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10화 (310/425)
  • 돈으로 인맥으로 (2)

    드디어 1987년의 새해가 밝았다.

    어느덧 나도 이곳 나이로 벌써 25살이 되었다.

    내가 떠나온 2018년의 내 나이가 25살 이었으니, 이제야 원래의 나이가 된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덤으로 4년을 더 산 셈인가?

    실제로는 29살이어야 하는 건데.

    뭐, 덕분에 20대가 길어지니 좋기는 하다만.

    아무튼 새해가 시작되고 신정이 지난 뒤에도 화실은 여전히 바빴다.

    물론, 파시엔시아는 작업이 모두 완료되었고, 다음 주면 연재도 완전히 끝이 난다. 그리고 엔딩이라는 사실도 잡지를 통해 밝혔다.

    그 때문일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의 전화가 꽤 많이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특히, 축구선수를 꿈꾼다는 독자들로부터의 항의 전화나 엽서가 꽤 많은 편이었다.

    팬이란 분노할 때 가장 무서운 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며 지로가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쌍둥이들과 누나의 대학이 결정되었다.

    서울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대학이라, 엄마도 엄청 기뻐했고, 화실에서도 꽤나 많은 축하를 받았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이렇게 뿌듯하다니.

    미래에선 형제 없이 어떻게 살았나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일로 분주하던 그때, 오랜만에 미네로부터 전화가 왔다.

    간단한 인사 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 나카야 그룹 회장의 외동딸인 나카야 이즈미에 대해서 아시죠? 소년 히어로 만화 연재중이라던데.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무슨 일 있습니까?”

    - 아니, 재미있는 걸 봐서요.

    “재미있다니, 어떤 거요?”

    - 레이븐 바스만을 만나더군요.

    레이븐 바스만?

    “누구죠? 그 사람이?”

    - 음, 역시 천재스토리작가도 할리우드 영화 쪽은 잘 모르는 모양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 미국 유명 시나리오 작가예요.

    “시나리오 작가요? 이즈미 씨가 그런 사람을 만났다구요?”

    - 네. 뭔가 재미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요?

    “재벌이니까 그냥 친분으로 만나는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 글쎄요. 친분으로 만나는 거면, 좀 더 공개적으로 만날 텐데, 어째 비밀스럽더라고요.

    그 말에 내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얘기라면 그만 두세요. 남의 사생활에 대해선 별로 알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건 루머 독자들에게나 알려주세요.”

    - 어머, 텐겐 씨는 관심 없어요?

    “쓸데없이 많은 걸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 의외네요.

    그렇게 말하며 또 웃는다.

    뭔가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아무튼 잠시 그렇게 웃던 미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말했다.

    - 뭐, 우리 독자들이 기대할 만한 얘기였다면, 텐겐 씨 말대로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기사로 먼저 썼겠죠.

    “아니라는 겁니까?”

    - 네. 아니에요. 불행하게도.

    그렇게 말하는데도 음성은 묘하게 즐거워하는 것처럼 들린다.

    - 제가 좀 조사해봤더니, 아무래도 만화 때문에 만난 것 같아 보이던데.

    “만화 때문에요?”

    만화가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 그것도 미국의 유명 시나리오 작가를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바로 만화 스토리.

    그러고 보니 요즘 이즈미 작가의 스토리가 힘이 빠지고 있으니, 그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 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더라구요. 소년매거진이었나, 전에 연재하던 잡지. 아무튼 거기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더라구요. 물론 그때는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라던데,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아무튼 유명한 사람이라더군요.

    “그래서 그때는 어땠는데요?”

    - 아, 만나서 어떤 결론이 났느냐고요?

    “네.”

    - 뭐, 조사한 바로는 오히려 스토리가 갑자기 급변해서 인기가 더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잘은 모르지만, 그 때문에 돈도 엄청 썼다던데.

    순간 긴장하던 몸에 맥이 쑥 빠져버렸다.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와 만났다는 말만 듣고 엄청 신경 썼는데,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결론은 망했다는 거니까.

    하긴, 연재만화 스토리와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 전개 방식이 다를 테니, 거기다 애초에 국가도 다르니.

    - 요즘 그 재벌 아가씨 성적이 좋지 않다면서요?

    “네. 초반보다는 조금 힘이 약해지긴 한 모양이더군요.”

    - 진짜, 그런 거 보면 천재니 어쩌니 옆에서 부추기는 모양인데,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에요. 그냥 영화의 나라 미국에서 알려진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도움만 받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차라리 저라면 미국 코믹북 스토리 작가를 만나겠는데.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에요. 애초에 일본이랑 미국만화는 다르니까요. 관심분야도 다르고.”

    - 아, 그렇군요. 그것까지는 몰랐어요. 역시 만화 쪽 지식은 다르군요. 아무튼 제가 알려드릴 이야기는 이정도예요.

    “일부러 그런 것 때문에 전화 주셔서 고맙습니다.”

    - 뭘요, 이렇게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어차피 텐겐 선생님께는 집안일에 도움 받은 것도 크고요.

    “서로 좋은 거니까 도움이라고 할 것도 없죠. 아무튼 덕분에 좋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 도움이 된 건가요?

    “네. 도움이 되었습니다.”

    - 그럼, 언제 데이트라도 하죠.

    “네?”

    내가 놀라 되묻자 곧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하하, 농담. 아무튼 다음에 또 재미난 거 알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아, 네. 고맙습니다.”

    그렇게 얼떨떨한 상태로 전화를 끊었다.

    *

    그런데 얼마 후,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드디어 역대급 엔딩이라는 평가를 받은 파시엔시아가 마무리를 지은 지 한주 후.

    지로로부터 전화가 왔다.

    - 스토리가 급변하면서 꽤나 스토리가 흥미 있게 변했다는 게 대부분의 반응입니다. 아마 이번 앙케이트에서도 꽤 좋은 성적이 나올 것 같습니다.

    실제 내 생각도 같았다.

    초반의 임팩트가 사라져 꽤나 심심해져 버렸던 내용이었는데, 새로운 군 세력의 등장으로 인해 이야기가 흥미롭게 변한 것이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재앙처럼 번져가던 바이러스를 쓸어버리는 장면에선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앙케이트에서 나타났다.

    - 다시 데빌 바이러스가 머신건 잭 다음인 2위가 되었습니다. 편집부에서도 이번 화는 1위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는 반응입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지로의 말은 맞았다.

    그만큼 임팩트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전력으로 무장한 미군과 일본 자위대가 힘을 합쳐 싸운다는 식의 진행으로 은근히 국뽕까지 건드려 준 덕에, 반응이 더 좋았을 테니까.

    물론, 개인적으론 일본 자위대가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작전을 수행한다는 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뭐, 만화니까.

    그런데 미묘한 느낌은 받은 건 다음 화 부터였다.

    * * *

    코지마가 이즈미의 저택 밖에서 폴짝거리고 있었다.

    1월의 매서운 날씨에 발이 시린 탓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양말을 몇 개 더 신고 올걸 그랬나?”

    양손을 겨드랑이에 끼워 넣은 채 추위에 호들갑을 떨던 코지마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그는 한 시간째 밖에서 이렇게 추위와 싸움을 하고 있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분명 오늘 완성된 원고를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음에도 이렇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으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때 커다란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코지마는 반가운 표정으로 대문에 다가갔다.

    그러다가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는 멈칫했다.

    백인, 흑인들로 구성된 사람들 여러 명이 문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늘 이즈미를 따라 다니던 노인이 영어로 그들과 인사를 한다. 잠시 후 고급 차량들이 다가왔고, 그것을 타고 모두 사라진다.

    코지마는 그런 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역시, 재벌가라서 외국 손님이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때 노인이 코지마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노인이 인사하자 덩달아 코지마가 머리를 숙이고는 손사래를 쳤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외국 손님들도 많이 오시는 모양이군요.”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외국인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는 드물죠.”

    “특별한 일이요?”

    “네, 저 분들은 아가씨의 일을 돕기 위해 온 분들입니다.”

    “역시 재벌가 아가씨는 다르군요. 이즈미 선생님께서 따로 하시는 일도 있으신가 봐요.”

    “이번은 아닙니다. 만화 때문이니까요.”

    “만화요?”

    “네. 미국에서 오신 각종 분야의 전문가 분들이시죠.”

    “······.”

    순간 코지마가 눈을 경악한 표정으로 얼어붙어버렸다.

    만화라는 것이 요즘 들어 전문성을 많이 필요로 하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각종 분야의 전문가를 그것도 미국에서 불러 만화를 만들다니, 애초에 스케일이 다른 여자였다.

    “저렇게 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않을까요?”

    “무슨 말씀인지요?”

    “그러니까, 원고료로 감당하기 힘들지 않나 해서요.”

    “아, 네. 출판사에 주는 원고료로는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아가씨는 원래 원고료엔 관심이 없으세요.”

    하기야 재벌집 아가씨에게 원고료는 껌 값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1위라는 자존심이 더 중요할 것이니까.

    아직 1위를 해본 적이 없을 테니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그때 노인이 준비해온 것을 코지마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코지마가 노인에게 서류봉투 하나를 건네받았다.

    “이번 주 완성된 원고입니다.”

    코지마가 서류봉투를 꺼내 한 장씩 살폈다. 그림은 앞에 받았던 원고보다 퀄리티가 더 높다. 군사 무기들도 상당히 정교하다.

    아예 작정하고 집중해서 그렸다는 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스토리를 살피기엔 부족하다. 그림만 확인한 코지마가 곧바로 노인에게 인사했다.

    “원고는 확실히 받았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십시오.”

    하지만 원고를 받아 편집부로 돌아온 코지마가 다시 살펴보고는 인상을 썼다.

    “······.”

    분명 퀄리티는 더 높아졌음에도 이상하게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전개였다.

    그리고 그런 코지마가 지로를 불렀다.

    “팀장님.”

    “응? 왜?”

    “이거 좀 읽어보시겠습니까?”

    “왜? 뭔가 문제가 있나?”

    “일단 한 번 읽어보시고 판단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지로가 코지마에게 원고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지로의 표정도 코지마처럼 심각해졌다.

    “어떠세요?”

    “이야기가 좀 산만해졌군.”

    “그렇죠? 아, 역시.”

    코지마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세 명이면 문수보살의 지혜가 나오지만, 역시 사공이 너무 많은 모양이에요.”

    “무슨 소리야?”

    “그게요······.”

    코지마가 이즈미의 집 앞에서 보고 들었던 얘기를 하자, 지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과도한 욕심을 부린 탓이군.”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다 이즈미 선생님이 계속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제가 이렇게 손 놓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만나주지도 않는다며,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지로의 말에 코지마가 한숨을 푹 쉬었다.

    “휴, 제 의견도 좀 들어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계속 찾아가 봐. 그래도 자네가 담당편집자잖아.”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주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데빌 바이러스 7위입니다.”

    직원의 말에 코지마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쩌면 좋지?”

    그렇게 데빌 바이러스는 코지마의 불길한 예상처럼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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