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65화 (265/425)
  • 절망의 페르소나 (4)

    일본에서 지로가 비디오테이프를 보내왔다.

    - 일본에서 며칠 전에 방송한 내용입니다. 궁금하실 지도 몰라서 보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궁금해졌다.

    일종의 재미로 보는 이슈토론 방송이라는데, 보니까 이거 뭐 토론이라기보다는 그냥 예능프로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런데 이 방송에서 ‘절망의 페르소나’를 다뤘다는 얘기를 듣고 상당히 궁금해서 봤더니 미래에서 봤던 일본방송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서 조금 실망스럽다.

    그리고 어떤 패널이 ‘일본은 선진국이라 그런 일이 절대 벌어질리 없다.’는 말에 그만 풋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일본이 경제로 따지면 선진국이 맞지만, 정치는 아니지.

    물론 절대로 저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된다는 걸 인정하기 어렵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일본인이라도 해도 그럴 것 같으니까.

    하지만, 한국인이라서 무슨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을 거라고 말하니까, 할 말이 없다.

    아무튼 실버도 궁금해서 화실 옆방인 이곳에 들어와 같이 보고 있다.

    다른 어시들도 몇몇 따라 들어왔는데, 최근 일본어를 열심히 하는지 얼추 알아듣는 모양이다.

    “쟤네들은 오래전부터 방사능에 대한 공포가 많은 나라여서 그런가? 심할 정도로 반박이 심하군.”

    “그래도 한국인이라서 믿을 수 없다는 건 좀 기분상하는 일이네요.”

    실버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와 달리 박소미는 화가 났는지 볼을 부풀리며 인상을 썼다.

    “그래도 일본에 저런 일이 진짜로 벌어지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라요. 저라도 솔직히 한국의 미래를 저렇게 표현했다고 하면 반발심이 생길 것 같으니까요.”

    “기철이 넌 너무 배려심이 좋은 게 문제라고. 이럴 땐 한국인인 우리가 뭉쳐야지.”

    “아, 네······.”

    “불만 있는 표정인데? 뭐야, 말해봐.”

    박소미가 김기철을 다그쳤다.

    “아, 아닌데요.”

    “아니긴, 불만이 있는데 뭘.”

    “아니거든요.”

    그런 두 사람을 보던 실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대단하군. 이번 만화에 대해 방송에서까지 다룰 정도면.”

    “아무래도 얼마 전에 벌어진 체르노빌 때문에 그렇지. 며칠 지나면서 조금씩 정보가 나오고 있으니까. 이런 민감한 시기에 나온 만화라서 더 그럴 거고.”

    “그런데도 한국은 조용하네. 역시 먼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그런가?”

    실버의 말에 박소미가 끼어들었다.

    “9월에 아시안게임이 열리잖아요. 요즘 한국은 온통 아시안게임이랑 올림픽 얘기뿐이니까.”

    그러자 곧장 김기철이 다시 끼어들었다.

    “맞아요. 재작년에 열린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을 6개나 따는 바람에 요즘 스포츠선수들에 대한 관심도 엄청 높고요. 개인적으로는 유도의 김재엽이 이번엔 일본의 호소가와에게 설욕해줬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 경기를 봤었는데, 잘 하다가 누르기에 걸려서 허무하게 져 버린 게 아직 기억이 남는다.

    아무튼 한국은 그런 큰 행사를 앞둔 상태라 다른 외국의 소식을 가볍게 대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아무튼 그때 신문에 나왔던 작은 기사에 놀란 적이 있는데, 그때 신문 한 켠에 IMF에서 경고라는 글이 있었다.

    이 시절의 한국은 IMF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지만, 나야 그 세대를 건너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던 세대인 만큼 깜짝 놀라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 그리고 올해는 멕시코 월드컵도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다. 사상 최초의 1승을 염원하고 있지만, 그거야 뭐 2002년에나 일어날 일이니까.

    아무튼 지금의 한국은 그런 시기였다.

    “그나저나 이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박소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뭐가요?”

    “절망의 페르소나요. 지금 방송 보니까, 일본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혹시라도 연재중단이 되는 건 아닐까요?”

    “글쎄요. 그건 모르죠.”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박소미가 더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 아니세요? 혹시라도 이게 문제가 돼서 다른 만화까지 불똥이 튄다면······.”

    “그렇게 미리 지레짐작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지금의 일본은 그래도 사회문제를 만화로 다뤘다고 그렇게 쉽게 연재가 중지되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이건 나의 뇌피셜일 뿐이다.

    하지만, 버블경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이 시절의 일본은 내가 살던 시절보다 심리적 여유가 그나마 많던 시절이니까 그렇게 기대하고 있을 뿐이지만.

    사람이든 국가든 여유가 있어야 너그러운 법이니까.

    “너도 참 대단하다. 이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을 텐데, 굳이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걸 보면.”

    실버의 말에 내가 웃었다.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이 아니면 못한다는 건가?”

    하지만 그런 질문에 난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면 이래저래 복잡해질지도 모르니까.

    그때 방문이 열리며 성준희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윤환아, 아카기 씨 전화.”

    어? 아까 전화했었는데 또 무슨 일이 생겼나? 혹시 다른 방송에서 또 이야기를 했다거나.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화실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 아무래도 이번 작품의 파장이 제법 큰 것 같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음성이다.

    “파장이 크다뇨? 또 방송에 나온 겁니까?”

    - TV방송은 아니고요. 이번엔 신문입니다.

    “신문이요?”

    - 네. 유명 칼럼이스트가 만화에 대한 비판기사를 실었어요.

    “······.”

    신문에서 비판 칼럼이라······.

    내 예상보다 일이 커지고 있는 모양이다.

    * * *

    소년히어로의 편집장인 스도 싱고가 긴장한 표정으로 회의실 문 앞에서 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악다물고는 문을 열었다.

    들어서자 커다란 원형 테이블 주위로 중년의 임원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대부분의 임원들이 불편한 표정이었고, 그중 몇몇은 자신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회의를 주관한 부사장이 테이블 중앙에 앉아있다.

    그가 편집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거기 자리에 앉아요.”

    비어있는 자리를 권하자 편집장이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임원한명이 그를 보며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PTA(일본학부모협회)에서 항의가 들어왔네. 소년만화에 이렇게 잔혹한 이야기를 넣는 게 말이 되냐고 말이지. 편집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임원의 질문에 편집장이 동요하지 않은 음성으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PTA는 원래 만화를 싫어하는 단체입니다. 어차피 이 만화 말고도 지적받는 만화는 널리고 널렸습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뭐라는 건가, 그 단체가 얼마나 입김이 샌지 몰라서 그러나?”

    “그 단체 말에만 신경 썼다면 일본 만화계가 지금처럼 발전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60년대엔 아이들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만화책을 쌓아놓고 정기적으로 불을 지르며, 만화가들을 탄압하던 단체 아닙니까?”

    그런 편집장의 말에 임원의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갔다.

    “······그래도, 그들의 말을 그냥 묵살할 수는······.”

    “됐어요. PTA이야기는 그만합시다.”

    “······.”

    부사장의 말에 임원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임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

    “PTA뿐만이 아니에요. 지금 출판사 전체에 이번 만화에 대한 전화가 끊이질 않고 있어요. 필요 이상으로 국민에게 공포감을 조장하는 것 같다는 게 이유입니다.”

    “연재를 중단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들의 요구는 당연히 연재중단이죠. 하지만, 편집장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은데.”

    “당연히 연재 중단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편집장이 단호하게 말하자 임원이 깍지를 끼며 물었다.

    “왜 그럴 수 없는 겁니까? 설명해 보세요.”

    그 말에 편집장이 몸을 더 반듯하게 세웠다.

    “만약 이런 요구에 일일이 응하게 된다면 예전처럼 결국 만화가에 대한 탄압정책이 이어질 겁니다. 만화가들이 창작에 대해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제안을 받게 되면 결국 출판계도 불황으로 이어질 거고요.”

    “······음.”

    이번에는 임원이 머리를 끄덕이며 깎지를 풀고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그러자 다른 임원들의 질문도 이어졌다.

    “그럼, 편집장 생각은 이런 일 따윈 신경 쓰지 말자는 거요?”

    “신경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외부의 파도를 막는 방파제역할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방파제?”

    “그렇습니다. 만화가를 보호하는 것도 우리 편집부가 해야 할 일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무작정 보호만 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정도도 하지 않는다면 만화가들은 우리 출판사를 떠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희들도 결국 분해되고 말겁니다.”

    그 얘기를 듣던 임원 중 한명이 낄낄 거렸다.

    그런 행동에 편집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소년 히어로가 요즘 잘나간다더니 편집장, 보통이 아니야.”

    “······아, 죄송합니다.”

    “죄송하라고 하는 말이 아닌데.”

    “네?”

    “칭찬이라고, 칭찬. 이럴 때 보면 맹한 구석도 있고. 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

    그렇게 말하던 임원이 턱을 괴며 미소를 지은 채로 부사장을 돌아본다.

    다른 임원들도 비슷한 표정으로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임원이 웃으며 부사장에게 말했다.

    “부사장님도 이젠 한 말씀 하시죠? 우리 일은 끝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더 몰아붙여봐야 씨도 안 먹힐 것 같고.”

    그 말에 부사장이 가볍게 웃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갑작스러운 말에 편집장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편집장의 입장이 궁금해서 불렀던 것뿐이에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편집장이 만약 어정쩡한 입장이었다면 오히려 질타를 하려고 했는데. 음, 걱정할 건 없겠군요.”

    “······.”

    “사장님도 무조건 외부압력에 견디라는 지시를 내리셨으니까, 편집장은 그냥 끝까지 밀고 나가도록 하세요.”

    “아, 네.”

    편집장이 대답하자 만족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 부사장이 뭔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아참, 그리고 써니 선생 말인데, 저번에 사인회가 열렸었다고 들었는데.”

    “네. 그렇습니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그래, 그렇다고 하더군. 아무튼 사인 좀 얻어줄 수 없겠소?”

    “네?”

    그때 다른 임원들도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써니 선생 사인 좀 받아주게, 편집장. 나랑 아들이 완전 팬이거든.”

    “나도 부탁해요.”

    “뭐, 기회가 된다면 회사로 불러서 단체사진을 찍는 것도 좋고 말이요.”

    “아니, 써니 선생을 오라 가라 하면 되겠소? 우리가 직접 한국에 찾아가는 거라면 몰라도.”

    “아, 그거 좋겠군. 어떻소, 편집장.”

    “아, 저기······.”

    그때 갑자기 전화기 속 스피커에서 버럭 소리가 들려왔다.

    -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 써니 선생이 우리 출판사에서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미쯔다쇼텐의 사장, 미쯔다 히로유키의 음성이었다.

    아무튼 그런 사장의 호통에 임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알고 보니, 전화기를 통해 회의의 내용을 모두 듣고 있었던 것이다.

    - 편집장!

    “아, 네!”

    - 자네는 원래 생각했던 대로 밀어붙이면 되는 거야. 그리고 압력을 넣는 신문사나 단체가 있으면 말하게. 내가 직접 그들을 만날 테니까.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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