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07화 (307/425)

역습의 파시엔시아 (2)

며칠 후.

소년 히어로 편집부.

“앙케이트 나왔어요!”

“어서 줘! 빨리!”

“자자, 줄을 서세요. 싸우지들 마시고. 종이는 넉넉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직원이 달려들다시피 다가온 동료들에게 종이를 나눠줬다.

직원하나가 종이를 받자마자 돌아서려는데, 순식간에 그 종이를 야지마에게 빼앗겼다.

그러자 직원이 야지마를 보며 인상을 썼다.

“아, 진짜. 팀장님! 그거 제거예요!”

“넌, 새로 한 장 받아.”

“······너무 하시네.”

야지마가 낚아 챈 종이를 들고 지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지로의 모습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너는 순위 안 궁금해?”

“직원들 것을 뺏어야할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닙니다.”

“야, 이게 선임자의 특권이지.”

“안 좋은 관습이에요. 그거.”

“너도 참 깐깐하긴. 그나저나 정말 안 궁금해?”

“뭐, 종이도 남는데, 천천히 받으면 되죠.”

그 말에 야지마가 종이를 쥔 채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으래? 넌 여유가 있다 이거지? 늘 1위를 하고 있으니, 거기다가 파시엔시아도 이번에 엄청 활약해줬고.”

“꼭 그래서는 아니에요.”

“정말이지, 저런 여유가 더 밉다니까.”

그렇게 말한 야지마가 혀를 차고 나서 바로 앙케이트 순위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이번 파시엔시아가 좀 눈에 뛴다했더니, 2위까지 치고 올라와 버렸네. 정말 괴물이라니까.”

“······.”

“너는 왜 반응이 없냐? 역시 2위를 예상했던 거야?”

“성적이 좋을 거라는 건 예상했습니다.”

지로의 말을 들은 야지마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하네.”

“그런가요?”

“그렇게 웃지 마. 더 재수 없어.”

“아, 네.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표정을 정색하면 어떡해?”

“재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알았다, 알았어. 내가졌다. 순위에서도 지고, 말싸움에서 지고. 선배로서 위신이 안 선다.”

“하하.”

“그나저나 우리 중원요리왕 순위가 6위네. 에스퍼 존은 7위. 어쨌거나 에스퍼 존을 이긴 것만 해도 우리 무카이 선생, 기분 좋겠다. 당장 전화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낄낄거리던 야지마가 곧장 전화기로 달려갔다.

*

니시다의 화실이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키도가 배꼽이 빠져라 웃고 있자, 화실 내에 있던 어시들은 그저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키도의 그런 모습을 니시다가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키도 선생님, 남의 화실에서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니시다가 불만 섞인 음성으로 말하자 키도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니시다를 쳐다봤다.

“자네도 이젠 순위가 많이 밀렸군. 중원요리왕에게도 밀릴 정도면. 이젠 슬슬 새로운 만화를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겨우 몇 위 밀렸다고 연재가 끝날 리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진심의 남자도 진즉 연재를 끝냈어야죠.”

하지만 키도는 그런 니시다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한참 우주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고이즈미를 보며 말했다.

“고이즈미 씨. 이제 에스퍼 존은 추락하는 비행기라니까. 이젠 여기서 작업은 그만두고 우리 화실에 완전히 자리를 잡도록 해. 어때?”

그 말에 그림을 그리던 고이즈미가 대답 없이 어색하게 웃었다.

“둘째도 곧 생길 거라며. 이런 불안한 곳에서는 그만 일하라니까.”

“아니, 남의 화실에 와서 이게 뭔 행패입니까? 그리고 여기가 왜 불안해요? 월급 밀린 적도 없고, 딴 데보다 적게 준적도 없는데.”

“돈이 문제가 아니지.”

“돈이 문제가 아니면요?”

“그림이지, 그림.”

“네? 그림이요? 제 그림이 뭐가 문제인데요?”

“네 만화는 이제 신인들한테도 슬슬 밀리고 있잖아. 솔직히 그림체가 구식이니까.”

그 말에 니시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곧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키도를 쳐다보았다.

“말씀은 똑바로 하셔야죠. 솔직히 키도 선생님 그림체는 구식 아닙니까?”

“나는 아니지. 그리고 내 그림은 열혈물에 특화된 그림이고.”

“열혈물 자체가 구식이라는 겁니다. 구식. 스포츠도 요즘엔 열혈 안하잖아요. 터치 이후로 유행이 변했잖아요.”

“그래도 아직은 통하고 있지. 그리고 앞으로 수십 년은 끄떡없을 거니까.”

그 말에 니시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 맘대로 끄떡없어요? 데즈카 선생님도 새로운 흐름에는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셨는데.”

“데즈카 선생님이 콕 집어서 앞으로 열혈은 안 된다고 하신 것도 아니잖아.”

“억지 좀 부리지 마세요.”

“억지는 무슨. 아무튼 고이즈미 씨, 미래를 위해서라도 꼭 생각 해봐. 알겠지?”

“······.”

“아, 진짜. 그만하라니까요.”

키도는 니시다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돌렸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이지?”

“······뭐가 말입니까?”

“파시엔시아 말이야. 이번에 나온 거. 써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만화의 연출이 확 달라졌잖아.”

그 말에 이제까지 인상을 쓰고 있던 니시다의 표정이 갑자기 느긋하게 변했다.

“저는 좀 알 것 같은데.”

“뭔데?”

“아마 데빌 바이러스 때문일 겁니다.”

“그 싸가지 없는 여자의 만화?”

“네. 2화부턴 완전히 달라졌잖아요. 저도 2화 이후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정도면 뭐 데생을 했건 그렇지 않았건 엄청난 만화니까.”

“······그 싸가지 여자의 만화에 써니가 자극을 받았다고?”

“그렇겠죠. 그쪽도 솔직히 천재 아닙니까? 나이도 비슷하고.”

“그런가? 난 솔직히 그렇게까지 대단한지는 모르겠던데. 뭔가 지저분한 느낌에다 그림도 정신없고.”

그 말에 니시다가 졌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키도를 보며 잔소리를 했다.

“제 그림을 구식이네 뭐네 하지 마시고, 본인부터 다른 사람의 그림에도 좀 관심을 가지세요. 그러니까 항상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가장 최적화된 그림이라 그런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내가 원하는 걸 표현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해?”

“스스로 구식이라는 걸 인정하시는 군요.”

“뭐야?”

이번엔 키도가 버럭 했지만 니시다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 아가씨, 솔직히 안하무인에 건방진 건 맞지만. 실력으로 보면 진짜 대단한 거 맞아요. 고이즈미 씨, 안 그래요?”

“아, 네. 데생을 했다고 해도 대단한 그림입니다. 선이 좀 거친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요.”

“봐요, 고이즈미 씨도 내 말에 수긍하잖아요.”

“······.”

키도가 뿌루퉁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 이번 파시엔시아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연출뿐만이 아니라, 그림 속에 감정까지 제대로 담아내셨다니까요. 사람 하나하나 표정에도 간절함이 묻어나고. 정말이지 보는 저도 그 감정에 쓸려버리는 기분이었으니까요. 은연중에 골인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기분도 들고. 하하. 스포츠 만화를 보며 그런 기분이 든 것도 정말 오랜만이더라니까요. 역시 써니 선생님의 만화는 대단해요. 물론 그 바탕이 되는 스토리도 대단하지만. 역시 대단한 남매라니까요.”

그 모습을 보던 키도가 묘한 표정으로 니시다를 바라봤다.

“너도 참, 적당히 좀 해. 적당히.”

“제가 뭐요?”

“허구한 날 써니, 써니. 아니면 텐겐, 텐겐 거리는 것 말이야.”

“그게 왜요?”

“자네 스스로 만화가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라는 거지. 거기다 경력도 훨씬 길잖아.”

“존경하는데 경력이나 나이 따위, 뭐가 중요합니까?”

“알아, 아는데, 그 정도면 미친 거지. 종교라고, 종교.”

“안 미쳤는데요.”

니시다의 말에 키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친 인간이 스스로 미쳤다고 하는 법은 없어.”

“······.”

* * *

“대단하다, 대단해. 혼자 1, 2위를 다 해먹네.”

화실에 놀러온 이대봉이 소파에 널브러진 채 불만인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이대봉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야, 그럴 시간 있으면 돌아가서 다음 이야기 연구나 더 해라.”

그런 실버의 잔소리에도 이대봉은 콧방귀만 뀌며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물론, 나를 보면서.

“아, 진짜. 대단하다니까. 어떻게 혼자 다 쓸어 가냐. 욕심쟁이.”

“시끄럽다고.”

“부러워서 그러지, 부러워서. 그러니까 좀 내버려 둬.”

“그런 거면 네 집에 가서 해. 여기서 소금뿌리지 말고.”

실버의 그런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혼자 중얼거리던 이대봉이 벌떡 일어서더니 이번엔 선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선희야, 좀 살살해. 다른 만화가들 죽어나가는 소리가 안 들리니?”

그 말에 선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니까, 네가 너무······. 아이구, 말을 말자.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는 너한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알면 닥치고 좀 가만히 있어.”

“실버, 네가 창작자의 고통을 어떻게 알아?”

“네 꼴을 보면 알고 싶지도 않다.”

“무식한 너랑 더 말해봐야 뭐하겠니?”

“뭐야?”

실버의 눈빛에 깜짝 놀란 이대봉이 다시 내게로 후다닥 다가왔다.

“저런 무식한 놈을 데리고 있다니, 너도 참 용하다, 용해.”

“실버 형 데려온 건 형인데?”

“아, 그랬니? 정말 미안해. 저런 짐승을 키우게 해서.”

“야! 내가 애완동물이야!”

“아니, 야생동물!”

“죽고 싶냐?!”

그때 두 사람을 구경하던 류타니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그 모습을 힐긋거린 이대봉이 류타니에게 다가가서는 일본어로 물었다.

“넌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무슨 대화를 하시는지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아······.”

하긴 아직은 열심히 한국어를 익히고 있다지만, 이렇게 싸우는 말까지 모두 알아듣기엔 부족할 테지.

아무튼 그런 류타니의 반응 때문인지 한창 열을 올리던 두 사람의 싸움이 시들해졌다.

그러자 류타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다.

이대봉은 다시 소파로 와서는 풀썩 주저앉더니, 날 보며 말했다.

“선희 쟤, 시험 끝나서 폭주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데빌 바이러스를 보고 자극을 받았다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그림의 느낌이 확 바뀌다니 말이 돼?”

“지금도 계속 실력이 상승하고 있는 중이고, 그 속도가 워낙 빠르니까.”

“그래도 너무 확 변하니까 무섭잖아. 안 그래도 두 작품이나 연재하면서 이렇게 엄청난 실력으로 다른 작품 기죽이면 되겠니?”

그때 다시 실버가 끼어들었다.

“다른 작품 생각해서 대충 그리라는 게 말이 되냐?”

“······.”

“애도 아니고, 적당히 징징거려라.”

“아, 진짜.”

실버가 맞는 말을 하니 더 짜증나는 모양이다.

아무튼 나도 이번 파시엔시아 데생을 보면서 상당히 놀랐다. 솔직히 그동안 파시엔시아에 집중을 못하는 듯 보이던 선희가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넘사벽의 실력을 보여줬으니까.

한동안 학교 공부 때문에 정말로 집중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데빌 바이러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파시엔시아가 단번에 각성한 덕분에 순위도 많이 올라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화실에선 나 말고는 선희만 알고 있기는 한데, 실은 조만간 파시엔시아도 엔딩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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