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92화 (292/425)

삼사라 멀티버스 (5)

한꺼번에 엄청난 양의 소포가 집으로 날아왔다.

복사된 A4용지가 잔뜩 들어있는데 대충 5-6kg 정도 되려나?

물론 감당 못할 정도의 분량은 아니지만, 웃기는 건 이게 일본에서 1차로 거른 분량이라는 뜻이다.

실제로는 이것의 열배 이상이 출판사로 모였던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매달렸다고 하던데, 거기엔 키도나 니시다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들의 원고에도 바쁠 사람들이 이런 일에 나서줬다는 게 개인적으로는 고맙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그 만화가들의 담당자들에게 지로가 눈치를 보는 건 아닐까.

괜히 미안해지네.

아무튼 이만큼의 원고를 내가 최종 결정해야 한다.

“와, 이게 다 뭐니?”

원고들과 콘티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마침 화실을 찾아온 이대봉이 호기심을 가지며 다가와 물었다.

“삼사라월드에 투고한 원고들이랑 콘티.”

“삼사라월드라면 새롭게 시작한다는 그 만화잡지의 이름이지?”

“어.”

“그럼 드디어 본격적인 모양이네?”

“아마도.”

“나 이거 봐도 되지?”

“그래.”

그렇게 대답하자 이대봉이 싱글벙글하며 맞은편에 앉아서는 원고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연신 감탄하고 있다.

“와, 확실히 일본 애들 그림실력 무시무시하다. 이게 다 아마추어 실력이야?”

“현역도 제법 끼어있어.”

“만화가들이?”

“어. 팬으로서 참여했다고 하더라.”

“현직 만화가들이 삼사라 팬을 자청하며 이런 원고를 보내다니, 대단하다.”

“나도 의외야.”

그때 어시들이 끼어들었다.

“에이, 우리나라에도 만화가들 중에 삼사라 팬이 얼마나 많은데요. 물론 현역 만화가들이 이런 공모전에 보낼 거라고는 확신하긴 어렵지만요.”

“아닐걸요? 소년지나 만화잡지에 연재중인 만화가들은 대본소 출신 아니면 일감이 부족해요. 아마도 충분히 보내줄걸요?”

“맞아요. 제 친구가 있는 화실의 선생님도 삼사라 전권을 다 가지고 있고, 평소에도 만화 그릴 때 참고 많이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참고가 아니라 베끼는 거지. 요즘 대본소 만화에 우리 삼사라나 파시엔시아 장면을 베껴 그린 장면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도, 전혀 제제를 받지 않고 있잖아. 걔네들 입장에선 일본만화라 이거지.”

“아, 맞아요. 얼마 전에 대본소에 나온 축구만화에 파시엔시아와 같은 장면이 수두룩하게 나오더라고요. 그거 보면서 얼마나 열 받았는데.”

김기철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대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너희들 말이 맞아. 한국에서 공모전을 한다고 해도 많이 모이겠지. 하지만, 공정하게 심사한다면 평균 한국 실력으로는 어림없을 거야. 그만큼 지금 일본이랑 한국의 만화실력에 차이가 심하거든.”

그 말에 내가 수긍하며 말했다.

“맞아. 일본이랑 한국은 이미 경쟁의 수준이 다르니까. 그리고 이제까지 쌓은 경험치도 다르고. 우리나라는 너무 외국의 정보가 막혀있어.”

이 때문에 나중엔 일본만화가 쏟아져 들어올 때엔 한국만화계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다.

그리로 그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 갈 것이다.

어쨌거나 쌓여있던 원고를 다 확인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시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서도 혼자 화실에 그것들을 살폈고, 새벽이 되어서야 모두 다 볼 수 있었다.

*

주변이 소란스럽다.

눈을 천천히 뜨며 뻐근한 몸을 일으켰더니, 화실이었다.

잠시 멍한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일본에서 보내온 원고를 보느라 새벽에야 잠들었었다는 게 떠올랐다.

그런 나를 어시들이 쳐다보고 있다.

“이제 일어났니?”

성준희가 날 보며 물었다.

“어. 지금 몇 시냐?”

“곧 점심시간이야.”

“벌써 그렇게 됐나?”

하기야, 4시가 넘어서 잠들었으니 납득이 되긴 하지만.

“소포로 온 거 보느라 늦게 잠들었던 거니?”

“어.”

물론, 생각이상의 작품을 몇 개 발견한 덕분에 시간이 더 걸렸다.

그중에서도 ‘나가’라는 제목의 작품은 꽤나 흥미로웠다.

주인공 켄이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도움을 주는 ‘나가’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실 그는 켄의 수많은 타임루프를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 중 하나에서 온 존재였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가 그 세계에 있던 켄의 제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끝나는 이야기였다.

설정도 설정이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 독특한 덕분에 눈에 띄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만화가 아닌 콘티였다.

그러니까, 작화를 맡아줄 사람만 제대로 만난다면 어떤 시너지가 생길까.

마음 같아선, 선희에게 한번 그려보면 어떻겠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생긴다.

아무튼 꽤나 괜찮은 스토리도 있고, 그림도 만족할 만한 작품들이 예상보다 많았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지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어제 봤던 원고들 중에서 최종 선택한 작품들을 불러주고, 나름의 평가를 알려주었다.

그것을 받아 적은 지로가 말했다.

- 역시 ‘나가’라는 작품이 마음에 드셨군요.

“아카기 씨도 그랬습니까?”

- 다른 시간축의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는 게 독특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켄의 모습도요.

“네. 제 예상보다 수준 높은 스토리라서 좀 놀랐습니다. 그리고 원작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도요.”

- 이번에 보내온 대부분의 원고나 네임이 그랬습니다. 담당인 저조차도 놓치고 있던 이야기를 부각시켜 스토리를 만들어낸 참신한 작품도 있었고요. 하지만,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심심해 탈락시킨 작품이 상당수입니다.

많은 작품이 몰린 만큼 수준이하의 작품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 아, 그리고 이번에 보내주신 작품 괜찮았습니다.

“라바나요?”

- 네. 그런데 선생님이 따로 발굴한 작가입니까?

“아, 네. 제가 아니고 대봉이 형이요. 그리고 한명이 아니고 팀입니다.”

- 팀이라니, 어쩐지 스토리와 그림 모두가 수준이 높더군요. 그나저나 제임스 선생님도 대단하시네요. 바쁘신 와중에도 신인들을 직접 발굴하시고.

“그러게요.”

- 아무튼 선생님이 직접 뽑으신 이상 이 작품도 삼사라월드 첫 호에 나갈 겁니다.

혹시나 했는데, 그래도 잡지에 실린다니 다행이다.

- 그리고 앞으론 삼사라월드에서 선생님을 담당하시는 분은 그쪽 신입편집장님이 되실 겁니다. 조만간 선생님을 찾아 뵐 겁니다.

“그렇겠군요. 아카기 씨는 아무래도 바쁘실 테니까요.”

- 하하, 그래도 마음 같아선 제가 직접 하고 싶기는 합니다만.

정말로 섭섭한지 말 사이사이에 한숨이 섞여 들려온다.

“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다 진짜 쓰러집니다.”

- 네?

“카와다 씨한테 들었어요. 요즘 정신이 없으시다고. 이게 다 저희 때문이라 미안합니다.”

- 아닙니다. 담당으로서 당연히 할 일인데요. 걔는 왜 쓸데없는 말을······.

그렇게 지로와 한참을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어쨌거나 내가 첫 번째로 할 일은 다 했다.

이젠 새롭게 결성된 편집부가 알아서 하겠지.

*

- 진짜요?

“네. 삼사라월드 첫 호에 올라갈 거야.”

내 말에 전화기 너머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전해주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난리가 났는지 여자들 비명소리(?) 같은 것도 들려온다.

잠시 동안 그렇게 요란을 떨더니 다시 전화기에서 박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박기우는 이대봉이 만든 ‘스튜디오D’의 리더다.

몇 번 전화통화를 하면서 친해진 탓에 이젠 말을 놓게 된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좋아하던 목소리가 다시 진중해졌다.

- 저기, 형 백으로 들어가서 욕먹는 건 아닐까요?

“백은 무슨. 그쪽에서도 인정한 실력이야.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 그래도, 같은 한국인이라서······.

“왜 그렇게 자신이 없냐. 내가 괜찮다는데.”

그 말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다시 힘차게 대답했다.

- 네. 알겠습니다. 형.

그리고 며칠 후 스튜디오D 멤버들이 화실을 찾아왔다.

전에 갔을 때 보이지 않던 남녀 두 사람도 같이 온 덕에 여섯이나 된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화실에 들어온 애들이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면 정신없이 인사하느라 바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귀를 막으며 짜증을 부렸다.

“아유, 시끄러워! 너희들이 무슨 이등병이야? 적당히 좀 해!”

“어? 형도 군대갔다왔어요?”

찾아온 애들 중 한명이 놀란 얼굴로 묻자, 이대봉이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에 양손을 턱 얹고는 버럭 했다.

“뭐야? 너 지금 날 놀리는 거니? 당연히 갔다 왔지. 그것도 최전방부대 출신이야. GOP에서 근무했다고!”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란 분위기다.

특히 어시들이.

그 중 박소미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오, 정말이야? 오빠 철책근무 한 거야?”

“당연하지. 우리 윤환이와는 전혀 다르다고.”

그렇게 말하며 날 흘끔거린다.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뭐야, 나도 최전방······.”

아, 여기서는 그냥 육방 출신이지.

내가 곧 입을 다물자 이대봉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알아, 알아. 너도 최전방에서 근무한 군인들처럼 힘들었다는 걸. 뭐, 육방이라도 힘든 건 힘든 거지.”

“······.”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뭐 지금의 난 반박할 수가 없다.

솔직히 난 육방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르는데.

그런데 오히려 실버가 나섰다.

“땅개는 그만 떠들지?”

“땅개라니, 너 특전사 나왔다고 나 무시하는 거니?”

“훗, 겨우 100키로 따위 행군에 질질 싸는 주제에. 천리행군이라고 들어봤냐?”

“한겨울 영하 25도에서 4시간 이상씩 야간근무를 매일 서봤어? 비상시엔 6시간 이상. 전반야, 중반야, 후반야.”

“넌 치누크에서 낙하산 짊어지고 뛰어내려 봤어? 낙하산이 뭔지는 알아?”

둘이서 또 시시한 걸로 싸우고 있다.

그 때문에 찾아온 6명이 눈치를 슬슬 보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기, 제임스 형이 저렇게 흥분하는 건 처음 봐요.”

“맞아요. 오빠는 늘 느긋한데, 오늘따라 이상하네.”

“저 둘을 붙여놓으면 늘 저래. 신경 쓰지 마.”

“아.”

“어째, 새롭네. 제임스 오빠가 저렇게 궁지에 몰리는 것도 처음보고.”

“킥킥 맞아.”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꽤나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조금은 긴장이 풀어졌는지 그제야 화실을 조금씩 둘러보고 있다.

그러다가 리더인 박기우가 어시들 사이를 힐끔거리며 내게 물었다.

“저기, 써니 선생님은 누구세요?”

“아, 지금 학교에서 안 돌아왔어. 오후 늦게 돌아올 거야. 아니, 요즘엔 밤에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서, 좀 많이 늦겠다.”

“어? 대학생이에요?”

“뭐? 써니 선생님이 대학생? 진짜 대단하다.”

“하긴, 텐겐 오빠의 동생이니 당연한 건가?”

“그러네.”

“텐겐이라 부르지 마라. 그건 일본에서 활동할 때 쓰는 필명일 뿐이니까. 그냥 이윤환이야. 그리고 써니도 이선희고. 아참, 선희는 고3이야, 고등학교 3학년. 다음 달에 있는 대입시험 때문에 바빠서 늦게 오는 거고.”

내 말에 애들 전부가 화들짝 놀랐다.

“네? 고3이요?”

“진짜예요?”

“어. 맞아. 고3.”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자 모두 얼음땡.

그 모습을 본 이대봉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내가 말 안했었니?”

그 말에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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