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인맥으로 (1)
“300점 이상 고득점자가 4,125명이라······. 작년보다 1,500명 넘게 늘어났다는군. 아무튼 이 안에 선희가 포함되었다는 거지?”
점수가 발표되고 난 월요일 아침 신문을 보던 실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와, 우리 선생님은 진짜 천재는 천재인 모양이에요. 만화 두 편을 주간으로 연재, 아니지 월간지 연재도 하나 더 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많은 걸 연재하면서 학력고사 300점 고득점자라니.”
“맞아요. 우리 작은 선생님은 만화를 안 그렸어도 성공하셨을 거예요.”
“그나저나 경희 씨도 성적이 높게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박소미의 질문에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죽자 사자 공부한다고 코피도 몇 번 쏟아내더니, 꽤 좋은 성적이 나온 모양이에요. 뭐, 올해 시험이 작년에 비해 평균 7점정도 올라갔다니까, 그런 효과도 있었을 거고.”
“에이, 그래도 300점 이상이면 엄청 잘 한 건데, 너무 냉정하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하하.”
“그나저나, 이제 곧 원서 넣을 때 눈치작전 엄청 하겠어요.”
“경희는 그렇지만, 선희야 뭐 경희가 가는 곳에 가면 널널할 겁니다.”
“하긴, 하향 지원이라고 하셨죠?”
“네.”
가족들은 그것 때문에 좀 아쉬워하긴 하지만, 애초에 대학에 관심이 없었으니 경희 아니었으면 그나마 대학도 안 가려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건 경희가 아니고 누나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는데, 점수가 경희보다 높게 나와서다.
점수만 보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대학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문에 누나 본인도 놀랐지만, 가족들은 정말 놀랐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선희가 놀랄 정도면 말 다한 거지.
본인은 학비 때문인지 적당한 대학에 원서를 넣으려 했지만, 경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좋은 대학에 넣으라고 설득했었다.
거기다 선희까지 거들었다.
‘학비는 내가 내줄게.’
선희의 이 한마디로 그냥 이야기는 끝.
은근 부자이긴 하지만, 한 번도 돈에 대한 부심을 부려본 적이 없던 녀석이었는데.
뭐, 그래도 마음씀씀이가 기특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누나도 오늘부터는 경희와 함께 들어가고 싶은 대학에 원서를 넣기 위해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닐 모양이다.
선희야 뭐, 경희와 같이 간다고 했으니 대학만 정해지면 학과는 알아서 하겠지.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무슨 과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 예상이 안 된다.
애초에 대학에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니까.
어쨌거나 내년이면 집에 대학 신입생이 무려 3명이 동시에 생겨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새해부턴 생활비가 늘긴 하겠지만, 지금 우리 사정엔 부담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고. 뭐 그 덕분에 요즘 엄마는 매일이 즐거워 보이시니 잘 된 거지.
아참, 선희는 전액 장학금이려나?
아무튼 쌍둥이들이 학력고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 할 때, 오랜만에 미치코가 찾아왔다.
양손 가득 짐을 가지고.
물로 밖에도 아직 들여놓지 못한 짐들이 잔뜩 이다.
그래서 어시들 몇 명이 나가서 그녀의 짐을 들고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카와다 씨.”
“안녕하세요, 텐겐 선생님.”
“짐이 왜 이렇게 많아요?”
“아, 네. 출판사에서 드리는 거예요. 연말 선물.”
그 말에 어시들이 환호했다.
아무튼 작년까진 별다른 선물이 없었는데, 올해부터 갑자기 만화가들에게 주는 선물이 생긴 건가?
아무튼 선물도 다양하다.
먹을 것도 있고, 전자제품, 거기다 가방 같은 것도 있는데, 다 브랜드다.
“이 많은 걸 다 구입하려면 꽤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많이 벌잖아요. 이번에 크게 쓰는 거죠.”
“다른 만화가 화실에 다 보내려면 엄청 나겠는데.”
“다른 화실엔 보낸다고는 안했는데.”
“네?”
“아, 실은 이거 다 사장님이 보내신 거라.”
“아······.”
“아무튼 선물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하며 미치코가 웃었다.
그나저나 정미자 화실 일만으로 바쁠 텐데, 요즘엔 지로의 일도 돕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원래 지로를 돕기로 한 신입이 그만 두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쨌거나 덕분에 우리야 익숙한 미치코가 계속 찾아와주니 더 편하긴 하지만.
“아참, 데빌 바이러스 얘기 들으셨어요?”
“뭘요?”
“아, 아카기 선배가 말 안했나보네. 이번 앙케이트 랭킹.”
“이번에도 파시엔시아가 1위, 머신건 잭이 2위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데빌 바이러스 3위 아닙니까?”
“아뇨. 6위까지 떨어졌어요.”
“네?”
깜짝 놀랐다. 가장 위협적이던 만화가 한순간 순위가 확 떨어져버렸으니.
하긴, 요즘 내용이 많이 늘어진다는 느낌은 받긴 했다.
그래도 그림의 퀄리티는 여전한데.
물론, 만화의 중심은 이야기니까 그림만 좋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첫 화부터 돌풍을 일으킨 천재 신인이라고 엄청 시끄러웠는데, 갑자기 순위가 떨어지니까 흥밋거리 이야기가 초반에 다 바닥이 난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어요.”
“그래요?”
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뭔가 힘을 일부러 뺀 느낌이라.
물론 주간 연재다보니 그때그때 흥미 있는 얘기가 등장해 주지 않으면 순위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떨어질 거라고는 예상 못했지만.
역시 연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팬들의 충성도가 낮아서 그런 건가.
“담당인 코지마 씨만 제일 답답한 상황이에요. 담당이 되고 나서는 한번 밖에 만나질 못했다고 하니까.”
“네? 왜요?”
내 물음에 미치코가 인상을 팍 썼다.
“그 미친 여자······, 아니 이즈미 선생님이 자꾸 담당으로 아카기 선배를 원한다나 봐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아카기 씨를 담당으로 원해요? 우리 담당만 해도 정신없이 바쁘다던데.”
“그러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부잣집 아가씨라고 아무거나 막 요구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카기 씨는 뭐랍니까?”
“뭐래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하던데요.”
“그런데도 계속 담당을 해달라고 하고 있다?”
“그렇대요. 나 참, 아무리 편집자가 우스워 보여도 그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선생님?”
“그건 그렇죠.”
하지만, 눈앞에 있는 미치코도 따지고 보면 부잣집 아가씬데, 저렇게 얘기하는 걸 보니까 좀 웃기기도 한다.
그나저나 그 여자 웃기는구만.
왜 우리 담당을 자꾸 자기 쪽으로 옮기려는 거지?
엿을 먹이려는 건가?
좀 자기중심적인 것 같아도 그렇게 악해 보이지는 않던데.
하긴, 전화 통화 몇 번으로 다 알 수는 없는 거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꼴좋게 되었다니까요.”
“······.”
혼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중얼거리던 미치코가 내 시선을 느끼고는 곧장 화들짝 놀랐다.
“어머, 내가 뭐라는 거야. 하하.”
편집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자신이 우스웠는지 뒷머리를 긁으며 크게 웃었다.
* * *
저녁, 도쿄의 한적한 호텔 근처에 주차된 승용차.
그 속엔 여자가 졸린 눈으로 호텔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주간 루머의 여기자 미네 아츠코였다.
미네는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졸린 눈을 껌뻑거리며 중얼거렸다.
“레이븐 바스만······, 유명 시나리오 작가인 그가 왜 갑자기 혼자 일본에 온 거지?”
얼마 전 개봉한 영화의 성공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유명인이 일본에 비밀리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그를 추적 중에 있었다.
보나마나 영화 관계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쩐 일인지, 영화계 사람들과의 만남이 아닌 재벌집 아가씨와 만난다는 사실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 이렇게 한적한 곳의 호텔이니.
어쩌면 꽤나 재미있는 기사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렇게 호텔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빨대로 콜라를 쪽쪽 빨고 있던 그 때, 호텔 후문에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뒷길이라 주목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대포 같은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을 향해 찍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는 미네가 예상하던 것과 상당히 달라 보인다.
이상한 관계라면 서로 다른 시간에 나오던가, 아니면 비슷한 시간에 나오더라도 아는 척을 안 할 텐데, 지금은 대놓고 친한 척을 한다. 가볍게 포옹도 하는 걸 보면 친하긴 친한 모양인데.
“비즈니스 관계인가?”
사진을 찍으며 미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
“선배, 이 아가씨 알아요?”
주간 루머의 사무실.
미네가 남자 직원 한명에게 사진을 건네며 물었다.
사진을 본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는데?”
“로얄패밀리 전문이잖아요. 선배도 몰라요?”
남자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도 계속 잘 모르겠다는 듯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글쎄, 유명한 사람이라면 알겠는데, 이 얼굴은 잘 모르겠는데.”
“나카야그룹 아가씨에요.”
미네의 말에 남자가 깜짝 놀랐다.
“나카야그룹? 회장 나카야 케이지의 외동딸? 오, 이렇게 생겼구나.”
“역시 아시네요. 혹시 이 아가씨에 대해 아는 거 있어요?”
“조금. 하지만 얼굴은 처음 봤어. 그나저나 미인이라는 소문이 있더니, 생각이상인데.”
사진을 보며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린 미네가 그를 재촉했다.
“아는 데로 얘기해 주세요.”
“뭔가 냄새를 맡은 거야? 나한테 살짝 귀띔해주면 안 돼?”
“일단 얘기부터 해봐요. 그리고 아직 뭔가 알아낸 건 아니라서 지금 시점엔 알려드릴 내용도 없어요.”
그 말에 남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이야. 그나저나 남동생도 있었다던데, 아마 사고로 죽은 모양이더라고.”
“그래요?”
“응. 그래서 외동딸은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게 하는 모양이긴 한데. 그런 거야 뭐 로얄패밀리들의 특징이긴 하지만. 회사는 데릴사위로 이끌어 갈 테고.”
그렇게 말하더니 작게 ‘나 같은 남자는 안 데려가려나? 목숨 걸고 일할 수 있는데.’라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평소에도 이런 인간이라 대화를 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한다는 생각에 미네가 표정관리를 하며 물었다.
“그리고요?”
그런데 혼자 낄낄거리던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묘하게 변해버렸다.
“뭐, 알아낸다고 해도 돈 되는 기사는 아닐 거야.”
“네? 왜요?”
“걔, 로얄패밀리긴 한데, 별나다고 소문이 좀 났으니까.”
“별나요? 어떤 점? 남성 편력?”
그럼 더 좋다. 이런 거라면 재미난 기사를 많이 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미네의 반응에 남자가 그런 게 아니라는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그런 거면 좋지, 우리가 그거 전문이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라 뭐랄까, 독특하다고 해야 하나? 재벌가 외동딸이면 예상되는 그런 게 아니거든.”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요,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고.”
“여대생인데, 동시에 만화가래, 만화가. 나름 재능도 있는 모양인지 천재 만화가라는 모양이던데.”
“만화가요?”
“재벌집 외동딸치고는 좀 별나지. 왜 굳이 이미지도 좋지 않은 만화가를 하고 있는 건지. 아무튼 그 때문에 재벌들도 따돌리는 모양이던데.”
그렇게 말하던 남자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짝하고 쳤다.
“아, 그리고 보니 너도 전에 만화가 취재한 적 있지? 역시 만화 쪽 냄새는 잘 맡는 모양이야. 아무튼 얘기 해줬으니까, 큰 건 알게 되면 나도 알려줘. 알겠지.”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실실 웃더니 곧 자리에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미네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만화가라고? 재벌 외동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