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78화 (278/425)
  • 머신건 잭 (1)

    아침 시사관련 라디오에서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올해 가장 돈을 많이 번 회사가 어딘 줄 아세요?

    - 글쎄요. 그게 어디죠?

    - 최루탄을 만드는 회사랍니다.

    - 아.

    라디오에서 나오는 얘기가 납득이 간다.

    요즘들어 더 치열해지는 시위 때문에 시내에 나갔다가 최루탄 냄새를 경험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 냄새가 의외로 익숙하다는 것에 놀랐다.

    그렇다고 내가 뭐, 시위경험자라는 뜻은 아니고.

    그냥 군대에서 겪었던 기억 때문에.

    6방 출신인 지금의 내가 아닌, 미래의 군대에서 경험한 훈련, 바로 화생방훈련 때 겪었던 그 거랑 거의 같은 느낌이었다.

    따갑고, 괴롭고, 눈물 나고.

    이런 걸 설마 밖에서 다시 경험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아무튼 이렇듯 이래저래 혼란한 시대이긴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세상은 굴러가고 있었고, 또 멕시코월드컵이 방송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새벽에도 응원하느라 동네마다 들썩거릴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결과적으론 최초의 1승과 16강의 염원이야 물 건너가긴 했다. 물론 강팀을 상대로 선전했다는 아쉬움을 위로하면서.

    하여튼, 그렇게 시끄럽던 월드컵도 끝이 나고 모처럼 조용해진 7월이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우중충하더니, 급기야 소나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장마기간이라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는 시기긴 하지만, 모처럼 더위를 식혀주고 있어서 나쁘지 않다.

    창문을 모조리 열어둔 화실의 마루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며 소년 히어로를 보고 있으니 이거야 말로 낙원이구나 싶기도 하다.

    권두 컬러로 등장한 첫 번째 만화는 키도의 만화인, 진심의 남자다.

    체르노빌로 배경을 옮긴 진심의 남자는 특유의 황당함과 열혈로 다시 재미가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솔직히 이걸로 무슨 이야기를 만들까 싶었는데, 나름 현실적이면서 꽤나 담은 뜻이 많아 놀랐다.

    주인공 키시 야마토가 나름 체르노빌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도 그렇고, 경쟁심 때문에 얼떨결에 따라온 치바 료 역시도 멍청한 정부사람들과 싸우며 사람들을 돕는 장면이 인간적이면서도 꽤나 감동적이다.

    특히, 중간에 민간인들이 가족을 위해 체르노빌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목숨을 거는 장면은 오히려 신성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실제 어느 정도까지 조사를 한 건지는 모르지만, 가장 명장면이 아닌가 생각된다.

    “키도 형, 많이 발전했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뒤적거리다 절망의 페르소나에서 또 멈췄다.

    이제는 절망의 페르소나도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가족을 잃어서 반쯤은 포기한 기분으로 시작한 싸움이었지만, 동료들과 그를 따르는 여자의 등장으로 미묘하게 생각의 변화를 겪는 주인공.

    현재도 끊임없이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는 원자력발전소.

    도무지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현실과 그런 현실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진행 중이다.

    그 때문인지 이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 될지 궁금해 하는 팬레터가 자주 편집부로 날아든다고 한다.

    만화니까, 그래도 뭔가 해결책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지 않겠냐라고 하는 모양이다.

    나도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절망의 페르소나는 처음부터 실제 일을 배경으로 삼고 만든 만화니까, 그런 건 없다.

    방사능을 완전히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은 내가 살던 미래에도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이런 일이 발생하면 희망 따윈 없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만화였으니,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보는 사람이 결정할 문제다.

    물론, 독자에게 이런 것을 강요하는 것은 작가로서 할 짓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덕분에 알게 모르게 욕도 많이 먹는 편이긴 하지만.

    아무튼 선희도 이미 원고를 다 완성한 상황이고, 그 원고들은 다 출판사로 보낸 상태다.

    그래서인지, 늘 바쁘던 선희도 요즘엔 좀 한가해 보인다.

    물론 메인 만화가가 한가한 상황이니, 화실 전체가 한가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나저나 나도 이제 슬슬 신작준비를 해야 할 텐데.

    특별히 떠오르는 이야기가 없어서, 요즘은 매일 이렇게 뒹굴 거리고 있는데.

    그냥 계속 이렇게 뒹굴 거리며 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렇게 지내면 분명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다.

    “후우.”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비오는 밖을 바라보는데, 그때 밖의 대문이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우산을 다시 펼치며 후다닥 마당으로 달려 들어오는 모습과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오는 노란색 복장.

    “저희 왔어요!”

    경희가 거실 문을 열고 입구에서 우산을 접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뒤에는 선희가 따라 들어와서는 노란색 비옷을 벗더니 화실 식구들에게 머리를 꾸벅하며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오늘 시험이라고 빨리 마쳤나보네요.”

    “네. 그런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신발 다 젖었어요. 뭐, 집에서 갈아 신고 왔지만.”

    그렇게 말하며 뭐가 좋은지 히죽거리며 웃는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있던 나를 보더니 쪼르르 다가와서는 물었다.

    “오빠, 뭐 먹을래? 가져다줄까?”

    “아니, 괜찮아. 그나저나 밥은?”

    “아직. 여기서 먹으려고. 집엔 먹을 게 없어서.”

    “아까 상식이 형이 크림빵 사온 거 있으니까, 그거 먹어.”

    “오예!”

    그렇게 폴짝거리더니 선희를 붙들고는 같이 부엌으로 달려간다.

    “야, 바닥 꺼질라, 살살 걸어!”

    내가 소리치거나 말거나 둘은 좋다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빵이다! 빵!’을 소리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고는 느긋하게 마룻바닥에 누웠다.

    그런데 머리에 부드럽고 몰캉거리는 털이 느껴진다.

    어? 배게인가?

    싶어서 턱 머리를 얹었더니, 갑자기 귀를 찌르는 소리가 들린다.

    냐앙-!

    “아야야야얏!”

    조그마한 털 뭉치 앞발이 내 머리를 탁탁탁 두드린다.

    몸을 쭉 물리며 돌아봤더니, 언제 왔는지 마룻바닥에 백설기가 벌러덩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이 날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계속 앞발을 허공에 휘적거리고 있다.

    냐아아앙!

    나름 위협적이라 생각하는지 꽤나 휘적거리고는 있지만, 그냥 귀여운 수준이다.

    “이, 자식. 성질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옆으로 움직여 다시 마루에 벌러덩 누웠다.

    아, 점심을 먹은 이후라 그런지 잠시 솔솔 쏟아진다.

    그렇게 정신이 몽롱해지고 의식이 멀어진지 얼마가 지났을까.

    갑자기 꽥 하고 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으악! 또 찢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돌아봤더니, 실버의 등 뒤를 바라보며 지른 소리다.

    아, 또 그건가.

    평소에 실버 옷이 자주 찢어지는 모양인데, 특히 등 쪽 부위가 가장 사고가 많았다.

    아무래도 실버의 몸집이 큰 탓에 자주 있는 일이다.

    그래서 화실 식구들은 종종 ‘두 얼굴의 사나이, 실버’ 혹은 ‘헐크 실버’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대체 등에 무슨 짓을 하길래 이렇게 자주 찢어지는지 몰라. 나 참, 귀찮게.”

    경희가 그렇게 말하며 벽 쪽에 있는 서랍장에서 반짇고리 상자를 들고 나온다.

    “어어, 뭘 하려고?”

    “가만 있어봐. 그래야 꿰맬 거 아냐?”

    “야, 됐다니까. 그냥 나둬.”

    “뭐라는 거야, 이 헐크 오빠가. 그럼 등을 그렇게 훤히 드러내고 있을 거야?”

    “누가 등을 드러내. 런닝 입었는데. 그리고 옷은 내가 꿰맬 테니까.”

    “전에도 그러면서 옷을 엉망으로 만들었잖아. 그냥 내가 해줄 테니까, 그냥 가만히 있기나 해.”

    “괜찮다니까 그러네.”

    실버가 그렇게 말하며 앉은 자세로 몸을 이리저리 피한다.

    뭐 섀도복싱도 아니고.

    아니 경희라는 상대가 있으니 아닌가.

    “아우, 진짜! 작작 좀 해!”

    그렇게 말하며 실버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아야! 왜 때려!”

    “자꾸 이러면 부산에 전화해서 다 이른다.”

    그 말에 실버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짜증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너 진짜.”

    “그러니까, 가만있으라고.”

    “······젠장.”

    역시 이번에도 먹혔다.

    전에 실버의 어머니가 오셨다가 간 이후로 경희가 이것을 종종 써먹고 있다.

    잘은 모르지만, 뭔가 실버의 어머니랑 이야기가 오간모양이다.

    아마도 ‘오빠가 말 안 듣고 고집부리면 전화해도 되죠?’ 정도였겠지.

    아무튼 저 말은 무슨 삼장법사의 주문에 미친 원숭이가 얌전해지는 것처럼 효과가 확실하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실버의 뒤에 자리를 잡은 경희가 옷을 꿰맨다.

    그런데 이젠 제법 어른 티가 나는 게 시집가도 될 것 같다.

    “악! 아얏! 뭐야! 바늘 좀 조심해라!”

    “아, 미안.”

    “내가 이래서 싫다는 거야.”

    “남자가 왜 이렇게 좀스럽냐? 바늘 정도는 좀 참아봐.”

    “뭐라는 거야! 이게 얼마나 아픈데.”

    아, 그러고 보니, 쟤 아직 바느질 솜씨는······.

    어쩐지 실버가 저렇게 저항하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주변 어시들은 두 사람을 보며 키득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아마 이대봉이 봤다면 종일 놀려댔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내 시선이 선희 쪽으로 돌아갔다.

    평소라면 분명 그림을 그리느라 화실의 이런 시끌벅적한 분위기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어쩐 일인지 경희와 실버를 바라보고 있다.

    한손은 턱을 괴고 다른 손은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는 모습니다.

    뭘 하고 있지?

    낙서를 하다가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간 건가 싶어서 계속 바라봤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계속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문득 뭘 그리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마루에서 일어나 선희 책상으로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는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푸닥거림에 주목하고 있다.

    슬쩍 책상 위를 봤더니, 역시 예상대로 그림을 그리고는 있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와 조그마한 여자아이.

    남자는 실버처럼 무뚝뚝한 느낌으로 보이고, 여자애는 경희처럼 수다스럽고 활동적인 인상이다.

    선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저런 걸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런데 뭐랄까, 묘하게 어울리는 한 쌍이다.

    강인한 느낌의 남자와 그를 따르는 여자아이.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희야.”

    그제야 멈칫하던 선희가 날 돌아본다.

    “······응?”

    “이 그림말인데, 조금 바꿔볼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러니까 말이지······.”

    그림을 보면서 이런저런 주문을 던져봤다.

    이런저런 복장으로도 바꿔보고, 얼굴 형태라든가, 표정까지.

    많은 주문을 하고 있었지만, 선희는 귀찮다는 표정 없이 계속 지우개질을 하며 그림을 바꾸고 있다.

    그렇게 복장이 대충 만들어지고 나자 또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계속 주문을 했다.

    그제야 선희는 뭔가 내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이런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빠르게 고쳐나간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고치던 그림이 드디어 완성이 됐다.

    선희가 그리던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누더기 같은 복장의 두 사람.

    남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마스크를 목에 걸고, 2차 대전의 비행사 안경을 머리에쓰고 있으며 누더기 같은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있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머리엔 체크무늬 두건을 쓰고 이마엔 물안경 같은 것을 쓰고 있고, 남자와 마찬가지로 누더기를 걸치고 있다.

    그런데 거한의 남자 한쪽 팔은 그것자체가 커다란 기관총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스토리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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