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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전생 만화왕-279화 (279/425)
  • 머신건 잭 (2)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일단 거대한 사막의 모습.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 너머에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

    바로 도시의 모습이다.

    하지만, 도시라고는 해도 미래인지 과거인지 불분명한 형태.

    그 도시 안에는 황당하게도 거대한 유조선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거대 유조선.

    그것 주위에 따개비처럼 붙어있는 자그마한 상점들과 창문들.

    사람들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엔 열기구로 보이는 것들이 드문드문 날아다니는 모습도 떠오른다.

    9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게임의 배경과 비슷한 느낌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자 그것을 선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유조선은 살짝 비스듬하게. 아, 참 유조선 샘플부터.”

    그렇게 말하며 각종 사진집을 모아둔 책장에서 서둘러 사진을 찾았다. 그러다가 배 관련 책자를 발견하고, 그것을 선희에게 내밀었다.

    “이걸 참고로 해서 조금 다른 형태로 그려봐. 그래야 보는 사람이 멸망한 지구의 미래라고 단정 짓지 않을 테니까.”

    “······미래가 아냐?”

    “가상의 세계인데, 미래와 과거가 혼재해 있는 그런 곳.”

    “······재밌겠다.”

    그렇게 중얼거린 선희가 살짝 혀로 입술을 핥더니 곧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연필을 이용해 시원스런 손놀림으로 사막을 단숨에 슥슥 그리더니 그 사이사이에 반쯤 파묻혀있는 기계들, 그리고 그것을 감고 있는 거친 식물 잎사귀들.

    그리고 먼 곳에 보이는 도시의 그림자.

    그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더 큰 유조선의 그림자가 묘한 대비를 이루는 모습이다.

    그렇게 사막의 모습을 몇 장 스케치해나가더니, 이번엔 도시의 모습을 그려간다.

    하지만, 내 설명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잠시 주춤하고 있다.

    하기야 이제까지 그리던 배경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이니, 쉽게 떠오르진 않겠지. 거기다 이 시절엔 지금의 스케일을 제대로 표현해줄 영화나 게임도 거의 없었고.

    물론 미국 만화 잡지나 할리우드 SF영화 설정집을 일본에서 구해온 게 있긴 하지만,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내겐 조금 부족하다.

    그래도 참고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니, 일단 설명과 함께 화학, 철강공장의 사진들을 참고해 만들기 시작했다.

    아직 구체적인 스토리가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떠오르는 것을 위주로 계속 주문을 넣었다.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는 시장.

    거대한 도마뱀을 동강동강 해서 파는 가게.

    선인장 주스가게.

    타조 비슷한 큰 새의 털을 다 뽑아서 진열해 놓은 가게.

    반짝거리는 돌을 장신구로 파는 가게.

    각종 사막과일을 파는 가게 등등.

    아랍인과 중세유럽인들을 섞어놓은 듯한 복장들의 사람들.

    그렇게 떠오르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지만, 선희는 그것을 하나하나 구체적인 형상으로 만들어낸다.

    뭐랄까.

    마치 내 말을 듣고 그것을 현실처럼 그림으로 완성해가는 미래의 A.I 슈퍼컴퓨터 같은 기분도 든다.

    그것도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퀄리티로 뽑아내는 능력을 가진.

    둘이서 대화를 시작한지 두어 시간 정도 되었을 땐 이미 수십 여장의 스케치가 선희의 책상위에 쌓여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만 너무 신났구나 싶어서 열심히 그리는 선희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좀 쉬었다가 하자. 그런데 선희 너, 그 손은 괜찮아?”

    “난 괜찮은데.”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리고는 괜찮다는 듯 이리저리 휘적휘적 거린다.

    “그래도 좀 쉬자. 손을 너무 혹사시킨 것 같으니까.”

    “응. 알았어.”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야 나도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화실식구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우리가 작업을 멈추자 모두가 눈을 반짝였다.

    “이거 뭐예요? 신작인가요?”

    박소미의 말에 내가 머리를 삐딱하게 만들고는 콧등을 긁었다.

    “글쎄요. 일단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주변 설정부터 만들고 있는 거에요.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서 신작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어요.”

    그러자 이번엔 쌓여있는 스케치그림을 기웃거리던 김기철이 입을 열었다.

    “배경의 느낌이 너무 좋아요. 기계가 잔뜩 있는 이런 마을. 저도 이런 건 그려보고 싶어요. 확정되면 제가 그려도 되죠?”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김달부도 끼어들었다.

    “기계라면 제가 전문입니다. 정밀한 기계가 많이 등장하려면 제가 더 유리해요.”

    “아, 달부 형. 이건 저에게 양보하시면 안 돼요? 너무 그려보고 싶은데.”

    “이건 나도 도전해보고 싶어.”

    이 양반들이 아직 연재를 결정한 이야기도 아닌데.

    하지만 처음부터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부분이라 내가 결정을 내렸다.

    “아직 연재가 확정된 건 아니지만, 일단 결정이 된다면 이번엔 기철이에게 시켜보고 싶네요.”

    내 말에 김기철은 주먹을 꽉 쥐며 좋아라하고, 김달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쉬워한다.

    특별히 추가급여를 더 지급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로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아무튼 새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인지, 모두의 반응이 뜨겁다.

    특히 삼사라가 끝나고 곧장 시작했던 만화가 절망의 페르소나였기 때문인지, 또 암울하고 현실적인 만화를 그릴까봐 걱정했다는 얘기도 한다.

    박소미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선생님의 스토리에 참견하고 싶은 건 아니고요. 그냥 절망의 페르소나 원고 그릴 때 너무 마음이 아팠거든요.”

    “맞아요. 저도 그랬는데.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그래도 마지막엔 희망의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혹시라도 마지막 이야기는 선생님이 바꿔주길 기대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결국은······.”

    차미정도 박소미의 말에 동조하더니 말끝을 흐렸다.

    뭐, 꿈도 희망도 없는 얘기로 끝났다는 얘기겠지.

    “······.”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배경이 일본이고, 주 독자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일본인의 입장에서만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림을 그리던 어시들도 주인공이 겪은 고통을 함께 느꼈다니.

    내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날 보던 성준희가 웃으며 말했다.

    “이번 만화는 좀 밝은 내용이니?”

    “뭐, 일단은 가벼운 이야기로 하고 싶기는 한데, 아직 스토리는 생각해놓은 게 없어.”

    “그럼 아무런 이야기도 만들지 않았다는 거니?”

    “그렇지.”

    애초에 선희가 그렸던 두 사람의 스케치를 보고 떠오른 것을 그냥 그림으로 그리게 한 거니까.

    그때 그림 한 장을 관심 있게 쳐다보던 박소미가 날 보며 말했다.

    “여기, 날아다니는 기구도 있네요. 그런데, 이거 마치 상점처럼 보이는데.”

    “맞아요. 하늘을 나는 상점이죠. 여기 운전하는 노인은 필요한 사람들이 신호를 보내면 지상으로 착륙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기구는 바로 전당포죠.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거나, 물건을 맡기고 금이나 은으로 바꿔가는 곳. 조그마한 은행 역할도 합니다.”

    내 말에 박소미가 호들갑을 떨었다.

    “와, 움직이는 은행인가요?”

    “찾아가는 서비스죠.”

    어디선가 들었던 광고문구가 생각나서 떠들었다.

    “찾아가는 서비스? 와 뭔가 좋은 느낌이네. 이런 건 좀 앞서가는 느낌이군요.”

    그렇게 말하던 박소미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거 매드맥스처럼 무법천지 세상 아니에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어시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렇겠다. 사막 한가운데서 공격당해도 방법이 없겠어요.”

    “날아가는데 총을 쏠 수도 있잖아요.”

    “에이,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어떻게 생각해요. 만화니까 좀 가볍게 생각하면 되지.”

    하지만 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눈에 띄게 허술하면 안 되죠. 일단 이 부분은 생각하고 있는 부분도 있어요. 그리고 이런 세상에 치안까지 잘 되어있다는 건 좀 이상하니까.”

    “그럼 이 노인의 가게는 위험한 거 아니에요? 혹시라도 착륙했을 때 도적으로 돌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노인의 가게엔 나름 방어설비를 해놓을 생각이에요. 아직 구체적인 건 준비하지 않았지만.”

    그 얘기를 듣던 김달부가 끼어들었다.

    “흐음. 이러다가는 노인의 가게 설정하나만 잡는데도 한참이 걸리겠어요.”

    그 말에 어시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맞네요. 사공이 너무 많아서 선생님께서 혼란스럽겠다.”

    “그러게.”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다.

    무슨 대작게임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초반부터 설정에 목을 맬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아까부터 종이 한 장을 계속 뚫어지게 바라보던 실버의 시선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내게로 향했다.

    뭘 보고 있나했더니 가장 먼저 그렸던 주인공 두 사람의 캐릭터를 보고 있었다.

    이 캐릭터의 중 덩치 큰 남자가 실버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실버가 그림을 내게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이 두 명이 주인공이냐?”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아마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

    “음, 뭐랄까 조합이 좀 부족해 보이는데.”

    “조합? 무슨 조합?”

    “이 둘의 복장이라든가, 지금 그려놓은 배경설정을 보면 사막을 떠돌아다니는 캐릭터 같은데. 맞냐?”

    “뭐, 대충은.”

    물론 단순히 떠돌아다닌다는 설정보다는 목적을 부여하려고 계획 중에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계획이 뭐냐면, 아직 생각해 둔건 없다.

    그래도 그냥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막을 걸어 다니는 건 좀 비현실적이다.

    “이동수단을 생각하고 있어. 현대의 차들처럼 효율적인 건 아니고, 마차와 자동차 중간 정도의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걸로. 아무튼 이 여자아이는 그래서 기술자로 생각해뒀어. 뭐든 고친다는 것으로.”

    “그렇다면 이 덩치는 싸움 같은 걸 담당하는 거구만.”

    “그렇지.”

    “그렇다면 더욱 부족한 느낌이야. 사막에서 이동하는 것만 생각하면 안 되지. 살아남기 위해선 음식을 구하거나, 사람들과 대화를 잘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말이야.”

    그 말에 내가 손가락을 딱하며 오버스럽게 튀겼다.

    “오, 그것도 그러네.”

    모처럼 실버가 좋은 아이디어를 줬다.

    그런데 내가 보인 반응 때문인지 실버가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인다.

    “이 두 사람의 부족을 매워줄 수 있으려면 성격도 좀 외향적인, 그러니까 지리에 밝으면서 사람들과 친분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하겠네요.”

    김기철의 말에 모두가 머리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런 캐릭터가 함께 있다면 괜찮은 조합 같아 보이네.”

    “역시 외향적이라면 수다스러운 스타일이겠지?”

    “그래.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는 성향.”

    “남녀 구분 없이?”

    “그래. 남녀 구분 없이.”

    “오, 그런 캐릭터라면 좋다.”

    “이 세 명을 모아놓으면 이야기가 막 진행될 것 같기도 하다.”

    “맞아요.”

    그런데 그때 이야기를 듣던 실버가 묘한 표정으로 눈을 좁혔다.

    “왜 그래?”

    내 질문에 표정을 계속 굳히던 실버가 입을 열었다.

    “뭔가 떠오르는 인물이 있긴 한데······.”

    “그래?”

    그때였다.

    “어? 다들 모여서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오?”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런 모두의 시선을 받은 이대봉이 안으로 들어오다 멈칫했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한 눈빛을 하며 모두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왜?”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아, 찾았네요. 그런 캐릭터.”

    그때 실버가 그런 이대봉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찾았군.”

    “······왜, 왜 그래?”

    이대봉이 눈알을 데굴거리며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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