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76화 (276/425)

어쩔 거냐? 실버 (2)

놀란 실버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봉이가 어머니랑 미정 씨를?”

“어머, 미정 씨? 혹시 실버 오빠랑 결혼 할 사람?”

경희가 깜짝 놀라더니 곧장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실버는 대답은 하지 않고, 테라스 난간으로 다가서더니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까부터 아래가 약간 소란스럽다는 생각을 했지만 설마 했는데.

나도 실버랑 같이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이대봉이 같이 왔다면, 초인종을 눌렀을 리 없으니 바로 거실로 들어갔겠지.

그런데 실버는 방금 소식을 듣고 난 뒤부터 상당히 당황스러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왜 그래, 오빠? 어머니 오셨는데 안내려 갈 거야?”

“······.”

동공에 지진이 난 실버를 꽤나 뚫어지게 쳐다보던 경희가 머리를 갸웃하더니 날 보며 물었다.

“실버 오빠가 왜 저래?”

“······그야 난 모르지.”

근데 경희 이 녀석은 정말 모른다는 건가?

실버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대충 짐작이 가지 않나?

“같이 온 여자분 엄청 예쁘던데. 정말 실버오빠랑 결혼할 사이 맞아?”

“그걸 나한테 왜 물어 당사자에게 물어봐야지.”

“저런 상태인데 뭘 물어봐?”

혼란, 혼돈, 경악, 충격.

실버의 얼굴에는 대충 이런 감정들이 표정이 묻어나있었다.

“오빠, 정말 안내려 갈 거야?”

“······.”

여전히 대답이 없자, 경희가 초승달의 눈으로 묘한 웃음을 짓는다.

“너무 예쁜 그녀가 찾아와서, 가슴이 콩닥콩닥······?”

“누가 콩닥 이라는 거냐! 이 망할 꼬맹아!”

“악! 무셔!”

화들짝 놀란 경희가 귀를 막으며 움츠렸다가 곧 몸을 후닥닥 세우며 버럭 했다.

“그럼, 왜 그러는 건데! 내가 오빠 데려오겠다고 올라왔는데. 그럼, 안 내려갈 거야!”

“······아, 대봉이 저 자식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는.”

그렇게 혼자 투덜거리더니 곧 인상을 굳힌 채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던 경희가 날 보며 말했다.

“실버 오빠, 오늘 따라 너무 이상해. 안 그래?”

“이상하지. 암.”

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하는데, 경희가 서둘러 실버를 따라 내려간다. 나도 궁금해서 그냥 혼자 있을 수는 없는 일, 곧바로 경희를 따라 내려갔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계단 아래서 멈춰있는 실버가 보인다.

“실버오빠 여기서 뭐······, 읍.”

뒤에서 내가 경희의 입을 틀어막았다.

실버의 표정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 끝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 이 여자애는 만화가 선생님. 화실의 서열 2위. 음, 회사로 치면 여기 부사장님 같은 존재랍니다.”

이대봉의 목소리다.

자세한 건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선희를 소개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서열 2위라니, 무슨 조직폭력배 소개 하냐!

“제 아들이 폐를 끼치고 있지 않나 모르겠네요.”

“······.”

선희가 뭐라고 대답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는 않는다.

“······읍.”

“아, 미안.”

여태 경희의 입을 막고 있었던 걸 잊었다. 손을 슬쩍 빼내자 경희가 쀼루퉁한 얼굴로 날 잠시 바라봤다가 아래에 있는 실버의 등을 툭툭 쳤다.

“오빠는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

그제야 움찔하던 실버가 억지로 느긋한 표정을 짓더니, 슬며시 마지막 계단을 내려가서는 거실로 걸어간다.

그때 경희는 신나하며 후다닥 실버를 지나쳐 가더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어머, 실버오빠 어머니 되세요?”

“어이쿠 머니나!”

놀라는 실버의 어머니가 보인다.

경희가 선희랑 똑같이 생겨서 그런 모양인 듯 보인다.

아무튼 아담한 키에 까만 피부, 그리고 전형적인 뽀글머리의 한국 어머니 상, 소박해 보이는 복장이 더 정겨워 보인다.

이대봉이 끼어들었다.

“어머니, 얜 저 선희랑 쌍둥이랍니다.”

“아, 그러시구나. 반가워요.”

“네, 안녕하세요. 어머, 이쪽이 미정 씨구나. 실버오빠에게 많이 들었어요.”

“아, 네.”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시골이니 어쩌니 하더니, 그래도 여자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정한 블라우스 복장의 여자.

첫인상은, 음, 조용한 성격처럼 보이긴 하는데.

“와, 진짜 실버가 그런 말을 해? 별일이네.”

보이지 않는 방향에 서 있는 이대봉의 장난 섞인 음성도 들린다.

그때 걸어가던 실버가 흠칫 놀란다.

뒷모습이라서 표정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꽤나 당황한 게 아닐까싶다.

그나저나 경희 쟤는 왜 이렇게 일을 키우는 거야? 미정이라는 이름도 방금 처음 들어놓구선.

나름 좋은 말을 해준다고 저런 모양인데, 실버가 어떻게 반응할지 심히 두렵다.

그런데 발작이라도 할 줄 알았던 실버는 별다른 반응 없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동시에 실버를 돌아본다.

“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너 어디 있다가 이제야 얼굴을 비추냐?”

“······.”

“내가 모시고 왔다. 어때, 나 착하지?”

이대봉이 웃으며 말하자 잠시 주먹을 부르르 떤다. 아마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이대봉은 며칠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몰려든 상황이라 곧 자신을 수습하는 모습이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한 실버가 자신의 어머니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엄마, 난 다음 주에 오실 줄 알았는데.”

실버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모두 흠칫하고 놀랐다.

엄마라는 말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억양이 묘하게 어린애 같아서.

그 때문인지 어시 몇이 입을 꽉 다문채로 웃음을 참고 있다.

아무튼 그 말을 들은 실버의 어머니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이대봉을 슬쩍 쳐다봤다.

“나도 다음 주에나 갈까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봉이가······.”

“제임스.”

슬쩍 끼어든 이대봉의 말에 다시 실버의 어머니가 머리를 끄덕인다.

“아, 그래. 제임스가 찾아와서는 쇠뿔도 당긴 김에 빼라고 하더니······, 얼떨결에 따라오긴 했는데, 이거 여기에 괜한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니에요. 잘 찾아오셨어요. 안 그래도 지금 마치는 시간이니까, 여기서 쉬시다 가셔도 되고요. 아니면, 며칠 여기서 묵으셔도 되고요.”

경희의 말에 실버의 어머니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고,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아들만 만나고 금방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뭐, 내가 다시 데려다 드릴게요.”

이대봉이 말하자 실버의 어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돌아갈 땐 기차타고 가면 돼.”

“에이, 오늘 토요일이라 표가 없을걸요.”

“입석이라도 상관없단다.”

“입석이라니, 그러면 제가 더 곤란하죠. 저한테도 어머니 같으신 분인데. 제에게 맡기시고 편안히 가시면 된다니까요.”

이대봉이 실버 어머니에게 살갑게 말한다.

실버랑 같은 마을에서 자란 것도 아니라던데, 마치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보일 정도다.

확실히, 인맥의 제왕답다.

그런데 그때 이대봉이 날 보더니 웃으며 실버의 어머니를 툭툭 건드린다. 그리고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쪽이 여기 화실의 실질적 대장, 그러니까 사장이나 같은 친구로 여기 쌍둥이들의 오빠인 이윤환이에요.”

실질적 대장이라니, 소개를 해도 참.

“안녕하세요. 이윤환입니다. 실버, 아니 심봉이 형에게 평소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아유, 뭘요. 부족한 저희 애가 오히려 신세를 지고 있어요. 그리고 월급도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버 어머니가 머리를 푹 숙이며 인사하자 곧바로 제지하며 말했다.

“아, 이러지 마세요. 심봉이 형이면, 저에게도 어머니나 다름없으신데, 그냥 편하게 말씀 놓으세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러셔도.”

그렇게 소란스럽던 인사를 끝내고 나서는 곧바로 어시들은 퇴근을 했다.

그리고 거실의 소파로 세 사람과 이대봉, 이렇게 네 사람이 앉아있다.

조용해진 화실을 슬쩍 보던 실버의 어머니가 입을 벌린 채로 놀라워하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큰 집에서 일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네가 돈을 많이 보내줘서, 혹시나 무슨 나쁜 일을 하는 건 아닌가싶어서 걱정······.”

그 말에 실버가 화들짝 놀랐다.

“엄마! 왜 쓸데없는 말을 해!”

“어머나, 내가 주책없이,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으며 우리 쪽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우리가 있으면 불편하겠지.

내가 경희를 툭툭 치며 턱짓을 했다. 그리고는 자리를 피해주자는 눈치를 줬더니 금방 이해한 경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말씀들 나누세요. 마실거나 준비해 드릴게요.”

“그래, 여기 세분은 커피, 달달하게. 나는 홍차로.”

이대봉의 말에 경희가 이를 드러내며 괴상한 표정으로 웃었다.

“흐흐흐, 오빠도 이쪽으로.”

“응? 내가 왜?”

실버의 곁에 앉아있던 이대봉이 짐짓 모른 척 버틴다.

그 모습을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자 움찔한 이대봉이 자리에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일어난다.

“아, 참. 우리 선희랑 의논할게 있었지.”

그렇게 말하며 화실에서 작업 중인 선희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선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이대봉을 쳐다보며 말했다.

“의논할 거 없는데.”

“아하하, 얘가 뭐래니? 전에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

“얘가 벌써 어린 나이에 치매가 오나.”

그렇게 말하며 슬쩍 다가가서는 뭐라고 소곤거리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든다.

누가 보면 승리의 V자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선희의 성격상 절대로 그건 아닐 것이고.

아.

뭔 얘기를 했을지는 대강 감이 온다.

뭐, 통닭이나 햄버거 사준다고 꼬셨겠지.

그것도 V자를 보니, 두 마리, 혹은 두 개.

이대봉이 경악하는 모습을 보니, 통닭 두 마리로군.

이 와중에도 통닭 두 마리의 거래가 형성되고 있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경희는 음료를 준비하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혼자 남은 나는 곧장 선희와 이대봉이 있는 근처로 다가가 비어있는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이대봉을 향해 작은 소리로 물었다.

“대봉이 형, 정말 괜찮은 거야?”

그때 선희에게 그렇게 많이 먹으며 배나온 미소녀가 된다느니 말하던 이대봉이 날 돌아보며 인상을 팍 썼다.

역시 통닭 얘기가 맞는 모양이군.

“너는 진짜······. 언제쯤이면 제대로 제임스라고 불러줄거니. 그나저나 괜찮냐니 뭐가?”

“실버 형 말이야. 정미자 씨랑······.”

“애인사이는 아니지.”

“누가 애인사이래? 썸을 타고 있었잖아.”

“썸? 썸이 뭐야?”

아차, 이런.

썸이 사용되던 시절이 아니지.

“그러니까, 뭔가 서로 감정을 확인하는 그런 단계가 아니었냐고.”

“아, 그거? 확실히 우리 윤환인 특이한 단어를 잘 쓴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실실 웃더니 곧바로 말을 이었다.

“실버 저 녀석은 말이지, 다른 건 다 좋은데, 여자문제만큼은 엉망이야.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으니까, 늘 그 모양이지.”

뭐야, 잘 알고 있네?

“알고 있으면서 왜 데려왔냐고?”

“······그래.”

“후후.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을 기회를 주려고.”

“무슨 소리야? 마무리 기회라니.”

“음, 보자······, 시간이 됐나?”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목시계를 본다.

그때 거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 왔다.”

“저, 왔어요.”

정미자가 거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양손으로 살포시 자신의 턱을 괴며 웃었다.

“내가 불렀거든. 정미자 쟤.”

“······.”

헉.

뭐라는 거야, 이 또라이가.

도대체 왜 부른 거야!

그때 안으로 들어서던 정미자와 실버의 눈이 딱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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