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11화 (311/425)
  • 메갈로폴리스 인 캣 (1)

    “······고마워.”

    전화기를 들고 있는 선희가 일본어로 말했다.

    지금 선희는 오랜만에 스미레와 통화중이다.

    가끔 이렇게 통화를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서로 확인하며 지내고 있는데, 듣기론 얼마 전에 연재 중이던 만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크게 인기가 있는 건 아니라 결국 세권을 넘지 못하고 연재가 중단 되었겠지.

    소년점프는 다른 출판사보다 연재 경쟁이 치열한 편이다. 물론 그 덕분에 일본 최고의 잡지가 된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초반 임팩트가 약한 만화는 여지없이 잘려나간다는 단점도 있다.

    초반보다 후반에 더 빛이 나는 만화는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다.

    따지고 보면 소년 히어로도 비슷한 구조이긴 하지만.

    아무튼,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내고 선희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요즘엔 주간연재는 머신건 잭 하나밖에 하는 게 없어서, 널널한 편이라 거의 일러스트를 낙서처럼 그리고 있다.

    늘 평소처럼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그리고 있음에도 어쩐지 내게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뭐랄까.

    ‘어서 신작을 내 놓으시지.’

    이런 느낌?

    어시들도 주간연재 1편이 끝나자마자 많이 여유가 있다.

    “미정아, 넌 주말에 뭐했어?”

    “영화 봤어요.”

    “나돈데. 넌 뭐봤어?”

    “아웃오브 아프리카요. 메릴 스트립 나오는 영환데 꽤 재미있었어요. 언니는요?”

    “난 뭐, 성룡이지.”

    “아, 용형호제 맞죠?”

    “응. 스케일도 크고 엄청 재밌더라. 확실히 성룡영화가 재미나다니까.”

    두 여자의 대화에 김기철도 끼어들었다.

    “전 내추럴 봤어요. 홈런 공에 야간 등 터지는 장면은 정말 멋지더라고요.”

    “그거, 이번 토요일 저녁에 보려고 생각중인데. 재밌어?”

    “네. 재밌어요. 아카데미상을 여러 개 받았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상 받은 작품이라 재미가 있더라니까요.”

    “무슨 얘기 하시는데요? 저도 좀 끼워 주세요.”

    한국어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류타니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묻자 모두 웃었다. 그리고 곧장 일본어를 섞어 대화를 한다.

    어쨌건 월요일이라 그런지 지난 주말에 있었던 얘기를 하느라 모두 즐거워 보인다.

    그때 화실 안으로 박상식이 들어왔다.

    “저 왔습니다.”

    “어, 왔어.”

    “그래. 요즘 파시엔시아 끝나서 그런지 한가하네.”

    “어. 가끔 이럴 때도 있어야지. 그런데 형은 어때? 4구의 지옥 속편 연재가 결정되었다고 들었는데.”

    내 말에 박상식이 빙긋 웃었다.

    “맞아. 안 그래도 보름 후 부터야. 다른 이야기 준비해야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본격적으로 연재를 해야 하는 터라 스토리를 다시 가다듬고 있어. 얼마나 장편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듣기론 일본에서도 4구가 슬슬 인기를 얻고 있다던데. 당구장도 제법 생기는 모양이야. 반응이 생각보다 좋은 것 같던데.”

    “운이 좋았어.”

    “운도 실력이지.”

    “솔직히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추양구 씨 그림이 좋잖아. 슬슬 일본 수준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으니까. 일본에서 반응도 나쁘지 않아서, 다른 만화가들도 조금씩 일본에 도전하는 분위기고.”

    “그래?”

    한국만화계도 조금씩 분위기가 변해가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과거로 오면서 생긴 변화가 조금씩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것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만약 많은 한국 만화가들이 일본에 진출해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국 출판계도 변화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IMF 이후에 일본문화 개방이 이뤄지고 동시에 한국만화계가 침몰하기 시작한 그 시점에 변화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단순히 한국만화계의 몰락은 IMF나 일본문화개방이라는 사건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다. 수많은 일들이 복합적으로 발생하며 생긴 결과물이니까.

    아무튼, 이젠 일본도 한국도 내가 알던 기억과 상당히 다른 부분이 많아졌다는 건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 어째 나라가 뒤숭숭하다. 시위도 더 격렬해지는 것 같고. 역시 얼마 전에 있었던 대학생 죽음 때문인가?”

    박상식의 말대로다.

    새해가 되고나서 점점 시위가 더 많아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북한에선 11명의 가족이 한꺼번에 탈출해서 외국 어딘가에 가 있다는 모양인데, 그것도 뉴스에 자주 나오고 있다.

    내가 살던 시절에야 워낙 탈북자들이 많아서 특별한 게 아니었는데. 지금 시대는 흔치 않아서 그런지 방송이나 신문에서 자주 보도하고 있다.

    거기다 다음 달부터는 평화의 댐을 건설한다는 얘기도 계속 나오고 있고.

    아무튼 경제 쪽은 꽤 사정이 좋은 모양이지만, 정치 쪽은 계속 시끄러운 게 지금의 모습이다.

    물론 인터넷이 없는 세상이라, 자세한 내용을 일반인이 알기는 어렵지만.

    저녁이 되고 모두 퇴근한 뒤, 화실에 남은 건 선희와 경희, 그리고 나 셋뿐이었다.

    류타니는 요즘 실버랑 같이 지내고 있는데, 한국어 특훈을 가장한 노예가 된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뭐, 덕분에 류타니의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기는 했지만.

    냐앙.

    백설기가 마루에 앉아있던 경희의 다리에 매달려 머리를 부비적거린다.

    “이 녀석, 오랜만에 찾아와서는 또 밥 달라고?”

    그런 경희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다시 백설기가 울자, 귀여워 죽겠다는 듯 녀석을 번쩍 들어 머리를 맞댄 경희가 웃었다.

    “아우, 이 귀여운 녀석. 알았어, 이 언니가 맛있는 거 줄게. 같이 부엌으로 가자.”

    그렇게 말하며 백설기를 안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런 모습을 멀뚱거리며 바라보고 있는데, 선희가 다가왔다.

    그런데 어쩐지 표정이 진지해 보인다.

    “왜? 뭐 할 말 있어?”

    경희의 삼삼삼 커피를 입에 가져가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그러자 선희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시험해보고 싶은데.”

    “시험? 뭘?”

    “이제 시험도 끝났으니까, 그리고 싶은걸 그렸으면 좋겠어.”

    “······.”

    하긴 그동안 바쁜 고등학교 생활과 병행하며 만화를 그려야 하는 생활 때문에 무리를 안 하게끔 옆에서 자제시키긴 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고 대학이 결정 나자마자 저런 말을 할 줄을 몰랐다.

    “뭘 그렸으면 좋겠는데?”

    “미래.”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놀랐다.

    “······미래?”

    설마 뭔가를 알고 말한 건 아니겠지.

    표정을 자연스럽게 유지하며 식은 커피를 다시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백설기를 보니까.”

    “뭐?!”

    하마터면 너무 놀라서 커피를 쏟을 뻔했다.

    느닷없이 백설기라니.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

    하긴, 처음에도 내게 누구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으니.

    그런데, 이어서 나온 선희의 말에 맥이 탁 빠져버렸다.

    “그렇게 그려보고 싶어서.”

    “백설기를 보니까, 미래를 그려보고 싶어?”

    “응.”

    이 무슨 앞뒤 맥락 없는 말인지.

    그래도 백설기를 보고, 미래를 그려보고 싶다는 말에는 좀 놀라기는 했다.

    “······어떤, 미래를 그려보고 싶은데?”

    그 말에 선희는 대답대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

    선희가 책상에 있는 간의 책꽂이를 뒤적거리더니, 거기서 연습장 하나를 꺼내 내게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내밀자 받아 들고는 조심스럽게 펼쳐봤다.

    혹시 내가 경험한 진짜 미래가 연습장에 그려져 있으면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그런데, 이번에도 어째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긴 하지만, 내가 살던 미래와는 다르다.

    바로 몇 년 전에 미국에서 개봉했고, 실제로 화실에 비디오로 소장중인, 블레이드 러너의 미래도시 풍경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아키라도 약간 그런 느낌이긴 하지.

    아,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이 2019년이었나?

    내가 2018년에서 왔으니, 1년 후가 배경이구나.

    물론, 아예 다른 세계관에 발전 정도가 전혀 다르니, 의미 없는 거겠지만.

    아무튼 내가 안도하며 한숨을 푹 쉬자 선희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한 뒤 그림들을 살펴봤다.

    어쨌거나 선희가 생각한 미래도 다른 만화나 영화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물론 이런 미래를 그린 건 내가 알기로 1920년대 쯤 나온 독일영화 ‘메트로폴리스’가 가장 큰 영향을 줬겠지만.

    아무튼, 선희가 그린 미래의 모습도 상당히 멋지다.

    엄청나게 높은 마천루, 그 사이에 뻗어있는 몇 층으로 이뤄진 얽히고설킨 도로.

    빌딩과 빌딩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좁은 길로 다니는 짧은 전철들.

    하늘에 떠다니는 미래형 자동차까지.

    사이버펑크의 전형적인 도시와 다를 게 없다.

    물론 진짜 미래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진짜 미래는 어찌 보면 지금 시대에선 너무 심심하니까. 리얼한 것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

    어찌되었건 선희의 일러스트는 그림만으로도 상당한 매력이 있다.

    이런 설정으로 무슨 얘기를 만들고 싶은 걸까?

    그림을 더 보고 나서 선희를 보며 물었다.

    “스토리 회의는 지금 할까?”

    “혼자하고 싶어.”

    “뭐? 혼자?”

    “응.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그려보고 싶어. 대사 없이.”

    “대사······ 없이?”

    “응.”

    순간 깜짝 놀랐다.

    대사가 없는 사이버펑크 만화라.

    극도로 대사의 양을 절제한 작품은 많이 봤지만, 아예 없는 건 곤(GON) 말고 또 뭐가 있지?

    물론 그래픽노블 쪽이나 애니에선 몇 개가 있기도 하지만 메이저 잡지에 연재중인 작품 중에선 기억나는 게 없다.

    물론 연재중이더라도 몇 화 정도는 그렇게 실험적으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극도로 드물다.

    그만큼 실험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성공한 작품인 곤의 경우에도 세상에 아직 나오지 않은 시기니.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선희가 날 툭 친다.

    잡념에서 빠져나오자 선희가 물었다.

    “실은······, 몇 페이지 그려놓은 게 있는데.”

    그려놓은 게 있다고?

    요즘 뭘 그렇게 열중해서 그리나했더니 일러스트가 아니었나?

    “봐도 될까?”

    내 물음에 선희가 머리를 힘차게 끄덕이더니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가서 이번엔 원고를 가지고 왔다.

    대충 10장 남짓.

    잉크에 먹칠까지 혼자 다 그린 모양이다.

    물론 톤 작업은 빠져있지만.

    그런데 첫 페이지부터 심상치 않다.

    디테일로만 치면 아키라의 도시배경보다 더 복잡해 보일 정도다.

    자세히 보니, 자는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상당히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물론 평소 그리던 그림처럼 기계적인 정확성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럼에도 작정하고 그렸다는 건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첫 장면 빌딩 꼭대기의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공각기동대?

    매트릭스?

    그런데 황당하게도 빌딩 꼭대기에 있는 건 사람이 아닌 검은 고양이다.

    뭐지?

    고양이가 빌딩 꼭대기에 있는 건 특이하면서도 재미있는 느낌이다.

    그런 고양이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해있다. 바로 같은 빌딩옥상에 있는 검은 슈트의 여자.

    미래형 쌍안경으로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무슨 스파이 같은 종류의 여자로 보이는데, 이런 건 공각기동대의 느낌도 있다. 물론 지금 기준에선 공각기동대가 아직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다.

    화면의 연출을 보면 고양이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니까, 곤처럼 동물이 주인공이라는 건가?

    고양이의 시선으로 본 사이버펑크물 쯤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복잡한 그림임에도 의외로 부담 없이 가볍다는 느낌이다.

    기존의 사이버펑크와는 전혀 다른 느낌.

    잠시 후 멈칫하던 여자가 곁에 있던 물건을 집어 들더니 귀에 가져갔다.

    대사는 전혀 나오지 않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귀에 가져간 물건이 전화기라는 건 알겠다.

    그런데······.

    보통의 전화기가 아니라, 분명 스마트폰이다.

    심플한 디자인도 그렇게 전화 받을 때 손가락 동작까지.

    확실히 스마트폰이다.

    이건 진짜 미래의 물건이다.

    “······이거, 네가 생각한 거야?”

    놀란 내가 선희에게 물었더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그럼?”

    “전에 오빠가 연습장에 낙서하던 걸 봤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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