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08화 (308/425)
  • 역습의 파시엔시아 (3)

    그동안 수많은 경기를 통해서 새로운 경기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고민을 많이 하긴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비슷한 경기의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고심을 하며 경기내용을 색다르게 만들어보려 했지만, 극적인 순간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을 느끼고 난 뒤 얼마 뒤부터는 파시엔시아의 순위가 중위권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무리를 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마지막 피날레는 좀 멋지게 하고 싶어서 프로 2군에서 1군에 넘어가기 위한 마지막 경기로 2군 최강팀과의 경기로 결정했다.

    담당인 지로는 엔딩에 대해 ‘편집자로서의 의견은 반대지만, 그래도 창작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미 파시엔시아보다 더 인기가 있던 삼사라도 엔딩을 했으니, 문제될 것은 없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 대해선 편집자에게 맡기는 소년 히어로의 방식이 만화가들에게는 좀 더 부담을 줄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독자의 입장에선 최고의 만화를 오랫동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화가의 입장에서 끝내야 할 만화를 계속 끝내지 못함으로 생기는 스트레스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억지로 끌고나가서 더 대박이 터지는 경우도 존재하지만, 결국 그 때문에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할 의지를 꺾어버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어쨌거나 내 경우는 그런 것과는 다르니까 굳이 고민할 부분이 아니긴 하지만.

    * * *

    며칠 후.

    직원 한명이 A4용지를 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머신건 잭을 누르고 드디어 1위!”

    “뭐?”

    놀랄만한 소식에 소년 히어로 편집부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파시엔시아가 결국 1위가 되어버렸어요.”

    “와, 진짜?”

    “파시엔시아, 갑자기 왜 이러죠? 진짜 갑자기 너무 재미있어진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며 지로 자리에 놓여있는 여러 개의 박스를 가리켰다.

    박스 속에는 팬들이 보낸 팬레터로 가득했다.

    최근엔 파시엔시아를 그린 엽서가 특히 많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쏠렸다. 그리고 대부분 부럽다는 눈빛이 되었다.

    직원 하나가 그곳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머신건 잭도 여전히 재밌는데, 파시엔시아는 갑자기 미친 것 같아. 정말 써니, 혼자가 아닌 거 아니야?”

    “텐겐이랑 팀이잖아.”

    “그런 뜻이 아니야. 그림의 밀도가 달라졌잖아. 연출은 더 놀랍고. 마치 두 사람이 따로 그리는 것 같으니까 그러지.”

    “자세히 보면 밀도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 연출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지.”

    “하긴, 그림이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해졌으니까.”

    “이건, 머신건 잭에서도 보이는 변화네요?”

    “당연하지, 한 사람이 그린 건데.”

    “그러고 보니 예전엔 한사람이 그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지 않았어요?”

    “그러네. 처음엔 그냥 다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담당인 아카기 팀장님만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고.”

    “그러게요. 그나저나 써니 선생님이 천재긴 천재인 모양입니다.”

    “데빌 바이러스도 천재 여대생 만화가잖아. 요즘엔 여류작가 전성기인가?”

    “소년지에서 여자만화가들이 돌풍을 일으키다니, 제 2의 타카하시 선생님이 자꾸 등장하는 기분이네요.”

    “남자 만화가들이 힘을 내야 한다니까. 소년지에서도 밀리면 어떡해?”

    “여기서 남녀를 왜 나눠?”

    그때였다.

    “그렇게 모여서 떠들 시간에 자기 담당에게나 신경 써!”

    야지마가 모여 있는 직원들을 향해 잔소리를 하자 직원들이 서둘러 흩어진다.

    그런 직원들을 보며 야지마가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른 선배 팀장이 다가와 물었다.

    “너 어째 즐거워 보인다?”

    “나, 이거 전부터 엄청 해보고 싶었거든. 팀장들이 직원들에게 빽 소리 치는 거. 그런데 해보니까, 이런 기분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팀장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야지마를 쳐다봤다.

    “어이그, 한심한 녀석.”

    “녀석이라니, 이젠 팀장이라고.”

    “아, 네. 제가 몰라 뵀습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야지마가 뒷짐을 지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지로가 들어오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두 분 뭐하세요?”

    “권력의 맛을 보고 있지.”

    “네?”

    야지마의 말에 지로가 머리를 갸웃했다.

    그때 편집부로 코지마가 힘없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이 코지마, 왜 그래?”

    야지마의 물음에 코지마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뇨. 그냥 뭐.”

    “너, 또 바람맞았구나.”

    “······.”

    그 말에 지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바람 맞다니, 무슨 소립니까?”

    “아, 못 들었어?”

    “뭘요?”

    “저 친구, 이즈미 선생을 못 만나고 그냥 돌아오잖아. 전화를 걸어도 집사인지 뭔지 하는 사람에게 차단당하고.”

    “네? 아직도 그럽니까?”

    “전에 한번 만나고는 쭉 저 상태인 모양이더라고. 더럽게 할 맛 안 날거야.”

    “······.”

    지로가 자리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는 코지마를 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야지마와 선배 팀장이 슬쩍 자리를 벗어났다.

    담당과 통화할 땐 자리를 비켜주는 게 예의니까.

    하지만 지로는 지금 자신이 담당하는 작가에게 전화를 거는 게 아니었다.

    “소년 히어로의 아카기라고 합니다. 나카야 선생님과 통화가 가능할까요?”

    - 편집자 아카기 지로 씨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 번호를 알려주세요. 그리고 전화를 끊고 기다리시면 곧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번호는······.”

    번호를 말한 뒤, 전화를 끊고 대략 3분 정도가 흘렀을 때 다시 전화기가 울렸다.

    “네, 아카기입니다.”

    - 무슨 일이죠?

    “이즈미 선생님. 코지마를 계속 만나지 않으시더군요.”

    - 코지마? 누구죠?

    “이즈미 선생님 담당입니다. 담당.”

    - 아, 그 사람? 그런데 왜요? 무슨 문제라도?

    “······편집자의 역할은 담당인 만화가······.”

    - 그보다, 요즘 파시엔시아가 잘 나가고 있다니, 담당으로서 뿌듯하시겠어요.

    갑자기 다른 얘기를 하자 지로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그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닌데요.”

    - 저도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처음부터 원하는 담당도 아니었고.

    “······.”

    - 담당을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면, 별로 하고 싶은 말은 없어요. 아, 그리고 써니 선생님께 전해주시겠어요?

    “뭘 말입니까?”

    - 조만간 제가 반드시 1위를 차지하겠다고요. 그럼.

    곧바로 전화가 끊기자 지로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수화기를 놓았다.

    그때 지로에게 코지마가 다가왔다.

    “나카야 선생님께 전화하신 겁니까?”

    “그래.”

    “소용없죠?”

    “그러네. 담당이라 힘들겠다.”

    “뭘요. 이젠 뭐 무감각해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걱정되는 건 따로 있습니다.”

    “뭐가?”

    “데빌 바이러스요. 스토리가 점점 힘을 잃고 있는 것 같아서.”

    “아.”

    사실은 지로도 코지마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다른 작가의 만화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인데, 이즈미의 작품은 조금씩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써니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의 천재타입이라 신경을 쓰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파시엔시아에게 2위를 빼앗긴 이후엔 조금씩 힘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고 있어서 걱정이 되는 것도 있었다.

    아무래도 코지마가 자신의 팀원인 이유도 있었고.

    “천재라고 옆에서 받들기만 하던 사람은 무너지는 것도 한 순간이잖아요. 저는 그게 걱정이 되거든요.”

    코지마의 말에 지로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 * *

    쌍둥이들이 방학을 맞이했다.

    시험점수가 28일에 발표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점수가 나온 뒤 대학을 지원할 것이다.

    경희도 자신의 점수는 대충 알고 있는 모양인데, 부담 될까봐 일부러 물어보고 있지는 않지만, 뭐 표정이 나빠 보이지는 않으니까.

    선희야 뭐, 애초에 시험이든 대학이든 관심이 없으니.

    누나는 뭐, 시험에 대해 별다른 얘기는 없는 편이라. 그래도 재수는 없이 점수 되는대로 가고 싶다고 하긴 했는데.

    궁금하긴 해도 그냥 모른 척 하고 있다.

    어쨌거나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화실 내부엔 온통 반짝이랑 형형색색의 꼬마 등이 깜빡거리고 있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제대로다.

    그럼에도 선희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원고 작업에 여념이 없다.

    내일은 쉬는 날이고, 크리스마스라 소파 위에는 각양각색의 포장박스가 쌓여있다.

    각자 퇴근 때 나눠줄 선물이다.

    “우리 생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들뜨죠? 선물 보니까, 기분이 싱숭생숭해요.”

    “일 년 동안 안 울었기 때문에 받는 선물이잖아. 그나저나 내 거도 있지?”

    이대봉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날 본다.

    그때 실버가 그림을 그리다 말고 눈을 부라렸다.

    “겨우 호빵 몇 개 사오고는 선물을 바라다니, 미친 거 아니냐?”

    “나, 엄청 여러 번 사왔거든!”

    “그만큼 여기서 처먹은 것도 많지.”

    “야, 쪼잔 하게 먹는 걸로 그러냐? 그리고 네가 주인도 아니면서 왜 생색을 내?”

    “주인의식 몰라? 주인의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그게 주인이라는 뜻은 아니거든.”

    “연말에 먼지 나도록 맞고 싶냐?”

    “툭하면 폭력을 쓰려고 하는 야만인.”

    “시끄러!”

    그때 내가 선물을 챙겨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보너스로 약간의 현금과 각자 취향을 생각한 선물들을 준비했는데, 어떨지는 모르겠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류타니가 가장 감동한 눈치다.

    화실의 잡일도 하면서 스토리 작가가 되기 위한 공부로 요즘 가장 바쁜 녀석인데, 작은 선물로 이렇게 감동하는 걸 보니까, 나도 기분은 좋다.

    아무튼 어시들에게 나눠준 뒤, 이대봉에게도 주었다.

    “아, 고마워. 역시 우리 윤환이는 마음이 참 따뜻하다니까.”

    “네가 하도 징징거리니까, 주는 거지.”

    “안 징징 거렸거든!”

    “지금도 징징 거리네.”

    “야!”

    그렇게 조금은 소란스럽던 시간이 끝나고 나자, 박소미가 입을 열었다.

    “파시엔시아도 드디어 끝이 날거라고 생각하니까, 어째 섭섭해요. 연말이라 그런가?”

    엊그제 파시엔시아가 끝날 거라는 얘기를 화실 식구들에게도 말해두었다.

    그 얘기를 했을 땐 또 작품 하나를 마무리한다는 뿌듯한 분위기와 함께 정들었던 것을 떠나보낸다는 섭섭함이 공존했었다.

    “그래도 마지막을 코앞에 두고 1위를 했으니까, 마음은 가벼워요.”

    “맞아. 나도 그동안 파시엔시아가 삼사라나 머신건 잭의 성적에 미치지 못해서 좀 아쉬웠는데, 마지막엔 그래도 제 몫을 제대로 한 것 같아서 기뻐.”

    “남은 두 편 최선을 다해볼 참이에요.”

    “그나저나 섭섭하네요, 그동안 정이 든 캐릭터도 많았는데.”

    김기철의 말에 실버와 계속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이대봉이 슬쩍 끼어들었다.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는 법이지.”

    그러자 박소미가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뭐야? 졸업식 노래 부를 분위기잖아. 하여튼 제임스 오빠는 뜬금없다니까.”

    “원래 제 정신이 아닌 녀석이야.”

    “실버 너는 갑자기 또 왜 시비야?”

    “아닌데.”

    “맞는데.”

    “둘 다 그만 좀 해요! 만날 싸워.”

    박소미의 말에 모두 웃으며 퇴근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때 선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날 보며 말했다.

    “파시엔시아 데생 완전히 끝났어.”

    그러자 모두가 멈칫했다. 그리고 그들이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수고했어.”

    그러자 선희가 정말로 오랜만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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