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라 멀티버스 (8)
아니, 그보다 밤새 생각했다고?
“밤에 어디 있었는데?”
내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던 류타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울역에서요.”
“서울역······.”
서울역이라는 호텔이 있는 건 아닐 테고.
노숙자들 사이에 끼어 하루를 보냈다는 건가?
화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런 류타니를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그때 실버와 투닥거리던 이대봉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류타니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멀끔하게 잘 생긴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자 류타니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런 류타니를 보며 이대봉이 실실 웃었다.
“네가 류타니구나. 반가워.”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자 류타니가 얼떨결에 이대봉의 손을 맞잡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류타니 에이지입니다.”
그 손을 잡은 이대봉이 힘차게 아래위로 흔들었다.
“응, 그래. 난 제임스야.”
그 말에 멈칫하던 류타니가 깜짝 놀랐다.
“혹시, 중원요리왕의 그······.”
“맞아. 그거 내가 스토리 쓰고 있어.”
이대봉의 대답에 류타니가 머리를 다시 숙였다.
“안녕하세요. 제임스 선생님.”
“아이구, 인사성도 좋아. 이렇게 착한 애를 저 멍청이가 그렇게 구박했다니, 내가 대신 사과할게.”
그 말에 실버가 투덜거렸다.
“네가 왜 사과를 해?”
“멍청한 친구를 뒀으니, 응당 그래야지.”
“어이가 없구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실버를 잠시 째려본 이대봉이 다시 웃음을 지으며 류타니와 날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뭐, 마실 거 준비할까? 류타니는 오렌지주스 괜찮지?”
“네.”
“윤환이는······.”
“난 됐어.”
“알았어. 그럼 내가······.”
“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제가 가져 올게요.”
차미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이대봉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소파에 털썩 앉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고마워, 미정아.”
그때 박소미가 다가오더니 혀를 쯧쯧 하며 찬고는 그런 이대봉의 팔을 이끌었다.
“어? 왜?”
“오빠는 이쪽으로 와. 괜히 거기 앉아있지 말고.”
“내가 왜? 나도 이야기 하고 싶은데.”
“오빠.”
“알았으니까 그렇게 째려보지 마라. 무섭잖아.”
그렇게 말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끌려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류타니에게 말했다.
“앉아. 그렇게 계속 서 있지 말고.”
“아, 네.”
류타니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어제 일 때문인지 실버 쪽을 의식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실버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원고 작업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류타니가 실버에게서 눈을 떼고 날 돌아봤다. 그리고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네. 물론, 선생님이 받아주셔야 하겠지만요.”
“하지만, 네가 여기서 할 일은 별로 없어. 너 그림도 잘 못 그린다며?”
“열심히 할게요. 선생님이나 다른 분들의 심부름이든, 청소든, 아무 거나요. 돈은 안 주셔도 돼요. 밥만 먹여주세요. 그럼 소처럼 일할게요.”
“소처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려 했다.
진짜 소처럼 시키면 어쩌려고 이렇게 함부로 말하는 건지.
마치 본인이 노예가 되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그때 부엌에 갔던 박소미가 다가와 류타니 앞에 오렌지주스가 담긴 컵은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류타니의 인사를 받은 박소미가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내가 입을 열었다.
“너는 그렇다 치고, 부모님은 뭐라셔?”
“아버지는 제가 인생을 결정할 나이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엄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제 결정에 따라 주실 거예요.”
“어머니께서 허락을 안 해주셨구나.”
“아직은요. 하지만, 아마 엄마도······.”
“그럼 허락받아.”
“네?”
“허락을 받으라고. 두 분 다 허락하시면 그때 찾아와. 그럼 받아줄게. 물론 네가 해야 할 일은 화실 청소 같은 잡일이 대부분일거지만.”
그 말에 류타니가 놀란 표정인 채로 굳어버렸다.
너무 쉽게 결정이 난 탓인지 놀란 모양이다.
“······.”
“왜, 힘들어?”
“그게 아니라······.”
류타니가 입을 앙다물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뇨. 반드시 허락을 받을게요. 꼭요.”
* * *
최종 월간지로 결정이 난 삼사라월드 창간호가 전국서점으로 뿌려졌다.
물론 전국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큰 서점을 중심으로만 뿌려졌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마이너한 잡지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덕분에 첫 발행 양은 3만부 정도로 결정했다.
사실, 3만부도 너무 많다는 의견이 많았다.
대부분, 2만부 안쪽의 판매를 보일 거라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3만부가 일주일 만에 다 소진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2만부를 추가 증쇄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때문에 출판사 내부에서도 이 일로 꽤나 얘깃거리가 되고 있었다.
특히 인기가 떨어지는 잡지의 편집부는 더 그랬다.
“와, 의외네요. 출판사가 발행하는 동인지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러게. 삼사라 하나 만을 위한 잡지에다, 이름 없는 신인들이 대다수. 그것도 모자라 네임 그 자체로 실려 있는 것도 있는 황당한 잡지인데도요.”
“안 그래도 출판부나 영업부에서도 깜짝 놀란 분위기더라고. 걔네들 초판 망하고, 분위기 싸해지다가 두어 번 더 책이 나오고 나면 편집부 해체될 거라는 얘기도 했었거든.”
“그럴 만도 하죠. 솔직히 만화잡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책이니까요.”
“그래도 성공했잖아. 그만큼 삼사라의 인지도가 높다는 반증 아니겠어?”
“그렇죠. 거기다 삼사라가 완결되고 나서 섭섭해 하는 팬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저도 그중 한명이었고요. 하지만, 저런 잡지가 성공할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는데.”
“그쪽 편집부 반응, 얘기 들었어?”
“어. 뭐 난리라더라. 솔직히 거기 애들 반 이상이 다른 편집부에서 떨거지 취급 받던 애들이잖아. 그래서 걔네들도 열심히는 했지만, 크게 기대는 안한다는 분위기도 좀 있었다고 하던데, 이렇게 첫출발이 좋았으니. 반응이 좋으면 격주로 바뀐다는 얘기도 있던데.”
“아깝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거기 지원할걸.”
“나도.”
그렇게 말하던 직원들이 모두 시무룩해졌다.
*
키도의 화실.
이곳의 어시들도 모두 삼사라의 팬이어서, 모두 책을 구입했고, 각자 한권씩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라바나가 제일 괜찮아 보이네요. 그림도 가장 안정적이고.”
“그거, 텐겐 선생님이 추천하셨다고 하던데요?”
“알아. 나도 들었어. 한명이 아니라 팀이라고 하더라고.”
“팀이요?”
“이름 보면 스튜디오D라고 적혀 있잖아. 화실 전체를 이름으로 쓰고 있잖아.”
“와, 팀으로 활동하는 만화가들이라, 어쩐지 멋진데요?”
“그러게. 각자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를 맡아서 하는 거니까 시너지도 있고.”
그 이야기를 듣던 선임어시인 난바가 피식 웃었다.
“너희들, 팀으로 작업하면 효율이 높고 좋을 것 같기만 하지?”
“아무래도 뜻이 맞는 사람들이랑 같이 하면 힘도 덜 들고, 재미도 있으니까 결과도 좋은 게 아닐까요?”
“맞아요. 저도 이런 팀이 있다면 같이 열심히 할 것 같은데.”
모두 팀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난바는 손을 좌우로 흔들며 코웃음을 쳤다.
“물론 모두의 마음이 잘 맞는다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긴 하지. 그런데 말이야, 이게 또 사람이 많이 모이면 생각처럼 일이 돌아가지 않거든.”
“왜요?”
“왜긴 트러블이 많이 생기게 되니까. 특히나 우리 같은 업종의 인간들은 자기 생각이 강하거든. 거기다 그들을 통제하는 사람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지. 그러다보니까 중요한 일은 자기가 하려는 경향도 강하고.”
그 말에 후배들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저라도 팀에서 잡일 같은 것만 잔뜩 시키면 짜증날 것 같기는 해요.”
“역시 팀이라는 게 효율만 있는 건 아니겠네요.”
“그래. 스튜디오D라는 팀에 대해서 아는 건 없지만, 아무튼 손발을 잘 맞춰 간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그러게요.”
* * *
“스튜디오D 애들은 어때?”
내 물음에 이대봉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괜찮아. 아직 서로 의견충돌은 좀 있는 것 같지만, 팀으로서 점점 끈끈해지고 있으니까. 가끔 내가 도와주기도 하고.”
팀 작업이라는 것이 효율적인 부분이 높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개성이 강한 사람들끼리 모이다보면 쉽게 깨지기도 한다.
특히나 창작 쪽이니 더욱 그런 면이 강하다.
하지만, 리더 격인 박기우를 다른 애들은 잘 따르고 있어서, 팀의 결속력이 강한 느낌이라 잘 굴러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삼사라월드가 많이 팔려서 애들도 엄청 좋아해.”
“그렇겠지. 아무래도 데뷔작품이 실린 잡지가 잘 팔리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맞아. 자신들의 작품이 일본잡지에 실렸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거든.”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이대봉이 갑자기 달력을 쳐다본다.
뭘 생각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내 물음에 이대봉이 달력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걔, 아직 연락 없니?”
“누구? 류타니?”
“응. 그날 이후로 소식이 잠잠하잖아. 전화도 없었어?”
“어.”
내 대답에 이대봉이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마음에 드는 애였는데.”
“그래도 연락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거지.”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실버가 불쑥 끼어들었다.
“막상 타국에서 힘든 생활을 해야 할 것 같으니까 겁이 났을지도 모르지.”
그 말에 이대봉의 머리가 실버 쪽으로 홱 돌아갔다. 그리고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모두 너 같은 줄 아니?”
“나 같다니, 그럼 내가 나약하다는 거냐?”
“당연하지. 넌 껍데기만 울퉁불퉁 커다랗기만 하뿐, 내면은 애잖아.”
“뭐, 껍데기만 울퉁불퉁? 애? 너 나한테 죽고 싶냐!”
“그래, 죽여 봐라, 죽여 봐.”
이대봉이 실버 쪽으로 머리를 내밀며 말한다.
가까이서 저랬으면 진짜 머리통이 깨졌을지도 모르는데, 멀찍이서 저렇게 말하니, 상황이 웃긴다.
최소한의 안전거리는 지키겠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어시들도 그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참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이대봉의 그런 행동이 실버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으르렁거렸다.
“오냐, 이참에 껍데기까지 홀라당 벗겨주지.”
그렇게 말하며 실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화들짝 놀란 이대봉이 서둘러 뒤로 빠진다.
“야, 이. 야만인아. 너는 맨날 폭력밖에 모르니?”
“이제 알았냐!”
화실이 점점 소란해져 갔다. 하지만 누구도 말리는 사람은 없다.
늘 만나면 이러니까. 아니, 말리면 더 시끄럽고 피곤하니, 그냥 두 사람 싸우는 걸 마치 드라마 보듯이 즐길 뿐이다.
다음엔 정말 팝콘기계라도 들여놔야 할까보다.
이젠 나도 이런 광경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나가볼게!”
그 순간 멈칫하던 이대봉이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치며 바깥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정말 실버에게 한 대 맞을지도 몰라서겠지.
그런데 잠시 후 이대봉이 묘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왜? 누군데?”
내 질문에 이대봉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 일본어로 말했다.
“자, 어서 들어오세요.”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류타니 부모님이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