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빌 바이러스 (4)
그 말에 멈칫하던 테고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뭐, 굳이 따지자면요.”
그 말에 키도가 테고시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테고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왜, 왜요?”
“한심해서 그러지.”
“네? 누가요?”
“편집부 직원들 말이야.”
“어, 어째서요?”
“그렇잖아. 모여서 앙케이트 엽서 몇 장 뒤적거리고는 그딴 결론을 내고 있으니까.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연재를 하는 사람들에게 순위는 중요할 수도 있지. 하지만 양심을 버릴 정도냐면 그건 또 아니거든. 거기다 그런 짓으로 순위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나.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멍청한 짓은 안 해.”
키도의 말에 테고시가 수긍했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긴 한데요.”
그때였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충분히 근거 있는 의심이니까.”
“······?”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니시다였다.
그를 확인한 테고시가 인사를 했다.
키도도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어? 자네는 언제 온 거야?”
“니시다 선생님 오셨······. 어머, 제가 한발 늦었네요. 그럼 전 차를 준비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뒤늦게 따라 들어온 키도 부인이 호호하며 웃더니 다시 몸을 돌려 총총걸음으로 화실을 빠져 나갔다.
하지만 그런 키도부인의 모습과는 달리 니시다의 말로 화실 내부는 얼어붙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키도가 니시다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근거 있는 의심이라니. 무슨 소리야.”
“저도 제 담당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도 단번에 2위까지 올라갈 만한 작품은 아니거든요.”
키도의 질문에 니시다가 화실의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근거라는 게 그거야?”
“그건 제 의심이고요.”
“그럼 근거는?”
“그 아가씨······. 그보다 편집자님, 자리 좀 비켜주겠습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한 테고시가 곧장 키도의 원고를 서둘러 챙겼다. 그리고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저는 편집부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어시들에게도 인사를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화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니시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가씨 집안이 엄청난 재벌가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키도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들었다. 하지만 집이 부자인 게 무슨 문제지?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상당히 부자잖아.”
그러자 니시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렸다.
“규모가 다르죠, 규모가. 우리는 그냥 부자고, 그쪽은 재벌이라니까요, 재벌.”
“은근히 기분 나쁜 투로 말하는군.”
“전혀 레벨이 다른 걸 같다고 하니까 그러는 거죠.”
“별로 다를 것도 없구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만한 규모의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집안이라는 얘기입니다.”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잖아. 그깟 1위가 뭐라고.”
“그깟 1위에 목숨 거는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크음.”
그때 키도 부인이 들어오더니 니시다가 앉은 소파 앞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뭘요.”
웃으며 말한 키도부인이 다시 화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다시 니시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분명한 건 누군가 대량으로 책을 구매했다는 거죠. 제 담당도 도쿄시내의 유명한 서점 몇 곳에서 비슷한 사람들이 몰려와 마치 수거하듯 구입해 갔다고 하더군요. 그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한 건 맞는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그 여자가 재벌집이고,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고 그런 식으로 몰고 가도 되는 건 아니지.”
“너무 순진하시네요. 세상을 너무 좋게만 바라보시는 거 아닙니까?”
“내가 순진한 게 아니라, 자네가 너무 삐딱한 거지.”
“아니죠, 전 현실적인 거고요.”
“현실적?”
“맞잖아요.”
“아니, 그건 부정적인 거지.”
“아니라니까요. 키도 선생님이 비현실적인거지.”
“뭐라는 거야?”
두 사람이 다투기 시작하자 어시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또 시작이시네.”
“그러게.”
“말려야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놔 둬. 저러다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할 테니까.”
“그렇긴 하죠.”
그렇게 말하며 서로 웃었다.
그렇게 화실이 소란스러울 때 문이 열리더니 키도부인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손님이 또 오셨답니다.”
그녀의 말에 한참 니시다와 말싸움을 하던 키도가 돌아보며 물었다.
“응? 또? 누구?”
“아주 젊고 옷도 잘 입은 미인이세요.”
“미인?”
키도가 머리를 갸웃거리는데, 그때 화실 안으로 화사한 분홍색의 원피스에 밍크코트를 걸친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옅은 갈색의 머리와 하얀 피부가 눈에 띄는 미녀였다.
그 때문에 화실에 있던 어시들까지 작업을 멈추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넋 놓고 여자를 쳐다볼 정도였다.
여자가 도도한 걸음으로 들어와서는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화실이 좁고 갑갑하네요. 이런 곳에서 일하는 건 쉽지 않겠어요.”
어이없는 말을 중얼거리자 키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누구 길래 자신의 화실에서 저딴 소리를 지껄이나 하는 그런 표정.
니시다 역시도 그런 그녀를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그때 화실 곳곳을 둘러보던 여자가 키도에게 다가와서는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키도 선생님이시죠?”
“그렇소. 내가 키도 죠타로요. 그런데 그쪽은 누구요?”
“저는 나카야 이즈미라고 해요.”
순간 키도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나카야 이즈미?”
그러다가 곧 눈을 커다랗게 떴다. 놀라기는 니시다도 마찬가지.
곧 키도가 여자에게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카야 라면, 혹시 데빌 바이러스의······.”
“네. 맞아요. 제가 그린 만화죠.”
그렇게 말하더니 뒤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구로다.”
“네, 아가씨.”
화실 밖에 있던 정장차림의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밍크코트를 벗어서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노인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녀가 주변을 돌아보던 이즈미가 소파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는 천천히 앉았다. 맞은편에 서 있던 니시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키도를 돌아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러자 키도는 그저 어깨를 으쓱 할 뿐이었다.
그때 소파에 앉은 이즈미가 자신이 앉아있는 소파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손바닥으로 표면을 쓸었다. 그러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소파의 가죽이 싸구려네요. 표면이 거칠거칠해서 느낌도 별로고······. 제가 좋은 걸로 보내드릴까요?”
이즈미의 느닷없는 말에 키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이태리에서 수입한 건데, 꽤 감촉도 상당히 좋거든요. 제가 서둘러 오느라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그걸로 드리면 어떨까요?”
“누가 그따위······, 앗.”
키도가 순간 움찔하더니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키도부인이 웃으며 바로 대답했다.
“어머, 그럴 필요 없는데, 하지만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네요. 고맙게 받을게요.”
그렇게 대답하자 이즈미가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더니 다시 노인에게 말했다.
“구로다.”
“네. 아가씨.”
“내일 사람들을 시켜 이곳으로 그 소파를 보내주도록 해요. 어제 구입한 그 소파.”
“알겠습니다, 아가씨.”
노인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자 키도부인의 미소가 더 밝아졌다.
“고마워요. 아 참, 차를 가져다 드릴까요?”
“홍차 있어요?”
“네, 물론이죠.”
“그럼 그걸로 부탁드릴게요.”
“네에,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화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녀를 슬쩍 돌아보던 키도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이즈미를 보며 말했다.
“이즈미 선생.”
“네?”
“나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도 아닌데······.”
“여긴 왜 왔냐고요?”
그러자 키도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뭐, 같은 출판사니까 앞으로 친해지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여기에 온 이유는······. 그나저나 앞에 계신 분은 누구?”
“니시다 유킵니다. 에스퍼 존을 그리고 있죠.”
“어스퍼······ 존?”
잠시 갸웃거리던 이즈미가 뭔가 떠오른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 그 초능력 만화 말이죠?”
“······그렇습니다.”
“흐음. 두 분이 친한 관계셨군요.”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친하다니 어이없군.”
“말도 안 됩니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눈을 크게 떴던 이즈미가 곧 머리를 끄덕였다.
“뭐,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지만요. 그런데 제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만 거죠?”
“여기에 온 이유.”
“아 참,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듣기론, 써니 선생님이랑 가장 친하신 선생님이라고 들어서요. 맞나요?”
“그렇소. 써니와는 친하지. 의남매라고 해도 될 만큼.”
“도원결의 같은 건가요?”
“뭐, 비슷하지.”
“멋있네요.”
“그런데 그건 왜 묻지?”
어느 순간 키도가 반말로 변해버렸지만, 이즈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써니 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어떤 사람인가 하고.”
“어떤 사람인걸 알아서 뭐 하려고?”
“천재잖아요. 그리고 나이도 어리고. 그런데 전에 전화를 걸었더니, 몹시 무례하더라고요. 알려진 거랑 너무 다른 이미지라.”
“알려진 게 어떤데?”
“뭐, 천재라거나, 혹은 말수가 적다라든가, 성격이 좋다라거나 뭐, 등등이죠.”
“맞는 말 같은데? 어디가 다른 이미지라는 거지?”
“얼마 전에 전화를 걸었는데, 무시를 당했거든요.”
“무시? 써니에게?”
“그래요.”
“뭐라고 했는데?”
“내가 이길 거라고 했더니, 냉정하게 그러라고 하더라니까요.”
이즈미의 대답에 곧 키도가 멈칫하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이즈미가 인상을 썼다.
“왜 웃죠? 뭐가 이상한가요?”
“아니, 이상하지 않아.”
“그럼 뭐죠?”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싶어서.”
“······네?”
“원래 그런 아이거든. 써니는.”
“원래 그렇다고요?”
“그래. 맞아. 원래 그래. 써니는. 늘 그렇게 단답형으로 대답을 하지. 그래서 처음만난 사람은 오해를 하기도 할 거야.”
“······.”
“이제 오해가 좀 풀렸나?”
“······그 문제는 제가 오해했다고 치죠.”
“치는 게 아니라 오해야.”
“뭐가 됐건, 전 반드시 1위를 빼앗고 말거예요.”
“그런 얘기면 직접 만나서 하면 되지 않나?”
“······그런 말을 하려고 한국까지 직접 찾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키도가 웃자 이즈미가 인상을 썼다.
“왜 자꾸 웃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크음 아무것도 아니야.”
귀엽다고 말하려다가 스스로를 진정시킨 것이다. 다큰 처녀에게 하기엔 좀 예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그때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만 보던 니시다가 이즈미를 향해 물었다.
“제가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 말에 이즈미의 시선이 니시다에게 돌아갔다.
“뭐죠?”
“1위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사람들을 동원해 책을 사들인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