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88화 (288/425)

삼사라 멀티버스 (1)

어둠이 깔린 저녁.

2층의 테라스에서 쌀쌀한 공기를 마시며 어깨엔 얇은 모포를 뒤집어 쓴 채 앉아있었다.

가로등도 그리 많지 않아 집 담 너머의 모습은 어둡기만 하다.

물론 집에 켜진 불빛들이야 많이 보이긴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들어 있었다.

걱정하던 신작도 생각이상의 관심을 받으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고, 기존의 완결된 삼사라도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덕분에 지금 통장엔 돈이 미어터지는 상황이다.

예전에 나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거기다 매달 들어오는 액수가 엄청나서 볼 때마다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 정도다.

책 판매도 엄청나지만 그거 외에 들어오는 돈도 어마어마하다.

소설, 캐릭터 팬시, 프라모델 등등.

지금은 일본의 경기가 사상 최고 시점이고, 상대적으로 한국과 차이가 많은 시절이다 보니 물가까지 생각하면 액수는 상상초월이나 다름없다.

써니는 만화가로서, 나는 스토리 작가로서 아직은 일류라곤 하지 못해도 꽤 괜찮은 수준의 명성도 가지고 있으니, 어찌 보면 이룰 건 다 이룬 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슬 고인물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뭐, 고인물도 나쁘지는 않은데······.

이대로는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내가 원래 이렇게 야망이 큰 인물이 아니었는데, 뭐가 더 부족한 거지?

냐아앙.

그때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잡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소리기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앉아있는 테라스의 오른쪽 구석자리 난간에 백설기가 올라가 하품을 쩍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뭘 생각하는지 나처럼 2층에서 밖을 보며 멍하게 있다.

그 모습을 보며 히죽 웃었다.

“왜 날 이곳으로 데려온 거야?”

백설기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밖을 보고 있다가 곧 난간에서 뛰어내려 2층 아래에 있는 작은 지붕 위를 어슬렁거리며 걸어간다.

하기야, 저 녀석이 대답해 줄 리는 없겠지.

“누가 데려왔다고?”

그때 뒤에서 경희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는 들고 왔던 커피를 내게 내밀었다.

“자, 이거.”

“땡큐.”

“그런데 누구랑 얘기한 건데?”

“아, 백설기.”

“어? 어디?”

“저기로 갔어.”

커피를 홀짝거리며 녀석이 사라진 방향으로 턱짓했다.

“그 몽실몽실한 털을 꽉 만져보고 싶었는데.”

경희가 백설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손을 조몰락거리며 그렇게 말하다가 곧장 내 쪽으로 돌아본다.

“그런데, 오빠를 데려오다니? 어디? 여기?”

“뭐, 그렇지.”

백설기를 따라 테라스로 온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 좋겠지.

“백설기랑 많이 친해졌네.”

아직 친해지진 않았다.

뭔가 저 녀석은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이라.

“그런데 혼자 여기서 뭘 해? 스토리 구상?”

“뭐,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다른 거? 혹시 여자? 애인?”

“뭐라는 거야? 내가 여자를 언제 사귀기나 했냐?”

“에이, 또 왜 그래? 예전엔 여자 많이 만났잖아.”

“내가?”

그 말에 경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발뺌하는 것 좀 봐? 오빠 예전엔 완전 바람둥이였잖아.”

“바······ 람둥이?”

“그래. 뭐, 대부분 불량해 보이기는 했지만, 물론 남자는 더 많았었고.”

“······.”

역시 문제가 좀 많았던 놈이었군.

그나저나 여자 친구가 많았다라, 어째 그것도 그거대로 부럽다는 기분이네.

“그래도, 지금의 오빠가 훨씬 좋아.”

경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잠시나마 본체를 부러워했는데, 그런 내 속마음을 알았다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리고, 선희의 저런 밝은 모습도.”

“······.”

“엄마도, 언니도. 모두 지금 가장 행복해 하고 있으니까. 나도 그렇고.”

정말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이대봉의 자동차를 타고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라디오 음악소리에 맞춰 휘파람까지 불고 있다.

“오랜만에 드라이브 하니까 좋지?”

이대봉의 질문에 창밖으로 시선을 향한 채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네.”

“이 참에 너도 차 한 대 사라. 돈도 많은 녀석이.”

“급하면 택시타면 되잖아. 운전도 얼마나 피곤한 일인데. 남이 운전해주는 거 타는 게 제일 속편하지.”

“젊은 애가 무슨 그런 생각을 해? 나이든 사장님 같잖아.”

“좋은 게 좋은 거지.”

“으이그, 그러니?”

그렇게 말하며 히죽거린다.

“그런데 정말 어디로 가는데?”

쉬는 날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신 만두를 먹으며 뒹굴 거리고 있는데, 이대봉이 찾아와서는 ‘이렇게 날도 좋은데, 집에만 있으면 뭐하니? 나랑 같이 나가자.’라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오긴 했는데 말이지.

“다와 가니까 궁금해도 조금만 기다려.”

“딱히 궁금한 건 아니고. 그래도 어디 가는지는 알고 싶어서.”

“뭐, 새우 잡이로 팔아먹을 건 아니니까, 너무 겁먹지는 마.”

“아는 새우 잡이 선원은 있고?”

“아는 선장님 몇 분 있기는 해. 왜, 소개해줘?”

“······.”

이 인간의 거미줄 같은 인맥은 어디까지 일까.

그러다가 차를 도로변에 세운다.

여긴가?

“잠시만 기다려.”

“어디 가는데?”

“여기 앞 치킨 집. 몇 마리 사려고.”

“······.”

그렇게 말하고는 차에서 내려 도로변 치킨 집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누런 종이봉투를 담은 비닐 주머니 두 개를 들고 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뒷자리에 놔두고는 다시 차를 출발 시켰다.

“양념 하나, 후라이드 하나. 엄청 좋아하거든.”

“누가?”

“아는 애들.”

그렇게 말 하고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한참 이태원 시내를 달리다 어느 순간 이대봉의 승용차가 커다란 건물의 지하로 들어간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구석 자리에 차를 세우더니 시동을 껐다.

“자, 내리자.”

내가 조수석 문을 열면서 묻자 밖으로 나간 이대봉이 뒷자리에서 검은 봉지 두 개를 꺼내고는 내게 하나를 내밀었다.

“하나는 네가 들어줘.”

얼떨결에 받아들고는 곧장 이대봉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는 1층에 올라가자마자 엘리베이터를 탔다.

6층의 버튼을 누른 이대봉이 실실 웃었다.

“여기 제법 전망이 좋다.”

“그래?”

무슨 상황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뭐 올라가보며 알겠지.

설마, 아는 선장님한테 날 넘기기야 하겠어?

잠시 후 6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자 이쪽으로.”

그렇게 말한 이대봉이 앞장선다.

철로 만들어진 문들이 쭉 이어진 통로.

전형적인 오피스텔의 느낌이다.

아무 말 없이 이대봉을 따라 걷는데, 어느 순간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여기야.”

“······?”

고개를 들어 문을 살폈다.

문 위엔 영어로 [Studio D]라고 적혀있다.

스튜디오 D?

갑자기 떠오른 건 이니셜D 이긴 한데.

설마 그거랑은 관계없을 거고.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딩동.

이대봉이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야, 제임스.”

“어머!”

뭔가 반가워하는 음성이다.

역시 이대봉은 어디를 가나 인기가 많구나.

이 인간 전국에 이런 식으로 이어진 인맥이 정말로 얼마나 될까?

문이 열리더니 포니테일로 묶은 자그마한 체형의 귀염상인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임스 오빠!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제임스에게 턱 안긴다.

엌!

여자친구?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흠칫하고 놀랐다.

“야, 떨어져라, 떨어져. 얘가 오해하겠어!”

여자 친구가 아닌가?

아무튼 이대봉의 말에 그제야 날 돌아본 여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본다.

“이분은 누구신데?”

“아,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

그 말에 여자가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가장 아끼······. 난?”

“너도 아끼지.”

그렇게 말하며 여자의 머리를 스담스담 해 준다.

그 때문인지 배시시 웃던 여자가 날 다시 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말하더니 문을 활짝 열어주며 얼른 들어오라고 한다.

나도 마주 인사를 하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널찍한 실내가 보인다.

10평 정도의 사무실로 보이는 실내.

책상이 여섯 개 정도 놓여있고, 그 중 세 개의 책상에 남자 둘, 여자 한명이 앉아있다.

슬쩍 둘러보니, 벽에 붙은 만화도 그렇고.

아무래도 만화를 그리는 화실의 분위기다.

누구의 화실이지?

그런데 그때 앉아있던 세 명이 우리 쪽을 보더니 곧 표정이 밝아졌다.

“어, 제임스 형!”

“맛있는 거 사왔어요?”

“오랜만에요, 오빠.”

사람들 이대봉을 살갑게 반긴다.

“응, 모두 잘 있었니? 그리고 넌 나만 보면 맛있는 거 찾더라. 설마 요즘 밥이라도 굶니?”

“에이, 그럴 리가요. 그냥 인사죠, 인사.”

그렇게 말하며 이대봉의 손과 내 손에 들려있는 검은 봉지를 보며 희망의 섞인 표정을 지어 보인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표정이다.

그 모습들을 본 이대봉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너희들은 나보다 이게 더 반가운 모양이네.”

“절대 아니에요.”

“맞아요. 먹을 거를 반가워한다니 절대 그럴 리 없잖아요.”

“그래? 그럼 이건 다음에 먹기로 하고.”

“안 돼!”

“왜 그래요, 정말. 먹는 걸로 그렇게 놀리면 안 되죠.”

이성을 잃은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이대봉이 낄낄거렸다.

“그럼 그렇지. 이것들이 정말.”

그렇게 말하며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내가 들고 있던 봉지와 함께 내려놓았다.

그러자 이곳에 있던 모두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햐, 냄새 좋다. 얼마만이니 이게.”

“그러게. 오랜만에 고기를 보니까 막 정신이 하나도 없어.”

문을 열어줬던 여자애가 비닐을 뜯었다.

“오빠랑 손님도 드세요.”

“우리는 괜찮으니까, 너희들이나 많이 먹어.”

이대봉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머리 잃고 온몸이 분해된 두 마리의 닭에 흉포한 포식자들이 달려들었다.

굶지는 않는다더니, 반응이 왜 이렇게 격렬한지.

뭐, 나름 익숙한 풍경이기는 한데.

우리 집에도 저렇게 걸신들린 애가 둘이나 있으니.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두 마리의 닭들은 뼈만 남기고 네 명의 몸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짓는 네 명의 남녀.

“이야, 고기가 그렇게 반가웠니?”

“네. 요즘 통 고기를 못 먹었거든요.”

“일하는 곳에선 월급도 안주니?”

“안주는 건 아닌데, 생활비로도 빠듯하거든요.”

그렇게 대답한 남자가 날 슬쩍 쳐다보다가 다시 이대봉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세요?”

“아, 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생.”

아, 진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그런 눈빛으로 인상을 팍 쓰며 쳐다봤더니 이대봉이 슬쩍 시선을 피한다.

“오빠가 저런 표정으로 가장 좋아한다는 말은 잘 안하는데. 누군지 궁금하네.”

“그러게.”

그렇게 말하며 여자 두 명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야, 너희들 초면에 실례잖아.”

같이 있던 남자의 말에 여자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멈춘다. 하지만 눈이 웃고 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이대봉이 혀를 찼다.

“그나저나 너희들은 열심히 하고 있는 거니? 두 명은 또 왜 없어?”

“아, 걔들요. 오늘도 작업이 있어서 못 왔어요.”

“맞아요. 화실 일에 뭐 휴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우리야 뭐 회사나 공장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저녁이나 휴일에 올수 있는 거지.”

말하는 걸 보니까, 여긴 프로 만화가의 화실이 아니라, 아마추어 만화동아리인 모양이다.

그때 여자 한 명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오빠.”

“왜?”

“우리 정말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거예요?”

일이라니?

무슨 일?

“얼마나 작업했어?”

“그럼요. 한번 보실래요?”

“그래, 가져와봐.”

그러자 여자 한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후다닥 책상으로 달려가 원고 뭉치를 들고 다가왔다.

“여기요.”

그렇게 말하며 이대봉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이대봉이 종이를 쭉 훑어본다.

이내 만족했는지 머리를 몇 번 끄덕이다가 나에게 원고를 내밀었다.

“한 번 봐 볼래?”

“내가?”

“그래. 너랑 관계있거든.”

그 말에 여자 한명이 의아한 얼굴로 날 보고는 이대봉에게 물었다.

“이 분이 누구신데요?”

하지만 이대봉은 대답대신 날 쳐다볼 뿐이다.

도대체 이게 뭐 길래.

그리고 이대봉이 내민 원고뭉치를 내려다봤다.

역시 예상대로 만화원고인데, 이게 익숙한 풍경과 캐릭터가 보인다.

“어?”

익숙하다 했더니 이거 삼사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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