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77화 (277/425)
  • 어쩔 거냐? 실버 (3)

    잠시잠깐의 기묘한 공기와 함께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정미자가 실버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는 이대봉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자 둘을 바라본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지 묘한 얼굴이 된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와서는 실버의 어머니를 향해 머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은 실버의 어머니가 밝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저희 못난 아들이 신세를 지고 있어요.”

    아들이라는 말을 들은 탓인지, 정미자가 움찔 하더니 긴장한 얼굴로 다시 인사한다.

    “정미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곁에 있는 여자를 향해서도 머리를 슬쩍 숙인다. 그러자 실버 어머니 곁에 있던 여자도 다소곳하게 머리를 숙였다.

    “강미정이라고 합니다.”

    강미정의 입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랄까, 전형적인 조강지처의 느낌이 강하다.

    “아, 네.”

    다시 한 번 주변에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여기서 가장 불편한 표정은 당연하게도 실버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던 이대봉이 살짝 끼어들었다.

    “어서와, 미자야!”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면서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안으로 끌어들인다.

    정미자는 얼떨떨해 하면서도 실버 쪽을 힐긋거리며 신경을 쓰는 눈치다.

    실버도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놀라기는 마찬가지.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대봉을 슬쩍 노려본다. 이것이 다 이대봉이 부린 술수라는 걸 눈치 챈 모양이다.

    그런 실버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이대봉은 뭐가 즐거운지 연신 웃으며 정미자를 화실 쪽 의자에 앉힌다.

    “여기 앉아.”

    정미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쪽 여자 분은 누구?”

    그 말에 이대봉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누구긴. 피앙세지 피앙세.”

    “피앙세?”

    “정혼자라고. 예쁘지?”

    아이고, 저 눈치 없는 인간이 일을 키우네.

    “······그, 그러네.”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어째 표정이 복잡해 보인다.

    뭘 생각하는지는 표정만 봐도 알 것 같다.

    보나마나 ‘내가 왜 이런 곳에 온 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런데 왜 저런 정혼자를 두고 아무 말도······.”

    “뭐, 본인 말로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는 결정이라고는 하는데, 저렇게 예쁜 여자라면 그런 마음이야 금방 바뀌지 않을까?”

    이거 어떻게 수습하려고.

    나는 도저히 가슴 떨려서 끼어들지 못하겠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뭐가 좋은지 정미자와 이대봉을 번갈아 쳐다보며 실실 웃고 있다.

    죽을 거야.

    저인간은 반드시 실버 손에 죽을 거야.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미자는 뭐 마실래? 커피? 홍차? 레몬차?”

    잠시 말이 없이 있던 정미자를 이대봉이 계속 툭툭 건드리며 묻자 힘들게 입을 열었다.

    “······레몬차도 있어?”

    “당연하지.”

    그렇게 대답한 이대봉이 부엌 쪽에다 소리쳤다.

    “경희야, 레몬차로 한잔!”

    그러자 안에서 경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거 없어. 다른 걸로 주문해!”

    “······아하하, 없다네.”

    “나도 없을 거라 생각은 했어. 그냥 내가 알아서 타다 먹을게.”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려 하는데, 이대봉이 그런 그녀를 말렸다.

    “아니지, 넌 이제 손님인데. 내가 직접 타다 줄게.”

    “······왜 이래 부담스럽게.”

    “커피, 삼삼삼이지.”

    “······응.”

    “좋았어.”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딱 튀기더니, 이대봉이 부엌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저 인간, 최악의 상황을 벌여놓고 이렇게 한발 빼 버리는 건가.

    이 악마 같은 인간아.

    이걸 누구더러 수습하라는 거냐.

    정미자는 자리에 앉아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있고, 실버도 그런 그녀를 신경 쓰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묘한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강미정이 그런 두 사람을 조심스럽게 번갈아 본다.

    아, 이런 분위기 정말 싫은데.

    나도 도망치고 싶어서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서려는데, 부엌 쪽에 있던 이대봉과 눈이 마주쳤다.

    ‘넌, 그냥 그대로 앉아있어.’그렇게 말하는 입모양을 하며 손바닥으로 아래를 누르는 시늉을 한다.

    저 인간이.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진짜.

    그때 부엌에서 나오던 경희가 정미자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어? 미자 언니.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제임스 오빠가 꼭 오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실버 쪽을 다시 한 번 힐긋거렸다.

    역시 자리가 불편한 모양이다.

    그렇겠지.

    그런데 그때였다.

    정미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실버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앉아있던 실버가 화들짝 놀라며 다가오는 정미자를 보고는 표정이 굳었다.

    그 때문일까, 실버의 어머니와 강미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실버를 봤다가, 다시 정미자 쪽을 쳐다봤다.

    그런데 실버에게 입을 앙다문 채로 다가갔던 정미자가 그의 앞에 서서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그녀가 실버에게 약간은 강인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데요?”

    갑작스런 질문에 실버가 놀란 눈이 되었다.

    “네?”

    “본인의 생각을 정확하게 밝히셔야죠. 여자 분이 이렇게 직접 먼 길을 오셨잖아요. 그러니까, 분명하게 하시는 게 맞죠.”

    “······.”

    “왜 그래요? 평소 실버 씨라면 이렇지 않잖아요.”

    “······.”

    맞은편에 앉은 두 여자는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그저 멍하게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이 자리에서 제대로 말씀하세요. 그게 실버 씨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게 찾아오신 분에 대한 예의죠. 그리고 이런 모습은 실버 씨답지도 않고요.”

    그때 경희가 쟁반을 든 채로 그들 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내가 붙들었다.

    어쨌건 지금은 중요한 결정을 실버가 해야 할 순간이니까.

    부엌에 들어갔던 이대봉도 슬쩍 나와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희도 어느 샌가 그리던 그림을 멈추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몰려있는 그 순간, 실버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음······. 그건 그러네요.”

    그렇게 말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자신의 어머니와 강미정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는 잠시 심호흡을 하나 싶더니, 곧장 입을 열었다.

    “저기, 미정 씨. 죄송한데, 결혼은 할 수 없습니다.”

    “······네?”

    놀라서 되묻는 강미정.

    의외라는 표정은 맞는데, 그렇다고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고.

    뭔가 묘한 느낌이다.

    그에 반해 실버의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을 쳐다보고만 있다.

    “실은 그게······. 좋아하는 여자가······.”

    그런데 실버가 더 이상을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변해간다. 아니, 벌겋다 못해 검게 변해버렸다.

    저 인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왜 말을 못하니! 왜!

    “좋아하는 여자라뇨?”

    “그게······.”

    실버를 대신해서 정미자가 입을 열었다.

    “저예요.”

    “······.”

    놀란 강미정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실버의 어머니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곧장 정미자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뭐야? 이거 막장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것의 전조?

    물 싸대기, 혹은 김치 싸대기.

    주면에 뭐가 있지?

    일단 테이블엔 아무것도 없고.

    경희를 잡아두길 잘했다. 만약 커피를 저곳에 가져다 놓았다면 큰 일이······.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실버의 어머니가 정미자의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아이고, 아이고.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응?

    이게 뭔 상황.

    고맙다니, 뭐가?

    “나는 솔직히 이 목석같은 아들놈이 아무 말도 없어서, 대봉이 말이······.”

    “제임스요!”

    “아, 그래. 제임스의 말을 믿지 못했는데, 정말 이었다니.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

    “······.”

    정미자는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이다.

    물론 실버도 마찬가지.

    나도 그렇고, 모두 그렇다.

    그런데, 이대봉은 묘한 표정으로 실실거리며 웃고 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있던 강미정도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실버가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물었다.

    “어, 엄마. 무슨 말이야. 이게?”

    “실은 말이다······.”

    실버의 어머니가 눈물을 소매로 닦으시더니 이대봉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이번엔 이대봉 쪽으로 향한다.

    여전히 얼떨떨해 하는 실버와 정미자의 시선을 받던 이대봉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네가 계속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행동하니까 그렇지. 어머니는 내가 갈 때마다 걱정이 많으시고. 그래서 미정이에게 부탁을 좀 했다.”

    “······너, 미정 씨랑 아는 사이였냐?”

    “당연하지.”

    허리에 손을 올리며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대답한 이대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박용성 알지? 부산에서 가장 잘나가는 만화가.”

    “재벌21세를 그린 만화가?”

    “그래, 그 사람. 거기 화실에서 일하는 애야. 미정이가.”

    그 말에 실버가 강미정을 돌아보자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꾸벅 숙인다.

    “죄송해요. 속여서.”

    “······.”

    “야야, 네가 왜 죄송해? 다 실버 저놈 잘되라고 한 건데, 고마워해야지. 안 그래?”

    이대봉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불쑥 돌아본다.

    나는 얼떨결에 머리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 내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머리를 끄덕인다.

    “아무튼, 미정이한테 부탁해서 어머니랑 추석에 너와의 주선 자리를 만든 거야.”

    “······.”

    결국 이대봉의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는 뜻이다.

    정미자랑 썸만 잔뜩 타고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자 답답해서 본인이 나선 모양이다.

    그리고 이런 위기의 순간을 연출해 실버와 정미자의 입에서 직접 이야기가 나오게 유도한 거고.

    그나저나 대단하다.

    이런 건 스토리로 짤 수는 있어도, 실전에서 쓰기가 쉽지 않을 텐데.

    이거 잘못했다가 꼬였으면, 이대봉은 양볼 싸대기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기 목숨을 담보로 이 상황을 연출한 거다.

    무모한 건지, 아니면 머리가 좋은지 헷갈리네.

    “내가 얼마나 속이 터졌으면 이렇게 했겠니? 나처럼 좋은 친구 둔걸 평생 고맙게 생각해라.”

    “······너 이 자식.”

    “어어, 또 폭력이냐, 넌 고마워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거야? 아무튼 해적건달 녀석.”

    “······.”

    “나는 설마, 설마 했단다. 제임스 말로는 서울에 좋아하는 아가씨가 있기는 하다고 했지만, 쉽게 믿겨야 말이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오긴 했다만 진짜 일거라고는 정말 몰랐단다.”

    어머니의 말에 실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엄마 맞아?”

    “솔직히 내 아들이지만, 너처럼 무뚝뚝한 놈에게 접근할 여자가 어디 있겠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신 정미자의 손을 주무르며 밝게 웃었다.

    “고마워요. 고마워. 총각귀신될 거 구제해줘서.”

    “······아, 아니에요.”

    정미자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낄낄거렸다.

    “진작 알아서 했으면, 내가 이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잖아.”

    “아이고, 우리 제임스는 내가 평생 은인처럼 생각할게.”

    “어머니가 그러실 건 없어요. 제가 친구 잘못 둔 죄니까요.”

    “그래, 그래. 이해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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