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81화 (281/425)
  • 머신건 잭 (4)

    선희가 콘티용 연습장을 꺼내자 방금 떠올렸던 이야기를 천천히 디테일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초반에 등장하는 탱크의 모습을 여러 각도로 보여줘. 그리고 탱크의 체인부분이 약간 헐거웠으면 좋겠고.”

    그 말에 선희가 콘티 속 탱크의 러프스케치를 그려 내게 보여준다.

    “이렇게?”

    “음, 조금 더 위태한 느낌. 아슬아슬해서 누가 봐도 오래는 못 버티겠다는 느낌으로.”

    그러자 다시 고쳐서는 또 보여준다.

    “그럼, 이렇게?”

    “이거 좋다. 그리고 위엔 덜컹거린다는 느낌을 살리고, 그 와중에도 느긋하게 잠들어 있는 잭의 모습과 몽의 모습. 특히 음료수를 흘리지 않게 균형을 잡는 모습도 좋고. 팔을 이렇게, 이렇게.”

    내가 흔들림에 중심을 잡는 몽의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주자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머리를 갸우뚱한다.

    “왜?”

    “난 그거보다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하며 내 행동과 조금 다른 리듬으로 균형을 잡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도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럼, 이런 식으로는 어때?”

    “난 이런 식이 더 좋은데.”

    선희가 그림을 그리다말고 이런저런 동작을 하고, 곁에서 나도 묘한 동작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어느 샌가 주변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렸다.

    “둘 다 뭐하니?”

    이대봉이 히히거리며 물었다.

    그제야 나도 우리 모습이 좀 괴상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행동을 그만뒀다. 사실, 동작이야 어떤 걸 선택해도 비슷할 테고, 이 동작 하나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하지만, 선희는 뜻을 굽히지 않고는 다시 물었다.

    “내가 생각한 걸로 할게.”

    묘한 고집을 피우는 선희를 보며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 그래. 네 생각대로 해.”

    그 말에 선희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잽싸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러프스케치나 다름없는 콘티였음에도 느낌은 상당히 살아있다.

    이정도면 이대로 펜선을 입혀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물론 평소 선희의 그림에 비하면 디테일이 너무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느낌은 살아있어서, 이건 이거대로 괜찮은 느낌이다.

    최근 들어 이렇게 간단하게 그리는 콘티마저 엄청나게 퀄리티가 높아져 있었다.

    안 그래도 그림천재인 선희가 허구한 날 그림만 그리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첫 화라는 것 때문에 사소한 장면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 설명했고, 그런 내 말을 들으며 선희는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바이크를 타고 쫓아오는 악당들의 복장이나 무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동안 샘플로 그려왔던 그림들을 참고하면서.

    “도시는 어떤 걸로 해?”

    선희의 물음에 도시그림들을 살펴봤다.

    사막도시도 간단하게나마 십여 개를 미리 그려놨기 때문에 그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이걸로.”

    “방향은?”

    “이쪽, 동남쪽에 있는 거. 지도상으로 보면 여기에 있는 도시야.”

    “알았어.”

    선희가 내 설명을 들으며 콘티를 그려나갔다.

    말풍선을 만들고 대사를 넣긴 했지만, 이 부분은 차후 원고 작업 전에 조금 수정하게 될 것이다. 아직은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라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리 제대로 된 설정을 모두 만들어 놓고 가지 않는 건 그때그때 괜찮은 아이디어를 적용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또 장편에 유리하기도 하고 초반 설정에 너무 매몰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아무튼, 흥미 있는 사건을 중심으로 가볍게 진행할 계획이지만, 그래도 만화의 배경이 되는 배경은 창조해야 하는 상황이라 콘티와 함께 설정도 계속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다.

    더불어, 연재의 경우엔 절망의 페르소나가 완결된 이후, 천천히 진행할 예정이다.

    그렇게 첫 화의 콘티를 완성 한 뒤 한 번에 쭉 읽어봤다.

    이야기란 흐름이 중요한 법이라 장면, 장면을 가볍게 넘기면서.

    그렇게 쭉 읽어보니 가벼우면서도 꽤나 흥미 있는 이야기가 된 느낌이다.

    그다음엔 화실 사람들에게 돌아가면서 보여줘 봤다.

    “삼사라에 비해 아기자기한 느낌이에요. 대사도 가벼워서 쉽게 읽히고요.”

    “저도 재밌어요. 하지만, 삼사라의 팬들에겐 이게 지나치게 가볍다는 느낌이 강할 텐데, 괜찮을까요?”

    “난 좀 달라. 이건 삼사라 시리즈가 아니니까 기존의 삼사라 팬들에게만 집중하는 건 좋은 게 아닌 것 같아. 아마 선생님도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그래도 삼사라나 다크 프린세스 같은 스타일이랑 많이 달라서 어떤 반응이 올지 조금 무섭네요.”

    어시들이 제각각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이제 겨우 첫 화, 그것도 콘티만으로 결론을 내는 건 무리다. 일단 한권분량정도 연재가 되어야 판단할 수 있겠어.”

    실버는 좀 더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하기야, 애초에 계산이 장편이니까, 길게 봐야 하는 건 맞는데, 그래도 주간 연재다보니까, 계속 반응이 시원찮게 되면 결국 장편으로 끌고 갈 수 없게 된다.

    물론 그동안 성과가 있고, 아직도 연재를 하고 있는 작품이 있으니, 잡지사에서 좀 더 기회를 줄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다른 거 다 제쳐두고 작품만 본다면 괜찮다는 건 공통된 의견이었다.

    다음날.

    푹푹 찌는 오후쯤에 지로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화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며 들어온 지로가 에어컨 앞으로 다가가며 ‘이제야 살겠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긴 정말 부럽습니다. 이렇게 쿨러, 아니 에어컨이 빵빵하니까요.”

    “출판사엔 에어컨 없어요?”

    “있긴 있는데, 평소엔 그냥 선풍기로 대신하고 있죠.”

    “아.”

    어시 중 한명이 납득했는지 머리를 끄덕인다.

    “하긴, 저희 화실은 겨울도 그렇지만, 여름엔 천국이에요. 그냥 여기 있는 게 휴가니까.”

    “아, 그런데 올해는 휴가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지로가 나를 보며 물었다.

    “뭐, 8월초에 일주일동안 휴가를 계획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전에 단체로 근처 계곡이나 갈까 생각중이고요. 가족을 동반하셔도 되고요. 작은 전세버스를 이용해 갈 예정입니다.”

    이미 화실어시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가족을 참여하기 힘든 경우엔 친한 친구 한두 명도 괜찮다고 했더니, 모두 기대하고 있다.

    뭐, 그날엔 먹을 것도 잔뜩 준비해서 계곡에서 놀고, 근처 민박을 얻어 하룻밤을 보낼 계획이다.

    “아, 부럽습니다. 저흰 너무 바빠서 휴가라고 해봐야 3일이라서. 그것 때문에 7월말엔 소년 히어로 합본 호를 낼 예정이고요.”

    그렇게 잡다한 얘기를 나누며 땀을 식힌 지로가 먼저 새로운 연재 예정인 ‘머신건 잭’의 설정 그림들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이번엔 삼사라와 달리 설정에 대한 준비를 좀 많이 한 덕분에 살펴볼 것이 상당히 많아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다.

    대략적인 것은 설정 스케치와 함께 설명이 곁들여 있다.

    하지만 분량이 만만치 않아서 그것만 훑어보는 대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한참을 살펴보던 지로가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삼사라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 같아 보이는데, 혹시 작업 중인 콘티는 있습니까?”

    “네. 여기.”

    오늘 아침까지 선희가 작업한 4화 분량의 완성된 콘티를 지로에게 내밀었다.

    “벌써 콘티 진도는 많이 나갔군요.”

    그렇게 말하며 콘티를 쭉 읽어본다. 그리고 말없이 다 읽고 난 뒤 콘티노트를 덮으며 말했다.

    “이번 건, 설정그림들을 봤을 때 느낀 것처럼 삼사라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네요.”

    “심각하지 않다는 것 말인가요?”

    “네. 그리고 이제까지 캐릭터와 달리 캐릭터에 활기가 있어요. 뭐랄까 진짜 살아있는 듯한 느낌 같은 게 있어요.”

    그때 잠자코 있던 실버가 입을 열었다.

    “그야, 진짜 인물을 기반으로 만든 캐릭터니까요. 특히 그 조크라는 녀석.”

    “아, 그래요? 누구요?”

    “가끔 오는 그 시끄러운 녀석.”

    “아. 제임스 선생님요.”

    “오, 단번에 아시는구만.”

    “네. 말씀하시니까 금방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여기 있는 이 잭이라는 인물이 뭔가 익숙해 보여서요.”

    “잭? 누구랑 말입니까?”

    실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때 지로가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곧 입을 열었다.

    “실버 씨랑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요?”

    “뭐요?”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어시들이 풋 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어리둥절해 하던 실버가 이내 날 돌아본다.

    “뭐야? 설마, 그런 거야?”

    “아, 미안. 아직 말 안했네. 실은 선희의 아이디어였거든.”

    그렇게 말하며 선희 쪽을 돌아봤다.

    그러자 이번엔 실버가 선희 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아 책상은 비어있다.

    “선희가 낸 아이디어라고?”

    “그래. 선희가 처음 그렸던 캐릭터가 형이랑 경희를 기반으로 만든 거였으니까.”

    “그럼······, 몽은 경희냐.”

    “어. 맞아. 그런데 그거 다른 사람들은 진작 눈치 챈 모양이던데, 형은 정말로 몰랐어?”

    그 말에 다른 어시들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맞아요. 저 캐릭터 일러스트만 봤을 땐 몰랐는데, 콘티 보니까, 금방 알겠더라고요.”

    “저도요. 그래서 몰입감도 좋았고.”

    “경희 양도 자신이라는 걸 금방 알던데.”

    “그 녀석은 뭐라고 하던데.”

    “재밌다고 하죠. 물론 조금 더 예쁘게 그려달라고 선희 선생님을 조르긴 했지만요.”

    그렇게 말하며 차미정이 웃는다.

    다른 어시들도 따라 웃는데, 곧 실버의 표정이 웃음을 거두고는 하던 일을 계속 한다.

    어시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실버가 다시 날 쳐다봤다.

    하지만, 이대봉에게 한 말이 있으니 불만 섞인 표정만 지을 뿐 별다른 투정은 부리지 못하는 눈치다.

    그때였다.

    “우와아, 덥다, 덥다, 덥다, 더워 죽겠어!”

    요란법석을 떨며 이대봉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지로를 발견하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오, 아카기 씨! 오랜만에용!”

    “네. 안녕하세요. 제임스 선생님.”

    마주 인사한 지로가 콘티를 살펴보는 걸 보더니 이대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 우리 윤환이와 선희의 신작 보러 오셨구나.”

    “네.”

    “어때요? 이번 거?”

    “괜찮네요. 특히 캐릭터가.”

    지로의 말에 반갑다는 듯 손뼉을 짝하고 치며 좋아라한다.

    “역시, 그렇죠. 나도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들더라니까, 특히 거기 운전사 조크. 딱 봐도 너무 정이 가잖아요.”

    그 말에 지로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네.”

    “역시 일류 편집자님도 알아본다니까.”

    “조크보다는 그래도 잭이 더 낫지.”

    불쑥 끼어든 실버의 말에 이대봉이 슥 돌아본다. 그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얜 주인공이긴 하지만, 솔직히 매력은 없지.”

    “어째서냐? 혹시 날 기본으로 만든 캐릭터라서?”

    “어? 알고 있었어?”

    그 말에 실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역시 네 녀석은 알고 있었군.”

    그 말에 이대봉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걸 눈치 못 채면 바보······.”

    “그래. 바보한테 한번 죽어봐라.”

    “아악! 갑자기 왜 그래? 나가면 더워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내게 맞아 죽던지, 아니면 나가서 쪄 죽든지.”

    “진짜, 왜 그래!”

    “네 녀석은 늘 마음에 안 들었어!”

    “나 좀 내버려 둬!”

    그렇게 다시 화실이 시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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