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89화 (289/425)

삼사라 멀티버스 (2)

갑자기 이 사람들이 왜? 라고 생각했다가 순간 머리를 끄덕였다.

뭐 동인지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상당한 퀄리티라는 건 인정해야 할 정도로 그림의 완성도가 높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수준의 퀄리티였다.

그때 이대봉이 손으로 턱을 괸 채 날 보며 히죽거렸다.

“얘, 삼사라 스토리 작가야.”

“네?!”

“정말요!”

네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까와는 다른 경악의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그러다가 곧 의심스런 눈빛으로 이대봉을 돌아보며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제임스 오빠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겠는데. 그래도 느닷없이 손님을 데려와서는 텐겐이라고 말하는 건, 좀.”

“맞아요.”

나머지 사람들도 곧 의심스럽다는 얼굴이다.

“내가 전에 삼사라 그리는 애들이랑 친하다고 얘기 하지 않았었나?”

“안했거든요.”

“맞아요. 그런 말 한적 없어요.”

“아, 그랬구나.”

그렇게 말하며 이대봉이 머리를 긁적이자 여자 한명이 버럭 했다.

“그렇게 말하고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요. 정말 이분이 삼사라 스토리 작가라면 텐겐이시라는 거잖아요.”

“오, 너 이름도 잘 알고 있네.”

“삼사라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 알고 있어요. 저는 일본판 단행본도 갖고 있는걸요.”

“저도요.”

“그러니까, 그 텐겐이 맞다고, 얘가. 이름은 이윤환.”

그렇게 말하며 날 보고 싱긋 웃는다.

지금 분위기에서 웃음이 나오냐?

내가 텐겐인 걸 증명하지 못하면 살인이라도 할 것 같은 느낌인데.

그때 남자 한명이 뭔가를 떠올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책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곳에 꽂혀있는 책들을 살피더니 한권을 슥 꺼낸다.

주간소년 히어로다.

아무튼 책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자리로 돌아와서는 자기들끼리 모여 그것을 보기 시작했다.

뭘 보는 거지?

나와 잡지를 번갈아 보며 숙덕거리다가 한명이 입을 열었다.

“맞아, 얼굴이 같은 것 같아.”

“그래. 내가 봐도 같은 사람 같아.”

“음, 애매하긴 하지만. 비슷하긴 해.”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선희랑 같이 찍었던 인터뷰 사진이 올라갔던 그 책이구나.

하지만 흑백이라서 얼굴을 쉽게 알아보긴 힘들 텐데 눈썰미도 좋아.

아무튼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자잘한 검증이 진행되었다.

삼사라의 스토리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로 내게 질문을 하기도 했다.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들의 눈빛이 변했다.

“나 지금 온몸에 닭살 돋았어. 봐봐.”

그렇게 말하며 여자한명이 자신의 소매를 걷어 팔뚝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 나만 쳐다보고 있다.

“진짜, 텐겐 작가님!”

“영광이에요.”

“저기, 가실 때 송구스럽지만 사인 한 장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집에 가보로 남기고 싶어서요.”

이제야 대충 믿어주는 분위기다.

아무튼 내가 텐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자 행동이 180도 달라졌다.

마치 인기 많은 연예인을 만난 일반인처럼.

그나저나, 좀 놀랐다.

내가 삼사라의 작가기는 하지만, 세세한 것까지 모두 기억하는 건 쉽지 않았는데.

이 사람들은 나보다 이야기를 더 잘 기억하고 있어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대는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실실 웃더니, 이번에 날 돌아보며 말했다.

“얘네 들, 내가 개인적으로 모은 애들인데, 공통점이 있어.”

“공통점?”

“그래. 삼사라의 진짜 팬. 그러니까 삼사라 광이라고.”

난 또 뭐라고.

그건 아까 질문을 받으면서 눈치 채고 있었다.

아무튼 이대봉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보면 알겠지만 실력이 좋아서, 이대로 묵히기에 너무 아깝잖아. 아, 그리고 얘네 들은 하나의 팀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스토리, 데생, 배경, 그리고 뒤처리 같은 경우엔 함께 하고.”

“그럼 이게 팀으로서 완성시킨 원고라는 거네.”

“그렇지. 아, 내가 너무 말이 많았나? 일단 읽어봐. 그러고 나서 얘기해도 늦지 않으니까.”

“······.”

“얼른.”

모두의 눈이 반짝거리며 내게 쏠려있다.

부담스럽다, 부담스러워.

이런 분위기에서 강요받는 거 정말 싫은데.

하지만, 이들이 만들었다는 삼사라의 또 다른 얘기가 궁금하긴 하니까.

일단 표지의 제목은 ‘라바나’다.

나가는 삼사라 스토리에서 중간쯤에 등장하는 적으로, 유일하게 인간 출신의 악당이다.

켄을 죽음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결국 칼파나의 배신으로 육신이 분해되어버리는 존재였다.

아무튼 나름 강력한 적이었던 라바나가 제목인 만화라니.

시작부터 호기심이 팍팍 생기는구만.

곧바로 원고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그림으로만 보자면, 꽤나 디테일이 괜찮다. 하지만, 이건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다.

디테일이라는 것은 까놓고 말해, 시간만 많이 들이면 되는 부분이니까.

그림에서 중요한건 얼마나 능숙하게 연출을 하느냐하는 거니까.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쁘지 않은 정도라는 게 지금 내 생각이다.

나쁘지 않다.

그냥 그런 수준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아마추어의 실력으로 나쁘지 않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림만 본다면 대단한 수준인 것이다.

물론 늘 선희의 그림에 익숙한 내 입장에선 좀 부족해 보이지만.

아무튼 그다음은 진행의 매끄러움.

이것도 아직은 좀 불안정해 보이긴 하는데, 그동안 삼사라를 많이 연구했는지 꽤나 비슷한 느낌이다.

그리고 스토리.

이 부분은 일단 단정하긴 어렵다.

원고 자체가 그리 많은 게 아니니까.

그리고 원고도 완성이 된 게 아니라서.

그래도 분명한 건, 그려진 곳까지는 굉장히 재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삼사라의 설정이나 규칙도 꼼꼼하게 다 지켜지고 있어서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때 내 표정을 살피던 이대봉이 피식 웃더니 남자 한명에게 말했다.

“기우야, 콘티 있지? 그거 가져올래?”

“다 완성하지 않았는데요.”

“괜찮으니까 일단 가져와. 우리 윤환이가 궁금해 하는 표정이잖아.”

“아, 네.”

기우라 불린 남자가 후다닥 움직인다. 그리고 책상에서 노트 하나를 챙겨 다시 돌아오더니 그것을 꽉 움켜쥔 채로 어물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그에게서 노트를 낚아챘다.

“으이그, 뭘 그렇게 붙들고만 있어.”

그러더니 날 보며 노트를 내밀었다.

“윤환아, 자.”

“어. 그래.”

이대봉이 건넨 노트를 받아서는 펼쳐봤다.

대략적인 상황을 그림으로 간단하게 그려놓은 콘티다.

앞부분은 원고와 일치하는 내용.

그러나 원고의 데생을 맡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연출은 상당히 다르다. 물론 원고 쪽이 훨씬 좋다.

콘티는 스토리로서만 가치가 있을 뿐 연출에는 아마추어라는 것이 티가 날 정도다.

그러니까, 데생을 맡은 사람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콘티를 보자마자 확인이 된 상황.

그런데 콘티를 읽어보니 대사나 흐름은 상당히 좋다.

읽고 있다 보면 그림에 대한 신경이 전혀 쓰이지 않을 정도로.

확실히 이야기를 술술 풀어가는 재능도 있고, 그 덕분에 재미도 있다.

대략 6화 분량의 콘티.

이야기 자체는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라바나가 인간 시절의 이름은 ‘포치’로 삼사라의 이야기에서 아주 짧게 등장하긴 했었다. 물론 그의 과거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았고, 나도 그것까지는 이야기를 만들어 두진 않았었다.

그런데, 이 콘티엔 그런 그의 과거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포치’라는 인간이 왜 악마 ‘라바나’가 되었는가에 대해서.

물론 삼사라에서 아주 짧게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던 시기도 있었지.’라는 대사를 하긴 했지만, 이 짧은 말만 가지고 6편에 걸쳐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도 재미있다.

그리고 그 6편도 상당이 전개가 빨라서, 속도만 조절한다면 두 권 분량정도의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아무튼 결론적으론 ‘라바나’는 상당히 재미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만화가 외부에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게 하는 건 내 입장에서도 상당히 손해라는 생각이다.

이런 만화는 삼사라의 생명을 끊임없이 연장시켜 줄 테니까.

덕분에 욕심도 생겼다.

어떻게든 이 만화를 외부로 알려야겠다고.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표정으로 콘티노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네 명의 남녀가 긴장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마치 날 뚫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그때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도 들린다.

상당히 긴장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때? 네 감상은?”

이대봉이 싱글거리며 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미간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을 풀었다.

“······괜찮네. 전혀 구상하지 않았던 라바나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제법 그럴 듯 하고.”

그 말에 스토리를 만들었다던 기우라는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굉장히 기뻐하는 눈치다.

“내가 좀 알아볼게. 이런 만화가 그냥 묻히는 건 내게도 좋은 게 아니니까.”

“그렇다는데?”

이대봉이 그렇게 말하고는 네 사람을 돌아보자 모두가 폴짝거리며 좋아한다.

“정말, 이 만화가 출판 되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장담할 수 없어요. 일단 제 담당 편집자분과 이야기를 해봐야 하니까.”

“설마 소, 소년 히어로요?”

“어머, 일본잡지에요?”

“네. 하지만 소년 히어로엔 어려울 겁니다. 저 혼자만을 위한 잡지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아닌 일본에서 데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니까요.”

가문의 영광까지야.

하기야 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의 일본이랑 내가 살던 미래의 일본은 급이 다르긴 하지. 야구로 치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

“애들 실력 어때?”

차로 돌아가는 길에 이대봉이 운전을 하면서 내게 물었다.

“어. 괜찮았어. 물론 작업속도를 확인하지 않은 건 마음에 걸리지만.”

완성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작업이 꾸준하지 못하고 속도도 느리다면 저 6편이 그들의 시작이자 끝이 될 수도 있는 문제기 때문이다.

“속도는 좀 느리긴 한데, 그 점은 생각해 둔 방법이 있어.”

“뭔데?”

“너희 화실에 가끔씩 견학 보내는 거.”

“아.”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다.

선희의 속도를 넘사벽이라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어시들과의 교류를 한다면 속도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으니까.

물론 스스로 그만큼 배우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걔네들 그동안 정말 열심히 했거든. 어떻게든 만화가가 되고 싶어 하는 애들이었는데, 너도 알겠지만 지금의 한국만화계인 신인들이 설 자리가 거의 없잖아. 대부분 대본소를 통해 데뷔하는 것도 그렇지만 기존의 기성작가들이 모두 장악하고 있어서.”

그건 이대봉의 말이 맞다.

아직은 만화잡지라고 해봐야 보물성이 유일하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하는 신인응모도 거의 없는 편이고.

일본 잡지사들처럼 공격적으로 신인을 등용하는 분위기와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러다보니, 그나마 잡지에 자리가 생기는 것도 거의 인맥위주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아무튼 지금은 재능이 있어서 기회가 없다는 게 한국의 가장 큰 문제다.

“그래서 내가 발바닥에 땀나도록 돌아다녀서 만난 애들이야. 실력은 있는데, 기회가 없어서 빛을 보지 못하는 애들.”

“그럼 역시 그 사무실은 형이 구한 거구나.”

“뭐, 그렇지.”

의외다.

이대봉이 이런 일까지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째 인간이 달라 보이네.

“왜, 날 다시 봤어?”

눈치가 너무 빨라도 정 떨어진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 그런데 그 ‘스튜디오D’에서 D는 뭐의 약자야?”

“그거? 드림. 어때 멋지지?”

“드림? 예상이 빗나갔네.”

“뭘 생각했는데?”

“대봉의 D라고 생각했거든.”

“뭐?”

이대봉이 황당해 하며 날 쳐다봤다.

“앞을 보라고, 앞. 사고 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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