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응?”

경희가 호들갑을 떨자 조용히 있던 선희가 입을 열었다.

“일본에 가면 방법이 있어?”

선희의 말에 내가 움찔했다.

자신에게 생긴 문제를 피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일단 나도 몰라. 그냥 생각한 게 있어서.”

“그게 뭔데?”

“일본 애니메이션 메카닉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만나볼까 해서.”

내 말에 선희가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메카닉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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