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라 멀티버스 (6)
새로운 만화잡지인 ‘삼사라월드’의 편집부.
이미 첫 호의 원고들을 인쇄공장에 넘긴 상황임에도 편집부는 아직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어수선하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조금씩 편집부의 모양이 갖춰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직원들이 오늘도 정리와 함께 다음호 준비를 하느라 바쁜 시각. 그때 얼마 전에 입사해 이곳에 배치된 신입이 새롭게 나온 샘플 잡지를 품에 안고 편집부에 들어오고 있었다.
“잡지 샘플이 나왔어요!”
그렇게 소리치자 일하던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추고는 일제히 그에게 몰려들었다.
“한권 줘 봐.”
“나도.”
“자자, 충분하니까요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직원들에게 책들을 나눠준다.
샘플용 책자를 받아든 직원들이 책 겉면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곧 페이지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오, 인쇄 품질은 괜찮네. 종이야, 뭐 재생지니까 할 수 없는 거고.”
“그래도 이정도면 소년 히어로보다 더 상태가 좋아요. 혹시 이 때문에 단가가 높아지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두께가 얇잖아. 그리고 협찬 광고가 많아서, 이정도면 오히려 여유만만이지.”
“그러네. 광고가 좀 많네. 하지만 이러면 독자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광고 때문에 단가가 유지되는 거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어차피 이거 사는 독자들은 일반적인 독자들이랑은 다르기도 하고.”
“맞아. 삼사라의 팬들이 두 타깃이니까.”
직원들이 웅성거리며 떠들던 그때 책을 가지고 들어왔던 신입직원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아마추어는 그렇다고 쳐도 왜 현역들까지 원고를 보낸 거죠? 냉정하게 따지면 경쟁자인 다른 만화가의 작품이잖아요. 이런 건 자존심 문제 아닌가?”
그 말에 직원들 몇 명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중 한명이 입을 열었다.
“너는 현역 만화가들에게 경쟁자? 자존심?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냐?”
그 말에 신입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그럼 그게 안 중요해요?”
“물론 그런 게 중요한 사람도 있겠지. 소수는.”
“소수요?”
“넌 만화가 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
그 말에 신입이 잠시 동안 눈을 데굴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음······, 빵모자? 쉴 새 없이 그림에 빠져 산다? 그리고 뭐 돈이 엄청 많다, 정도죠.”
그 말에 다른 직원들이 크게 웃었다.
그런 모습을 멀뚱거리며 바라보던 신입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돌아봤다.
“왜요? 제가 말한 게 틀린가요?”
“틀리고 뭐고, 그냥 네가 말한 건 거의 데즈카 선생님의 이미지잖아.”
그 말에 주변 직원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지 신입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데즈카 선생님은 만화가의 대표나 다름없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하죠.”
“그래, 뭐. 그런 만화가들도 있겠지. 하지만 현실은 좀 달라. 만화가로 입문해서 살아남는 사람은 정말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까. 단행본을 낸 경험이 없는 만화가도 많을뿐더러, 설사 단행본을 10권 이상 내더라도 사는 게 빠듯해 결국 포기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정말이요? 10권 정도면 떼돈을 벌었을 것 같은데.”
“너도 이 바닥에서 일해 보면 많이 겪게 될 거야.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러니까 아까 네가 말했던 현역이 왜 이런 작품의 외전 격인 만화의 공모전에 응모 하냐면 바로 그게 가장 큰 이유라는 거야. 결국 먹고 사는 게 힘들기 때문이라는 거.”
“······.”
“아무튼 그만큼 먹고 살기 어려운 만화가들도 많다는 건 현실이지. 어쩌면 우리 같은 출판사 직원들이 더 속편할 수도 있는 거고.”
“어쩐지 서글프네요. 저는 만화가들이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렇게 힘든 사람이 많다니. 그런 것도 모르고, 제가 한심해 지네요.”
“그렇게 주눅 들 필요 없어. 솔직히 만화 출판사 직원들도 대부분 일 시작하기 전엔 만화에 관심 없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니까. 솔직히 만화 출판사에 와서야 만화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사람이 거의 다지.”
“정말요? 그건 의외네요. 만화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자기 일이 좋아서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소수지.”
“맞아. 진짜 소수야.”
“그럼, 그럼. 그건 내가 보증하지.”
그렇게 한참 떠들고 있는데, 한쪽에서 문이 열리며 팀장 한명이 나오더니 신입에게 소리쳤다.
“어이, 사카모토! 샘플 아카기 씨에게 안 가져다 줄 거야?”
“아차, 죄송해요.”
신입이 자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 치더니 서둘러 샘플잡지를 들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아래층에 있던 소년 히어로의 편집부에 신입이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리고는 지로의 자리로 다가가서는 책을 내밀었다.
“아카기 씨. 이거 삼사라월드 샘플입니다.”
그러자 그 책을 받아든 지로가 웃으며 말했다.
“아, 고마워요.”
“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인사를 꾸벅하고는 서둘러 편집부를 빠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야지마가 지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오, 드디어 나온 거야? 샘플?”
“네.”
“너도 삼사라월드에서 일하고 싶은 거 아니야?”
“그러고 싶기는 한데, 시간이 있어야죠. 지금 연재중인 작품에 매달리기도 바빠서.”
“하긴, 너무 부지런한 작가를 담당하는 것도 곤욕이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래. 너야 그렇겠지.”
“선배는 아닌가 봐요?”
“아니, 나도 부지런한 작가의 담당을 하고는 싶은데, 우리 무카이 선생은 한 작품 하기에도 버거워 하니까.”
웃으며 그렇게 말한 야지마가 가방을 챙겼다.
“아무튼 열심히 해라. 난 우리 무카이 선생이나 뵈러 가야겠다. 내일이 마감인데, 아직 절반밖에 못했다고 하니까 가서 먹칠이라도 도와야지. 그럼 수고해.”
“네.”
야지마가 자리에서 빠져 나가자 그 모습을 힐끔 보던 지로가 곧장 삼사라월드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단 두께는 소년 히어로의 절반보다 조금 더 두꺼운 정도다.
그런데, 거기에 얇은 컬러용지가 많이 끼어있다.
광고 스폰서 페이지.
마음에 드는 구성은 아니지만, 종이의 질이 좋고, 인쇄도 괜찮다.
잉크의 질이 좋은지 그림도 선명한 편이다.
그럼에도 가격은 소년 히어로에 비해 조금 더 비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담스럽다거나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런 만화잡지는 워낙 싸게 나오다보니, 보통은 사서보고는 금방 버리기 일쑤니 조금 더 비싸다고 해봐야 크게 차이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첫 번째 연재물은 텐겐이 추천한 ‘라바나’다.
텐겐 선생의 추천으로 연재가 결정된 만화.
특별히 한국에서 컬러까지 완성시켜 보낸 덕분에 잡지 최초의 권두컬러 만화가 되었다.
만화의 완성도는 한국만화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리고 만화는 특이하게 팀의 이름으로 나와 있다.
‘스튜디오D'가 그들의 활동 필명이다.
그리고 다음 만화는 텐겐과 지로 자신이 관심을 가졌던, ‘나가’다.
어설픈 그림의 네임이었음에도 스토리가 너무 좋아서 뽑힌 작품.
그래서 작화를 대신 해줄 사람을 뽑으려 했는데, 텐겐이 네임을 그대로 올려보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있어서, 그대로 한 것이다.
첫 권이다보니 그렇게 텐겐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고, 아직 삼사라월드 편집부와도 아직은 친한 사이가 아니라 자신이 나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쪽의 편집장이 직접 텐겐과 연락을 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나머지 작품들도 흥미로워서 꽤나 재미있는 잡지인 것만은 틀림없다. 다만, 이런 책이 얼마나 팔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출판사 내에서 말이 많았다.
애초에 많이 팔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탓에 잡지도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이런 변화의 시도는 출판사의 미래를 위해서도 긍정적인 건만은 분명했다. 이런 시도 없이 일본 최고의 3대 소년지를 앞지른 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아무튼 잡지는 실험적이면서도 꽤 재미있는 구성이다.
급조된 편집부에서 만들어진 책 치고는 나쁘지 않다.
아무튼 한국에 직접 보내야 할 책 몇 권을 봉투에 담아 편집부를 나섰다.
* * *
지로가 보내온 소포를 받았다.
미리 발행된 잡지 삼사라월드 몇 권이 들어있었다.
책을 확인해보니 생각보다 잘 만들어져서 조금 놀랐다.
“이정도면 일반 소년지와 비교해도 나쁘지 않네요.”
박소미가 책을 훑어보며 호기심을 보인다.
다른 어시들도 모여 책을 살펴본다.
이제까지 잡지들과는 달리 써니가 그린 원고는 없는 잡지임에도 소년 히어로보다 더 관심을 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온전히 삼사라만을 위한 잡지니까.
“와, 콘티를 이건 콘티를 그대로 실었어요. 이래도 괜찮아요?”
“아직은 잡지의 정확한 색이 정해지지 않아서, 이런 저런 실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 말에 박소미가 오버스럽게 놀라는 시늉을 해 보인다.
“아니, 잡지를 통째로 실험이라니, 스케일이 남달라요.”
“이런 거 보면 확실히 우리 선생님들은 대단하다니까요. 만화 선진국인 일본에서 이정도 대접을 받고 있으니까. 다른 만화가들은 일본잡지에 출판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때 경희와 선희가 화실로 들어왔다.
“어? 오늘은 일찍 마치셨나 보네요.”
박소미의 질문에 경희가 힘없이 대답했다.
“국영수 테스트 시험이 있었거든요. 학력고사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시험 망쳤어요?”
“모르겠어요. 진짜 시험이 코앞에 다가와서 그런 건지, 긴장도 되고,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결과가 잘 나올지 걱정도 되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에 반해 선희 표정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선희를 보던 경희가 우울하던 표정을 지우며 히죽 웃었다.
“나와는 달리 선희는 시험치고 나면 모두 답을 확인하는 답안지 취급을 받으니까. 그런 모습을 보면 제가 다 뿌듯해져요.”
“너도 많이 맞췄어. 반에서 네 번째니까.”
그 말에 화실식구들은 물론 나까지 깜짝 놀랐다.
“네 번째? 4등이라고?”
“아니, 확실한 건 아니고.”
“한반에 몇 명이랬지?”
“에, 52명.”
“거기서 4등?”
“아니, 그러니까 확실한 건 아니라고.”
“선희 시험지는 답안지 취급이라며.”
“그야 그렇기는 한데.”
“그럼 선희 말이 맞겠지.”
“······.”
나름 쑥스러워하고 있다.
그동안 중위권을 조금 넘는 정도의 성적이었던 경희가 3학년에 올라오면서 꽤나 성적이 좋아졌다고는 들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동안 공부 때문에 죽자 사자 책상에 붙어있더니, 역시 경희도 머리는 좋은 모양이다.
아무튼 들어와서 한동안 시험에 관한 얘기를 하더니, 내 앞에 있던 잡지를 뒤늦게 확인하고는 그것에 관심을 보인다.
“이거, 그거지? 삼사라 관련된 만화잡지.”
“어. 삼사라월드야.”
“삼사라만으로 만화잡지가 나오다니 신기하다. 나 좀 봐도 돼?”
“나도.”
경희도 관심을 보인다.
전에 나랑 같이 원고를 봤는데도 궁금한 모양이다.
“어. 그래.”
내 대답에 쌍둥이들이 책을 하나씩 들고 열심히 뒤적거리며 본다.
“야, 살살 다뤄. 그거 스튜디오D 팀 애들한테도 줘야 해.”
내 말을 듣기나 한 건지 열심히 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내가 나가볼게.”
성준희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화실 문을 열고는 날 불렀다.
“윤환아, 네 손님 같은데?”
“내 손님? 누구?”
“······모르겠어. 얼핏 보기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던데.”
“고등학생이 날? 쌍둥이를 찾아온 게 아니고?”
“응. 널 만나러 왔데.”
고등학생 남자애?
누구지?
내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가려하는데 그때 성준희가 다시 말했다.
“아 참, 일본 애야.”
“일본 애?”
일본에서 온 고등학생 남자아이라.
전혀 감도 안 잡히네.
의아한 표정을 하며 밖으로 나가,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정말로 고등학생 정도의 앳된 여드름투성이의 남자애가 서 있었다.
“텐겐 선생님?”
“그런데 누구시죠?”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머리를 바닥에 엎드렸다.
뭐야 왜 이래?
이거 도게자 아닌가?
“제 이름은 류타니 에이지입니다. 선생님, 저를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갑자기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야?
그리고 이름이 어째 익숙하네.
류타니, 류타니······.
어?
류타니 에이지?
이번 삼사라월드에 당선된 ‘나가’의 콘티를 만든 사람의 이름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