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빌 바이러스 (7)
그런 이대봉의 반응에 실버도 궁금했는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대봉이 읽던 소년 히어로를 뺏었다.
화들짝 놀란 이대봉이 짜증을 부렸다.
“야, 보고 있는데, 왜 그래?”
“다 봤으면 넘겨야 할 거 아냐.”
“달랑 데빌 바이러스 하나만 봤어. 다른 건 전혀 못 봤단 말이야.”
“그건 네 녀석 집에 가서 봐.”
“야, 너무하잖아.”
“시끄러.”
그렇게 말하며 실버도 데빌 바이러스를 펼쳤다.
“오빠, 나 줘.”
내 곁에 있던 선희도 내게서 책을 뺏어가듯 가져가서는 데빌 바이러스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장면에서는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다.
평소의 무신경한 눈빛이 아니다.
과연 선희의 눈에도 그림의 퀄리티가 다른 건가?
선희가 그림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싶었는데 자리에 앉은 선희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그리고 있던 데생원고를 전부 들고는 뒤쪽에 있는 박스로 가져가 그곳에 넣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이대봉이 깜짝 놀라 물었다.
“어? 뭐하는 거니?”
선희가 자기 책상에 앉아 새 원고용 종이를 꺼내 펼치며 대답했다.
“다시 그릴거야.”
“뭐? 갑자기 왜?”
“······.”
그냥 대답도 없이 책상에 앉아 새 원고용지를 꺼내더니 연필로 대충 칸을 나누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날 쳐다봤다.
“쟤, 왜 저래?”
그러자 이번엔 잡지를 보던 실버가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자극이라도 받았나보지.”
“자극?”
“은근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네. 데빌 바이러스.”
“엥? 선희가? 왜? 이번에 좀 잘 그리긴 했지만, 우리 선희가 신경 쓸 정도인가?”
“뭐, 이번 2화는 저번 1화보다는 잘 그리긴 했으니까.”
“윤환이 넌 어떻게 생각해?”
이대봉의 물음에 나도 긴가민가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글쎄. 그림에 대해선 나도 선희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어서.”
개인적으로 이즈미의 그림이 대단하긴 하지만, 선희가 자극받을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늘 선희그림만 보다보니, 선희 그림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가끔 잊어버리긴 하지만, 역시 한걸음 물러서서 냉정하게 본다면 선희 정도의 퀄리티 만화는 상당히 드물기는 하다.
아니, 드문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림만 냉정히 따지면 이젠 뭐 달인 급 경지니까.
그러다가 문득 선희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늘 그저그런 만화속에서 독보적인 그림을 뽐내고 있었으니, 이런 수준의 그림이라도 자극이 된 것일지 모른다.
물론, 내가 볼 수 없는 그림의 영역일지는 모르지만.
뭐가 되었건, 안 그래도 예전에 비해 의욕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저렇게라도 신선한 자극이 되어준다면 좋은 거지.
선희가 새로운 데생을 하는 모습을 슬쩍 봤더니, 기존의 작업에 비해 컷을 시원하게 사용하고 있다. 컷만 시원한 게 아니라 손의 움직임도 호쾌하다.
기존의 콘티와는 다른 전개를 하는 것인가 싶었는데, 일단 내용은 그대로다. 연출만 다르게 진행하고 있는 모양이다.
머신건 잭의 업그레이드 된 총을 휘두르는 장면도 마치 액션 영화의 장면처럼 멋지다.
그러니까, 그림의 디테일이 아니라, 연출로 자극을 받았다는 거군.
하긴, 내가 봐도 데빌 바이러스의 연출은 괜찮아 보이긴 했으니.
그나저나 화면 연출이 상당히 매끄럽고, 눈에 잘 들어온다.
또 성장한 모양이다.
얘는 정말.
이젠 그림만큼은 내가 뭐라고 할 수준이 아니다.
그렇게 선희의 작업을 흐뭇한 기분으로 구경하고 있는데, 차미정이 날 불렀다.
“선생님. 전화 받으세요.”
선희에게 정신을 파느라 전화벨 소리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카기 씨?”
“아뇨, 나카야 씨요.”
“나카야 이즈미?”
“네.”
그 아가씨 양반은 못 되겠네.
그나저나 또 뭔 얘기를 하려고.
그보다 전에는 선희만 찾더니, 이번엔 날 왜 찾아?
차미정에게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 어때요?
이즈미가 다짜고짜 물었다.
“뭘요?”
- 신간 받지 않았어요? 오늘이면 도착한다고 들었는데.
“소년 히어로라면 받았습니다.”
- 그런데, 왜 사람 헷갈리게 해요. 받았으면서.
“······.”
- 이번 2화는 어때요?
“괜찮더군요. 퀄리티도 괜찮고, 연출도 괜찮고.”
- 그냥 괜찮은 수준이라고요?
“뭐가 더 필요한 겁니까?”
-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아요?
“제 표현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난 좋다는 표현을 한 것 같은데.”
- 아······.
그렇게 묘한 소리를 내더니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다시 이즈미가 입을 열었다.
- 모든 것을 다 쏟아 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꽤 신경을 썼단 말이에요.
“그렇군요.”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아지미의 음성이 더 앙칼지다.
- 아, 정말. 그럼, 써니 선생님은 뭐래요?
“아무 말도 없었는데요.”
- 아, 아무 말도요?
“네. 그냥······.”
- 그냥 뭐요?
데생 원고를 다시 작업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런 세세한 얘기를 해줄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니까.
“아뇨, 그냥 별 말 없던데요.”
- ······정말인가요?
“네.”
별 말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니까.
나도 솔직히 이번 2화를 보고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이런 거만한 여자에게 그런 내 생각을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 알겠어요.
그렇게 말하더니 이번에도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진짜, 완전 자기 멋대로 구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전화기를 놓았다.
그러자 이대봉이 낄낄거렸다.
“와, 전에 들었던 말 대로네. 완전 안하무인인가보다. 역시 재벌집 외동딸이라는 건가?”
“재벌집 외동딸이라고 다 그렇지는 않겠지.”
“그야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계속 웃는다.
“형은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그래?”
“재밌잖아. 아무것도 무서울 것 없는 그런 안하무인의 천방지축 말괄량이가 너희들에게 그렇게 집착한다는 게. 거기다가 실력도 상당하고.”
“천방지축에 말괄량이라고 하기엔 애매한데.”
“뭐가되었건, 그런 여자와 얽혀있으니까 재밌잖아.”
“이쪽은 별로 재밌지 않소만.”
“아 참, 그리고 이번에 2화 원고도 다시 그렸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어?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어디서긴, 담당에게 들었지. 아무튼, 저쪽은 이번에 제대로 칼을 갈았다는 거잖아. 너희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라이벌로 여긴다는 거고.”
그렇게 말하더니 작업 중인 선희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선희를 보며 실실 웃으며 말했다.
“선희,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뭘?”
“데빌 바이러스 만화를 그린 아가씨 말이야. 네겐 어떤 존재야? 라이벌?”
“라이벌?”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음······.”
그런 반응에 이대봉이 손을 휘적거렸다.
“됐다, 됐어. 말 안 해도 돼. 너 반응 보니까 그 정도는 아니구만.”
그러더니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날 보며 묘한 표정을 웃었다.
“뭔가 더 재밌어 지는데?”
“뭐가?”
“흐흐흐.”
그렇게 입을 가리며 눈을 초승달로 만들어 웃고 있다.
“천재소녀와 그것을 시기하는 새로운 재벌 천재소녀의 갈등. 뭔가 재밌잖아. 순정만화에도 많이 나오는 소재고. 여기서 선희가 고생 진탕하고, 눈물도 펑펑 흘리는 역할을 한다면 딱 인데.”
그렇게 말하며 뭐가 좋은지 혼자 낄낄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던 실버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쯧쯧, 미친 놈.”
“뭐!”
* * *
“아으, 짜증나!”
이즈미가 침대에서 누운 채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노인이 서둘러 다가오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이 안정을 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제발 마음을 진정 시키세요.”
그렇게 말하더니 한쪽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곳에 있는 턴테이블에 레코드판을 얹고는 헤드셀을 판위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약간의 잡음과 함께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추천하신 클래식입니다.”
“구로다.”
“네, 아가씨.”
“그런 거 말고, 좀 신나는 거 없어요?”
“네?”
“그런 칙칙한 음악 말구요. 요즘 유행하는 유로댄스, 뭐 그런 거 없냐구요.”
“하지만, 아가씨.”
“난 괜찮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팔에 꽂힌 링거 바늘을 바라본다.
“이딴 거 필요 없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바늘을 뽑으려 하자 노인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안됩니다, 아가씨.”
그 말에 이즈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러 길래, 엄마는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아가씨를 걱정하셔서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아가씨는 누구에게도 지는 걸 싫어하시니까.”
“그래도 그건 내 얼굴에 먹칠하는 거잖아. 안 그래요?”
“······.”
“이 번만큼은 제 힘으로 반드시 1위를 해내겠어요. 반드시요.”
“네, 아가씨라면 반드시 하실 수 있을 실겁니다.”
“구로다.”
“네. 아가씨.”
“음악 좀 바꿔 달라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노인이 서둘러 음악 레코드판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 * *
데빌 바이러스 2화는 독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1화의 그림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퀄리티의 그림도 그렇지만, 스토리와 연출이 주는 충격은 더 컸다.
그것은 곧바로 독자엽서에서도 반응이 왔다.
앙케이트엔 머신건 잭과 함께 데빌 바이러스가 선호만화로 선택된 엽서가 가장 많았을 정도였다.
당연히 소년 히어로 편집부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소란스러울 정도였다.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던데? 아름다운 거대 소녀의 등장이라니.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감도 안 잡혀.”
“저도요. 뭔가 폭주하는 듯한 기분도 들고. 하지만, 스토리의 진행도 빠르고 이야기의 흡입력도 상당해서 20페이지를 단번에 다 읽어버렸어요. 뒤가 너무 궁금해요.”
“나도 그래. 정말 저번 2위는 좀 이상한 감이 있었는데, 이번엔 정말로 머신건 잭이 위험할 지도 모르겠어.”
“에이, 그건 아니죠. 2화가 확실히 좋아진 것 맞지만 상대가 머신건 잭이면 좀.”
“맞아. 아직 머신건 잭에게 비빌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그나저나 이정도면 진짜 2위 자리는 확실한 거 아니에요? 진심의 남자는 완전히 밀리는 것 같은데.”
“그러게. 키도 선생님이 또 이것 때문에 다시 어시들을 괴롭히는 거 아닌지 몰라.”
“안 그래도 키도 선생님 쪽에서 사람 필요하다는 연락이와도 가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전에도 한명 소개해 줬다가 며칠 동안 작업 한 뒤에 다시는 키도 선생님 화실은 안가겠다고 난리쳤다니까요.”
“어째, 테고시 씨가 불쌍해지네.”
“그러게요.”
다음날.
드디어 앙케이트 결과가 나왔다.
결과용지를 확인한 코지마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만세!”
그 반응을 확인한 테고시도 용지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키도의 진심의 남자는 이번에도 4위였던 것이다.
에스퍼 존에게까지 밀려 4위로 밀려났으니 키도 선생이 얼마나 펄쩍 뛸지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할 정도였다.
그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고는 곧장 1위와 2위를 확인했다.
표차는 15표.
1위는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대로 머신건 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