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습의 파시엔시아 (1)
“15표 차이라고요?!”
그림을 그리고 있던 이즈미가 코지마의 말을 듣고 버럭 하자 코지마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아, 네.”
“아직 15표나 차이가 난다니, 집계를 잘못 한 거 아니에요?”
“15표 차이면 가시권이라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솔직히 1회 때야······.”
코지마가 말을 하려다 이즈미의 눈치를 보며 멈칫했다.
1회 때의 묘한 상황과는 다르다는 말을 하려했지만,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코지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즈미는 그림 그리던 작업을 멈춘 채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쉬더니 다시 시선을 거두며 작업을 계속했다.
“뭐, 됐어요. 나도 최선을 다한 건 아니니까.”
“······아, 네.”
“뭐죠? 그 반응은?”
이즈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자 코지마가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닙니다. 원래 제 스타일이 이래서······.”
“그래요?”
“네.”
코지마가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대답하자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이즈미가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저번 건 단번에 그려낸 그림이라, 아무래도 이래저래 허술하긴 했었어요.”
“허술······ 하지는 않았는데요. 그만하면 굉장한 그림이라도 편집부에서 난리였으니까요.”
그제야 조금은 만족한 표정이 된 이즈미가 입 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거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다른 만화에 비교한다면 더없이 완벽한 만화니까.”
오버하는 이즈미였지만 코지마는 수긍한다는 듯 대답했다.
“아, 그, 그렇습니다.”
“다만 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
코지마가 이즈미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
괜히 쓸데없이 말을 하다보면 그게 또 빌미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즈미가 이야기를 돌렸다.
“얼마 전에 넘겨줬던 3화는 어땠어요?”
“아, 그거요. 굉장했습니다. 엄청 그림도 괜찮고, 이야기도 재밌었고요. 편집부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습니다.”
그 말에 이즈미가 턱을 살짝 세웠다.
“당연하죠. 3화는 2화보다 더 공을 들였으니까. 이번엔 반드시 1위가 될 거예요. 안 그래요?”
“굉장히 재미있고, 그림도 훌륭하긴 했습니다만, 제 생각엔······.”
“왜요?”
“역시 써니 선생님의 팬 층이 워낙 견고하기도 하고, 또 이번에 그린······.”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당연히 나랑은 라이벌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번 3화는 다르잖아요. 봤으면 알겠지만.”
“······.”
그 반응이 마음에 안 드는지 이즈미가 살짝 인상을 썼지만 곧 표정을 풀었다.
“뭐, 당신에게 평가를 바라는 건 아니니까.”
그 말에 코지마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무튼 이번 화는 많은 것을 쏟아 부었으니, 제 아무리 써니 선생님이라도 이 번 만큼은 순위를 지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도도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데 여전히 코지마가 똥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이즈미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표정이 또 왜 그래요?”
“아, 아닙니다. 제가 원래 표정이 이래서.”
“좋지 않은 습관이네요. 병원이라도 가보는 게 좋지 않아요?”
표정 때문에 병원가라는 소리는 처음 들었지만, 그렇다고 티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코지마가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무튼, 다음부터 내가 부르지 않으면 이렇게 찾아오지 말아요. 원고는 구로다가 직접 가져다 줄 테니까. 물론 식자작업도 이쪽에서 다 할 테니. 그쪽은 그냥 원고나 잘 관리하면 되니까. 알겠죠?”
“하, 하지만 그래도 제가 편집자인데······.”
“······.”
이즈미의 굳은 표정을 본 코지마가 다시 머리를 푹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연락하시면 그때 찾아오겠습니다.”
이곳에 와서 도대체 머리를 몇 번이나 숙였는지 기억도 안날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이즈미는 코지마에게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때 이즈미가 노인을 불렀다.
“구로다.”
“네, 아가씨.”
“코지로 씨 가신다고 하네요.”
“저기, 제 이름은 코지마입니다만.”
하지만 그런 코지마의 말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어쨌건 수고했어요. 그럼 어서 가보도록 하세요.”
“아, 네······.”
노인이 코지마에게 다가갔다.
“제가 문 앞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 코지마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곧 노인을 따라 갔다.
그러다가 코지마가 ‘아차’ 하며 말하더니 돌아서서는 그녀가 작업 중이던 테이블에 종이봉투를 내려놓았다.
“이걸 잊어버릴 뻔 했습니다.”
그러자 이즈미가 테이블에 놓인 봉투를 보며 물었다.
“이게 뭐죠?”
“제가 온 다른 이유가 이거였는데, 깜빡해서요. 모레 나올 소년 히어로입니다. 이것은 제가 직접······, 아니 연락을 드릴 테니까,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그 말에 이즈미가 별로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외면한 채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가보도록 하세요.”
“······네. 그럼.”
코지마가 그렇게 말하며 인사를 하고는 기다리고 있던 노인을 따라 갔다.
그 모습을 힐끔 보던 이즈미가 다시 우아한 동작으로 원고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종이봉투를 슬쩍 보았다. 다시 외면하려던 그녀가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봉투를 들어 입구를 열어 책자를 꺼냈다.
표지는 진심의 남자다.
마초스러운 남자주인공의 기행인 만화로 자신의 취향과는 백만 년쯤은 떨어져있는 만화다.
서둘러 표지를 외면하고는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자신이 관심 있는 건 하나다.
당연히 1위를 지키고 있는 머신건 잭.
오로지 이 만화 때문에 자신이 사력을 다해 그리고 있으니까.
그런데 첫 편 권두컬러 만화는 파시엔시아였다.
이것도 써니의 작품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축구만화라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슬쩍 넘기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그림의 퀄리티가 눈에 밟힌다. 그리고 연출도.
첫 장면에서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자가 사람들을 가로지르며 전력질주를 하고 있다.
무슨 상황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축구 팬들의 모습, 그리고 벤치에 앉아있는 동료들이 교차되며 보인다.
대사도 거의 없다.
주변의 환호소리도 주인공의 입장에선 흐린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오로지 그의 눈에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상대 선수들, 그리고 골대만 보일 뿐이다.
그때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근육질의 흑인선수가 그를 가로막으며 달려든다.
마치 너는 절대 나를 뚫고 갈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뽐내는 선수.
그가 커다란 장벽처럼 가로막았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은 현란한 발놀림으로 그의 방어를 아슬아슬한 차이로 젖혀버렸다.
그 장면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수비수들이 한꺼번에 달려들고, 골키퍼도 앞으로 튀어나왔다.
어떻게든 슈팅각도를 좁히겠다는 의도라며 뭔가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 중얼거린다.
만화니까 가능한 전개이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주인공의 다리가 빠르게 공을 찬다.
그 순간 만화가 끝이 났다.
절대로 만화가 아니라면 보여줄 수 없는 그야말로 엄청난 연출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축구라곤 관심도 없던 자신이 어떻게 정신을 놓고 볼 정도로 연출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
지금도 방금 봤던 장면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다.
마치 그 경기장내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리고는 잠시 멍하게 있던 그녀가 머신건 잭을 보지도 않고 잡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압도적 연출에 대한 패배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작품에 일격을 당한 기분이라 더 정신이 없었다.
곧이어 자신이 그리던 원고를 돌아봤다.
이번에야 말로 자신이 1위를 차지할 것이라며 칼을 갈던 원고.
하지만, 방금 파시엔시아의 장면에 압도당한 뒤 본 원고는 보잘 것 없어보였다.
이즈미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원고를 집어든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는 돌아보자, 방금 코지마를 배웅 갔던 노인이 돌아와 있었다.
“구로다!”
“네, 아가씨.”
“쓰레기통!”
“네?”
“빨리!”
“아, 네.”
그렇게 대답한 노인이 서둘러 근처에 있던 은색 원통모양의 쓰레기통을 집어 들고는 그녀의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자 이즈미가 원고를 손으로 북북 찢어버리더니 곧장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아,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이걸로는 안돼요. 절대로.”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를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전에 미국에서 만났던 각본가 기억해요?”
그 말에 기억을 더듬던 노인이 머리를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개봉해서 큰 성공을 했다는 액션영화 ‘디스트로이어’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그 사람을 불러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어렵다는 말도 없이 노인은 금방 머리를 숙이며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 *
도쿄의 모대학교의 만화연구회실.
그곳은 곧 있을 12월 코미케 준비로 분주했다.
“이번부터 장소가 바뀐다고 하던데, 도쿄유통센터 맞지?”
“어, 맞아.”
“우리 자리는 미리 확인해봤어?”
“당연하지. 자리는 중앙이라 나쁘지 않아.”
“그런데 300권이면 너무 많지 않을까?”
“뭐가 많아. 여름에 했을 때, 반응이 좋아서 250권이 얼마나 빨리 팔렸는데. 이번에, 특히나 인기 만화인 머신건 잭의 새로운 궁수 히로인 ‘파스’를 주인공으로 그린 만화니까 잘 팔릴 거야.”
그 말에 남자가 능글스럽게 웃었다.
“으흐흐, 맞아. 그거 좀 야하기는 하지만 스토리도 좋더라. 어떻게 머신건 잭을 보면서 그런 스토리를 다 생각했냐?”
“원래 야한 쪽으로는 내 머리가 잘 돌잖아.”
“하긴.”
그렇게 말하며 두 남자가 음흉하게 웃자, 근처에 있던 여자가 인상을 팍 썼다.
“하여튼, 저질들. 좀 건전한 만화를 그리라고!”
“야, 너도 남자끼리 서로 눈 맞은 이상한 만화 그렸잖아!”
“이건 다르지.”
“그게 더 이상하거든.”
그렇게 다투고 있을 때, 철문이 벌컥 열리며 남자가 들어왔다.
“너는 좀 문을 살살 열라니까. 문 완전히 부서지면 네가 책임 질 거야?”
“아, 미안. 습관이 돼서.”
“습관 때문에 연구회 돈 다 거덜 내면 알아서 해!”
“알았어. 그보다 이번 소년 히어로 봤어? 이번 신간 엄청난 게 재밌던데.”
“아, 데빌 바이러스? 그거 2화 넘어가니까 좀 재미나긴 하던데. 이번에도 잘 나왔어?”
“아니, 그게 아니고 써니 말이야, 써니.”
“머신건 잭? 역시 이번화도 엄청 재밌었나 보네.”
“응. 그렇긴 한데. 머신건 잭 말고.”
“머신건 잭이 아냐? 그럼 뭐, 파시엔시아?”
“어. 파시엔시아. 이번화가 정말 엄청나. 대사도 거의 없는데, 그림이 완전 대단했거든. 20페이지를 보는 동안 정신이 쏙 빠져버릴 정도였다니까.”
“뭐? 파시엔시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