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빌 바이러스 (1)
“윤환!”
이대봉이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그리고 곧 실버도 모습을 드러내더니 내게 손을 흔들었다.
분위기를 보니 오다가 만난모양이다.
“아직 안 끝났지?”
이대봉이 물음에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어.”
오늘은 11월 20일 1987학년도 학력고사 시험이 있는 날로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쌍둥이들이 시험을 치르고 있는 고등학교 대문 앞이었다.
누나도 오늘 대입시험을 치르고 있는데, 다른 학교라 그곳엔 엄마가 가 있다.
아마 박상식도 그쪽에 갔을 거라 생각은 되는데.
아무튼 주변엔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어 시끌시끌하다.
실버는 도착하자마자 인근에 슈퍼 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이대봉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어디가?”
“아침, 안 먹었어.”
“뭐? 조금 있다가 같이 점심 먹으면 되니까, 좀 참아.”
“배고파.”
그렇게 말하고는 슈퍼로 들어가더니 호빵 한 개를 사서는 입구에서 먹는다. 그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면 조금 있다가 오던가. 쟤는 정말 눈치가 없어.”
그렇게 말하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 대입시험 치는 날은 춥다니까. 흐흐. 그나저나 사람들 정말 많네.”
이대봉이 호들갑을 떨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런데, 그 녀석은?”
“누구? 류타니?”
“응. 안 왔어?”
“안 오긴, 아침부터 저러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대문 쪽으로 턱짓했다. 그러자 이대봉 시선이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문 앞에 있는 류타니를 보고는 이대봉이 깜짝 놀랐다.
“어? 쟤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긴, 기도중이지.”
“기도?”
“어. 다른 아줌마들처럼 대문에 엿까지 붙이고, 저러고 있어.”
대문 앞에서 합장한 채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결연해보일 정도다.
나이 어린 녀석이 저러고 있으니 주변에서도 꽤나 사람들이 힐긋거린다.
하긴, 대부분 중년 이상의 아줌마나 할머니들 사이에 있으니 눈에 띄기는 한다.
“와, 쟤 정말 정성이다, 진짜.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어?”
“아침에 쌍둥이들을 따라 나갔었으니 그때부터 저러고 있었겠지.”
“정말?”
“어.”
“저 앞에 붙은 엿도 쟤가 붙인 거야?”
“맞아. 주변에 있던 아줌마들한테 배운 모양이야.”
“허.”
그때 실버가 입을 우물거리며 다가왔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쟤 좀 봐, 쟤.”
“누구? 류타니?”
“어. 저 녀석 대문에 엿까지 붙이고 아침부터 저러고 있었대.”
“그래?”
하지만 실버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넌 안 신기해?”
“뭐가 신기해. 평소 저 녀석 생각하면 당연한 거지.”
그 말에 이대봉도 수긍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저 녀석이야 쌍둥이들한테는 지극정성이니까. 특히 선희한테는.”
“요즘엔 경희한테도 마찬가지야.”
내 말에 이대봉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쌍둥이들이라 똑같이 대하는 건가?”
“그건 나도 모르지.”
“그나저나 일본에서 온 선물은 엄청 대단했어.”
이대봉의 말에 갑자기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에 일본에서 엄청난 양의 소포가 배달되었는데, 찹쌀떡이랑 합격기원 부적이었다.
시험을 잘 치르라는 기원에서 보낸 모양이지만, 찹쌀떡의 양이 너무 엄청나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어시들에게 나눠줬지만.
부적들은 애들 방 벽에 걸어뒀는데 어찌나 많았는지 한쪽 벽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역시 써니 선생의 인기는 대단하다니까.”
이대봉이 웃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학교 건물 안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마친 모양이다. 야, 류타니! 시험 끝났어!”
이대봉의 말에 한창 합장 중이던 류타니가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머리를 기웃거린다.
잠시 후 철 대문이 열리고 애들이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아이들이 나오는 사이 경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 시험 끝났어!”
“······.”
경희가 웃는 얼굴로 선희의 손을 잡은 채 문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시험은 잘 치른 모양이다.
* * *
키도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 시험을 잘 쳤고?
“어. 덕분에.”
- 아무튼 고생했다고 전해줘.
“알았어.”
- 혹시 니시다도 전화하든?
“아까 전화 왔었어.”
내 말에 키도가 웃었다.
- 하하 그녀석이라면 당연히 그랬겠지. 그런데 혹시 너 들었어?
“뭘?”
- 여대생 천재 만화가.
“여대생 천재 만화가?”
- 몰랐나보네. 소년매거진에서 연재를 끝내고 이번에 소년 히어로에서 연재를 시작할 모양이던데.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
내 기억에도 그런 만화가가 있었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우리가 활동하면서 원래의 역사와 조금씩 달라진 덕분에 등장하지 않았던 만화가들이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모양이지.
실제로 최근 들어 다른 잡지사 연재되는 만화들 중에 모르는 만화가 제법 보이는 것 같기는 하던데.
- 전에 소년매거진에 연재하던 만화 중에 ‘사막의 창’이라는 게 있었잖아.
그 순간 떠올랐다.
사막의 창.
이 만화도 내 기억엔 없었던 새로운 인기 만화였다. 기괴한 건물이나 배경을 잘 그리고 인물의 묘사도 굉장히 독특해서 꽤나 기억에 남는 만화긴 했는데.
물론 펜선이 약간 지저분하긴 했지만.
- 그거 그리던 앤데, 한참 인기 연재 중일 때 ‘써니의 그림은 복잡하긴 해도 창의성이부족하다’라고 했다던데.
“뭐?”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보다 싸가지 없는 녀석이네.
창의성이 부족하다니.
만난 적은 없지만,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런 애가 소년 히어로에서 연재를 하건 말건 상관있나?”
기분이 상해서 그렇게 말했더니 키도가 웃었다.
- 하하, 그야 그렇지. 그런데 걔가 왜 소년 히어로를 선택했는지 아냐?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 써니 때문이라더라.
“나 참, 창의성이 어쩌고 하더니, 왜?”
- 걔, 처음이래.
“처음이라니. 뭐가?”
- 다른 만화가에 대해 이야기 한 거.
“그런데?”
- 그러니까 걔는 애초에 다른 만화가는 아예 신경도 안 쓴다고 하더라.
“······.”
그러니까, 선희는 엄청 신경이 쓰여서 그렇게 말했다는 거군.
뭔가 애 같은 느낌인데.
거만하기도 하고.
- 걔가 아무래도 써니에게 라이벌의식이 있나봐.
“라이벌?”
- 그래. 혹시 걔 그림 봤어?
“봤지. 나쁘지는 않지만, 선희에게 비하기는 좀 부족해 보이던데. 물론 조금 독특하긴 했지만.”
- 그거, 연필데생 없이 단번에 펜으로 그린거야.
“뭐? 데생 없이?”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솔직히 펜선만 놓고 보면 조금 지저분해서 데생력은 제법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아예 연필데생마저 건너뛰고 그렸다니.
그렇다면 얘기는 완전히 다르다.
- 그래. 그래서 걜 천재라고 부르지. 어지간한 만화가는 흉내도 못 낼 수준이거든.
키도의 말이 맞다.
데생이 빠진 채로 그림을 그리면 그림은 상당히 이상해진다.
기본 데생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펜으로 단번에 완성하면 대칭문제라든가, 약간의 실수 때문에 그림을 망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선희도 데생 없이 가끔 볼펜이나 펜으로 그림을 그리긴 하지만, 그런 것들을 만화원고에 바로 넣을 수준은 아니다.
- 어쨌건 걔가 이번에 소년 히어로에서 연재를 시작한다는 소문이 퍼진 덕분에 벌써부터 소년 히어로의 순위싸움에 팬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더라. 물론 그런 건방진 녀석에서 순위가 밀릴 생각은 없지만.
“나도 그래.”
- 좋아. 그래야지. 널 밀어내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누가 비켜준데?”
- 흐흐, 두고 보자고.
“그러시던가.”
그렇게 서로 으르렁대다가 간단한 잡담을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여대생 천재? 라이벌?”
전화기를 끊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실버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사막의 창을 그린 만화가래.”
그 말에 작업 중이던 선희가 머리를 번쩍 들어올렸다.
시험이 끝나서 인지 학교도 일찍 마치는 덕분에 요즘엔 낮에도 같이 작업 중이다.
조만간 점수가 나오면 다시 학교를 지원해야 하는 일 때문에 바쁠 테지만,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물론 경희는 대충 점수를 파악하고 있는데, 요즘엔 어딜 지원할까 늘 고민 중인 모양이지만.
아무튼 사막의 창이라는 만화에 대해 선희도 알고 있는 것일까?
“사막의 창이라면 소년매거진에 연재했던 만화 아니야?”
실버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맞아.”
“걔가 선희를 라이벌로 여긴데?”
“그렇다고 하나봐.”
“라이벌이라기엔 부족한 것 같던데.”
그런 실버의 말에 선희가 끼어들었다.
“그거, 펜으로 단번에 그린 만화야.”
선희의 말에 실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펜으로 단번에 그려? 그럼 연필로 데생도 안한다는 거냐?”
“응.”
“설마.”
이번에는 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선희 말이 맞아. 연필 데생 없이 단번에 펜으로 그린데.”
“······진짜?”
실버도 정말 놀랐는지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나저나 나도 다른 것 때문에 놀라고 있었다.
“넌 데생 없이 그린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러니까······.”
에이 관두자.
어차피 그림 쪽에선 내 상식을 벗어난 애니까.
그런데 그때 다시 전화기가 울렸다.
성준희가 전화를 받더니 날 쳐다보며 말했다.
“윤환아, 아카기 씨.”
“알았어.”
성준희에게 전화를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 저기 선생님······. (전화기 줘보세요.)
그런데 그때 지로 근처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누구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금방 여자의 음성으로 바뀌었다.
- 텐겐 선생님?
“네. 누구시죠?”
- 전 나카야 이즈미라고 하는데요.
나카야 이즈미?
그게 누구지?
내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잠시 뜸을 들이자 전화기 너머에서 화가 난 음성이 들려온다.
- 나카야 이즈미라고요.
“그게 누군데요?”
- 누구······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요? 아니면 모른 척 하시는 거예요?
뭐라는 거야?
내가 왜 알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모르겠는데. 혹시 저를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여자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 아니, 제가 왜 착각을 해요?
“······?”
- 저, 이번에 소년 히어로에서 연재를 시작했어요. 전에 소년매거진에서 ‘사막의 창’을 연재했고요.
뭐야?
아까 키도가 얘기했던 천재 여대생만화가라던 걔야?
“그런데 저에게 무슨 일이신지.”
- 써니 선생도 거기 있어요?
“왜 그러시죠?”
- 전화 바꿔주실 수 있어요?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지? 천재고 나발이고 인성이 글러 먹었구만.
그때 전화기 소리를 들었는지 선희가 다가와 있었다.
“내가 받을게.”
“······.”
선희가 손을 뻗자 그것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선희가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네.”
- ······!
“······.”
- ······!
“네. 알겠어요.”
그렇게 말하더니 전화기를 끊는다.
뭐야? 벌써 통화가 끝난 거야?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장 선희에게 물었다.
“뭐래?”
내 물음에 선희가 짧게 대답했다.
“이길 거래.”
“뭐?”
“연재 시작하면 앙케이트에서 이길 거래.”
그렇게 말하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걔 진짜 뭐야?
중2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