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74화 (274/425)
  • 욕은 나누면 반 (3)

    며칠 후, 소년 히어로가 발행된 그날 저녁, 만화연구회 사람들이 모인 카페에서는 새로운 단편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니시다가 평소에도 써니의 만화를 좋아한다는 인터뷰를 자주하더니, 이번엔 대놓고 방사능으로 지구 멸망하는 단편을 그렸어. 평소에도 암울한 이야기를 잘 쓰는 인간답게, 아예 다 멸망시켜버리며 끝내버렸네.”

    “그거 보고 이데온이 떠올랐어. 몰살의 토미노. 아, 이데온은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아프다. 왜 그런 식으로 만화를 만들어서. 나 그거 때문에 트라우마 생겼다고.”

    “맞아. 토미노 그 인간, 얼마 전에 끝난 Z건담에서도 그런 식의 마무리를 해버렸잖아. 카미유를 바보로 만들어버리질 않나, 샤아는 우주에서 그냥 파괴된 백식에 태운 채로 실종 처리해버렸으니. 미친 것 같다니까.”

    “그것 때문에 전에 여학생들 집단자살 한다고 난리도 아니었잖아. 샤아 죽었다고. 지금 샤아의 인기는 정말 비정상적이라니까.”

    “뭐, 죠의 죽음이랑 비슷한 거지.”

    그 말에 많은 이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다시 니시다의 단편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아무튼 이번 니시다의 만화는 그래도 단편이니까, 그나마 나은 거라고. 만약 장편, 특히 지금 연재중인 에스퍼 존을 그런 식으로 마무리했다간 팬들에게 맞아 죽을걸.”

    “난 솔직히 그거보고 에스퍼 존의 시작이 아닐까 싶었어.”

    “응? 시작이라니, 어디가?”

    “에스퍼 존의 배경은 지구가 아닌 저 먼 은하계잖아, 스타워즈처럼. 거기서 에스퍼들은 죄다 인간형이고. 지구도 아닌 외계에서 인간형만이 에스퍼들이면 모두 지구 출신이라는 거 아니겠어?”

    “오, 그런 해석도 가능하구나.”

    그때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어이, 그럼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인간형 존재들도 모두 지구인이냐? 주인공 루크도 지구인, 한솔로도 지구인, 레아공주도 지구인.”

    “그야······, 아니지.”

    “애초에 인간형이라 몰입이 잘되기 때문에 그렇게 나오는 거지, 인간형은 무조건 지구인이라는 식으로 해석해버리면 이상하잖아. 솔직히 인간형이 아닌 주인공에 몰입할 수 있겠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동물이 주인공인 만화도 있는데. 명견실버(은아 흐르는 별 실버)도 있고. 천랑발도아!”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과장한 동작으로 격하게 회전시킨다.

    그 모습을 본 주변사람들이 웃었다.

    “그런데, 솔직히 방사능이 특별한 건 아니지. 핵전쟁으로 지구가 멸망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 만화들은 얼마든지 있고. 미래소년코난은 초자력 무기라는 특별한 콘셉트이긴 했지만.”

    “핵전쟁이랑은 다르지. 이쪽은 원자력발전소 파괴로 생기는 사건부터 시작이라는 거야. 거기다 일본이 그 시작점이었다고, 그러니까, 일본이 전 세계를 멸망시키는 단초가 된 경우야. 완전 민폐국가가 된 거라고. 그리고 미래소녀코난이야 지구의 지각을 박살내는 무기라 방사능이랑 관계가 없어.”

    “정말 세기말에는 지구가 멸망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찝찝하고.”

    “여기서 노스트라다무스가 왜 나와?”

    “아무튼, 이렇게 되면 각종 단체들이 니시다를 공격하게 되는 거야?”

    “에이, 그건 아니지. 써니의 작품은 임팩트가 컸잖아. 단편으로는 어림없어. 그리고 인지도도 다르고.”

    “그럴까?”

    “우리 같은 만화연구회 사람들에게나 관심을 받는 정도라고.”

    “하긴. 이래봐야 티도 안날거야.”

    하지만, 한주가 지나자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소년 히어로가 아닌 잡지에서 방사능위험에 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단편작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소년점프에서 특별잡지로 발행한 ‘더 원 점프’가 그 시작점이 된 것이다.

    이 잡지는 이벤트로 발행한 잡지라 연속성은 없지만, 그동안 소년점프를 비롯해 슈에이사에서 발행되는 잡지출신의 만화가들이 대거 단편으로 참여해, 만화계 전체에 주목을 끌었다.

    일단 소년 히어로에 비해 사이즈가 다른 대형 잡지사가 벌인 이벤트라 그런지, 각종 신문매체나 TV방송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한 방송에서도 그런 내용에 대해 사람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 얼마 전에 벌어진 체르노빌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 만화가들이 나선 겁니다.

    - 그렇죠. 아무래도 이번 사고로 엄청난 인명피해는 물론 사고지역이 방사능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했으니까요. 일본도 적지 않은 숫자가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거죠. 얼마 전에 이슈가 되었던 ‘절망의 페르소나’라는 만화도 그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은 겁니다.

    - 하지만, 이번 만화책은 좀 달라요. 이건 그냥 방사능의 위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아요. 그냥 대놓고 ‘위험하니까, 쓰지 마!’ 이런 식이에요. 이래서야 사람들이 수긍할 수는 없는 일이에요. 이벤트라고 너무 서둘러 만들었다는 것이 티가 납니다.

    - 그래도 지금의 이슈에 참여하자는 의도니까, 그렇게 까 내릴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요.

    - 까 내리는 게 아닙니다! 그냥 지금 시류에 편승하려고 하는 모습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 별다른 내용도 없고요.

    - 그래도 몇몇 작품은 꽤나 생각해볼 만한 내용이던데요.

    - 글쎄요. 저는 그냥 별로던데. 그리고 이런 식으로 만화가들이 너무 대규모로 나서는 모습도 별로 좋아보이진 않구요.

    - 왜요? 만화가들이 자신의 뜻을 밝히는 게 문제가 있나요?

    - 이런 건 정부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이상하네요. 자신의 뜻도 밝히지 못하는 곳입니까, 지금의 일본은.

    -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면 사고밖에 생기지 않으니까 하는 소리죠. 예전에 학생운동 기억 안나요?

    각 분야의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이번 일을 이야기하다보니 여러 부분에서 충돌이 생기고 있었다.

    * * *

    생각도 못했다.

    만화가들이 대규모로 그런 식의 일을 벌일 줄은.

    지로가 보내준 단편잡지를 보긴 했는데, 내용의 기반이 되는 이야기가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에서도 꽤나 놀랐다.

    바로 원전사고라는 것을 기본바탕으로 만들어진 단편들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시대적배경은 60년대부터 미래까지 다양하고, 분야도 SF에 멜로, 드라마까지 있다.

    가령 SF의 경우엔 미래에도 원전파괴의 후폭풍을 겪고 있다는 식이고, 멜로는 원전이 파괴되면서 두 사람이 절망을 맞이하는 내용. 그리고 드라마도 가족의 슬픈 이야기 등이다.

    만화가들의 스타일이 맞게 독특한 느낌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지만, 대부분 세드앤딩이라는 특징 때문에 보고 난 뒤엔 씁쓸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진짜 놀란 건, 유명작가들의 참여가 많았다는 것이고, 그중에서 친분이 있는 토리야마 아키라의 작품이었다.

    그림체야 아직 개그적인 부분이 남아 있었지만, 슬슬 그 영역을 벗어나려는 시점이라 그런지 제법 어두운 이야기임에도 잘 어울린다고나 할까.

    대략 내용은 이렇다.

    방사능으로 인해 인류가 멸망직전으로 몰린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여자아이(닥터슬럼프의 아라레를 상당히 닮았지만 안경은 쓰지 않았다.)가 일본에서 일어나는 원전파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결국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 미래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다소 허무한 결말이다.

    물론 대략적인 스토리가 이렇긴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면 꽤나 아기자기 하고 재미있는 장면이 많다. 특유의 개그씬도 많고, 요즘 물이 한창 오르고 있는 액션씬도 그렇다.

    마지막 원전파괴를 막아내고, 벌러덩 누워 웃는 장면도 인상적이고.

    물론 마지막 절망하며 우는 소녀의 모습에서 가슴이 조금 아프긴 했지만.

    아무튼 이 만화를 본 경희는 도무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충격을 받고는 울먹이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과거를 바꿨는데, 미래가 그대로일수가 있어? 토리야마 선생님 너무한 거 아니야? 이럴 거면 왜 굳이 타임머신까지 타고 과거로 간 거야?”

    “평형우주가 하나 더 생긴 거지.”

    “평행우주? 그게 뭔데?”

    “음, 뭐랄까. 과거를 바꾸면서 평화로워지는 세계 하나가 더 탄생해버렸다는 거야. 그러니까, 자신이 살던 미래는 그냥 그대로 흘러가는 거고.”

    “엥? 뭐야, 그건?”

    “음, 그 부분은 나도 설명하기 어려워서 포기.”

    “······너무해.”

    “나중에 토리야마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 물어봐라.”

    “그게 언젠데?”

    “모르지.”

    “······.”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페러럴월드의 이야기는 드래곤볼Z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손오공이 프리더와의 싸움 후 돌아왔을 때 지구에서 만난 트랭크스의 에피소드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과거가 바뀌었음에도 미래로 돌아가면 전혀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던 이야기. 물론 과거에서 수련과 실전을 통해 강해진 덕분에 자신이 살던 미래의 인조인간들을 해치우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벌써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다니, 아직 80년대임을 생각해보면 꽤나 앞서간 내용이다.

    토리야마 아키라뿐만 아니라, 시티헌터의 호죠 츠카사 역시도 자신이 지금 그리고 있는 시티헌터 스타일과는 달리 남녀 간의 사랑을 넣어 꽤나 애틋한 이야기로 만들어 인상에 남았다.

    아무튼 미래의 나도 전혀 본적이 없는 이들의 작품을 접했다는 건 나름 크다면 큰 수확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도 생각지 못한 이벤트였던 것이다.

    그래도 가장 감동한 건 니시다 선생이 이 일을 위해 나서주었다는 사실이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텐데.

    * * *

    “결국, 네가 한건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았구만.”

    키도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니시다가 찌푸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뭐 의미는 있었으니 됐습니다.”

    “의미?”

    “네. 소년점프 작가들이 나서줬잖아요. 그래서 써니 선생님에 대한 공격도 줄어들었고.”

    그 말에 키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넌 제 작품을 제물로 사용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네.”

    “그건 아니지. 네 작품이 단초가 된 게 아니라, 네 인맥으로 시작한 거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년점프엔 유난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좀 되잖아.”

    “······.”

    “그래도 너무 실망은 하지 마. 어제 유난에게 전화 왔는데, 너에게 엄청 고마워하더라고. 다음에 한국에 오면 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아, 정말입니까?”

    “그래.”

    그 말에 니시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턱을 괴고 바라보던 키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직접 통화는 안하는 거야? 전화번호 알려주면 네 화실로 전화가 갈 텐데.”

    그 말에 움찔하던 니시다가 곧 표정을 굳건히 하며 입을 열었다.

    “특별하잖아요. 텐겐 선생님이랑, 써니 선생님은.”

    “응? 특별? 무슨 소리야?”

    “저는 이렇게 조금 위로 쳐다보는 편이 좋습니다. 올려다보면 계속 나아갈 길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키도가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뭐라는 건지 모르겠구만. 올려다보면 나아갈 길이 보인다니. 차라리 날 올려다보는 게 어때?”

    “무슨 소립니까? 앙케이트도 저에게 밀리셨으면서.”

    “······역시 넌 재수 없는 녀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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