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사인회 (6)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더 예뻐지신 거 같습니다.”
“어머, 호호.”
키도부인이 특유의 밝은 표정으로 무척이나 즐거워한다.
설마설마했는데, 결국 오늘 사인회는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많은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인데도 말이다.
원래 더 일찍 끝내려했지만, 모인사람이 너무 많아서 50명 더, 그리고 50명 더, 이렇게 추가로 하다가 결국 이렇게 된 거였다.
그런데 사실 팬들만 늘어난 건 아니었다.
어디서 듣고 왔는지 만화잡지사, 일반잡지사 취재기자들까지 찾아온 덕분에 실내는 그야말로 미어터지는 줄 알았다.
어디 기자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한창 사인회에 바쁜 모습을 카메라로 찍기도 하고,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기도 했다.
이 시절에는 이게 일반적인건지는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는 불편하긴 했다.
하기야, 이런 걸 따지는 사람들이라면 파파라치가 판치는 잡지들이 있지도 않았겠지. 거기다 한국도 지금은 방송에 대한 법규가 내가 살던 때와는 상당히 다르니까.
그래도 그런 모습이 불편했는지 몇몇 팬들이 항의를 한 덕분에 그들도 물러갔지만.
아무튼 그렇게 대충 사인회를 마무리하고 키도를 따라 그의 집으로 왔다.
물론 맛있는 음식이라는 미끼를 선희에게 투척했고, 그것을 덥석 물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뭐, 개인적으로도 키도부인의 음식을 먹고 싶었다는 것도 이유였다.
집안으로 들어서며 키도에게 물었다.
“어시들은?”
“화실에.”
지금 시간은 저녁 8시가 조금 넘었다.
내가 알기론 아침 일찍부터 일을 시작한다고 했으니까 꽤나 작업시간이 길어진 모양이다.
“요즘도 바쁜가 보네.”
“뭐, 만화가 화실은 바쁜 게 정상이지. 너희처럼 그렇게 여유부리는 쪽이 이상한 거라고.”
“여유라니, 왜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도 나름 바빠.”
내 말에 키도가 콧방귀를 뀌었다.
“휴일은 무조건 쉬고, 평일도 일반회사시간으로 일한다며. 세상에 그런 만화화실이 어디 있냐? 설마 한국은 모두 그런 거야?”
“그건 아니지. 한국도 화실생활은 빡세니까.”
“그럼 너희 화실만 그렇다는 거네?”
“다 확인해본적은 없지만, 대충 비슷할 거라 생각해.”
“완전 여유만만이구만. 천국이야, 천국.”
“천국은 아니지. 이게 기본이니까.”
“그 기본을 지키는 게 힘드니까 하는 말이지. 확실히 만화가도 그렇고 어시들도 그렇고 특별한 인간들만 모와 놨다니까. 정말이지, 그런 건 부럽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화통하게 웃는다.
그때 키도부인이 우리를 불렀다.
“이쪽으로 오세요. 식사는 준비 되었어요.”
부엌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 때문에 갑자기 입안에 침이 고인다.
선희도 냄새를 맡았는지 서둘러 그녀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간다. 종종걸음으로.
나도 배가 고파서 그런지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식탁위에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있다.
“어시들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다른 분들은 아까 식사를 모두 끝냈어요.”
“아. 네.”
하긴 저녁식사를 하기엔 늦은 시간이긴 하지.
그나저나 처음 보는 음식들이 상당히 많다.
얼핏 봐도 일본음식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키도부인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프랑스 요리에요. 요즘은 이게 유행이랍니다.”
“프랑스 요리요?”
“네. 음식 먹는 법을 가르치는 곳도 있는걸요. 저는 만드는 것만 관심이 있어서, 참석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 맛있어 보이네요. 냄새도 좋고.”
물론 프랑스 요리를 먹어본 적은 거의 없지만.
“요리 실력이 부족해서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아무쪼록 부족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당신 실력이 부족하다니, 말도 안 되지. 요즘 우리 어시들 살찐 거 다 당신 책임이라고.”
“어머, 호호.”
아까부터 요리들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선희가 시선을 음식에 고정시킨 채 말했다.
“먹어도 돼요?”
“아, 미안해요. 어서 먹어요. 배고프죠?”
“네.”
그렇게 대답한 선희가 서둘러 음식을 자그만 입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한다.
그런데 저 요리,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였지?
그러다가 갑자기 떠올랐다.
이거······, 라따뚜이다.
픽사 애니중 동명의 작품 제목이었던 그거.
마지막에 평론가가 먹고 어릴 적으로 강제 소환되었던 그 요리다.
예전에 이 애니를 보고나서 요리에 대한 궁금증으로 찾아본 적이 있는데, 프랑스에선 꽤 소박한 요리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애니에서 나온 것 보다는 양이 많았고, 선희도 입에 넣더니 꽤 마음에 들었는지 단숨에 접시를 다 비워버린다.
“라따뚜이가 입에 맞나보다.”
내 말에 키도부인이 깜짝 놀랐다.
“어머, 이 요리 아세요?”
“아, 네. 먹어본 적은 없지만, 보긴 많이 봤어요.”
“어머, 만화밖에 모르는 바보가 아니군요. 의외에요.”
“네?”
“어머. 내 정신 좀 봐. 빨랫감을 들여놓는다는 걸 깜빡했네.”
키도부인이 그렇게 말하며 웃더니 서둘러 거실 쪽에 붙어있는 위층계단으로 올라간다.
이번엔 머리를 홱 돌려 키도 쪽을 바라봤다.
키도가 부인의 말을 들었는지, 열심히 라따뚜이를 먹다가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물을 들이키며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 부인도 참. 어디서 그런 황당한 소리를 듣고 와서는.”
“······.”
“혹시 네 인터뷰를 봤나?”
“·······.”
“어이쿠, 이것도 참 맛있어 보이네.”
키도가 다른 접시를 자신 앞에 끌어가서는 다시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도 선희는 자신 앞에 있는 접시들을 모두 비우고 중앙에 있는 음식들을 가져다 먹기 시작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쟤는 그냥 먹방 그 자체다.
그 모습을 본 키도가 웃으며 물었다.
“어때? 요리가 입맛에는 맞아?”
“······응.”
씹던 것을 삼키고는 대답하며 다시 먹는 것에 열중한다.
“야, 천천히 먹어.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줄 알겠다.”
내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말하면서도 먹어치우는 속도는 여전하다.
얘는 정말 만화 안했으면 푸드파이터를 했어야 할 팔자다.
지금은 푸드파이터가 별로 없지만, 미국에는 아마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쪽으로 진출을······.
아,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건지.
내가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있을 때 키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대단하던데. 전에 사인회 때보다 더 많았어. 그런데 그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본인 사인회도 아닌데, 무슨 사람이 그렇게 몰리는지. 팬 동원력만큼은 최강이라니까. 하여튼 부럽다, 부러워.”
“형은 사인회 귀찮다고 하지 않았어?”
“물론 귀찮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부러운 건 부러운 거야.”
욕심은 많아가지고.
“나 저거 먹어도 돼?”
“어. 그래. 다 먹어도 돼.”
키도의 대답에 다시 알 수 없는 고기요리를 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키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하자 거실 쪽에서 키도부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가 나가볼게요.”
분명 2층으로 올라간 줄 알았는데, 언제 내려왔지?
확실히 이 집안에서 만큼은 홍길동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잠시 후 누군가와 함께 들어왔다.
“손님 오셨어요.”
키도부인을 따라 들어온 사람을 보고는 키도가 깜짝 놀랐다.
“어? 니시다.”
“안녕하세요. 키도 선생님.”
“자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요. 써니 선생님이랑 텐겐 선생님 때문에 왔죠.”
우리 때문에 왔다고?
어떻게 알고?
그가 우리를 보고는 곧바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써니 선생님은······, 식사 하시느라 바쁘시네요. 하하.”
선희도 그제야 니시다가 들어온 걸 보고는 입속에 뭔가를 가득 채운채로 머리를 끄덕이며 인사한다.
입속에 든 것 때문에 뭔가 말을 하려다 포기한 얼굴이다.
“식사 안하셨으면 같이 하세요.”
“네, 사모님.”
그렇게 대답한 니시다가 의자에 앉았다.
“자네는 이 시간까지 뭐하느라 밥도 안 먹었어? 화실 식구들 밥은 제때 챙겨주는 거야?”
“너무하시네요. 그럼 제가 어시들 밥이라도 굶긴다는 겁니까? 그리고 전 밥 먹고 왔습니다.”
“그런데 뭘 또 더 먹으려고.”
“이런 건 평소에 먹기 힘들잖아요. 한 그릇 정도라면 더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를 둘러본다.
하지만, 어지간한 건 선희가 이미 다 먹어치운 상태라 특별히 먹을 게 보이진 않는다.
“확실히 식성이 좋으시네요.”
“더 있어요. 잠시 만요.”
키도부인이 접시를 더 꺼내려하자 선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아, 그래요. 호호.”
선희, 이 녀석 위는 블랙홀인가?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혹시 사인회 때 자네도 있었어?”
“설마요. 그랬다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진 않죠.”
“그럼?”
“아카기 씨에게 물어봤죠. 오늘 서점에서 사인회가 있었다고 어시에게 들었거든요.”
“아.”
니시다가 이번엔 날 돌아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사인은 내일이라고 들었는데, 왜 오늘 사인회를 하신 겁니까?”
“얼떨결에요.”
“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대답이긴 하다.
그때 키도가 끼어들었다.
“전처럼 말이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니시다가 피식 웃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런 거지.”
그때 갑자기 니시다가 내 쪽으로 머리를 쭉 내밀며 조용하게 말했다.
“아, 그보다 따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저한테만요?”
“네. 중요한 얘기거든요.”
“이봐, 내가 있을 때 하라고.”
“그건 곤란합니다만. 이건 텐겐 선생님과 따로 얘기······.”
“나랑도 관련 있는데 내가 모른 척 할까봐?”
“······.”
키도와 관련 있는 얘기?
“신타로 얘기잖아. 신타로. 내 말이 틀려?”
“······그렇습니다.”
“이거 봐, 이거 봐.”
키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보나마나 신타로 자기 식구로 만들겠다는 심보라니까.”
“실력 있는 사람을 얻으려는 게 잘못된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한 니시다도 나를 본다.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다.
“이참에 선생님께서 확답을 해주시면······.”
“그래. 이참에 완전히 결정을 짓자고. 유난. 넌 어때?”
키도까지.
진짜 이 사람들이 뭐라는 거야?
내가 왜 신타로의 거취를 결정해?
그런데 선희도 그게 궁금했는지 입을 오물거리며 날 빤히 쳐다보고 있다.
*
다음날 아침.
지로가 아침 일찍 찾아와서 한 말에 잠이 확 깼다.
“네? 사인행사가 취소되었다구요?”
“네. 서점 측에서 오늘은 곤란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왜요?”
“어제 팬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서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랍니다. 서점의 규모 상 팬 사인회를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입장이더군요.”
“······.”
뭔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서점 입장에서는 나름 이벤트 같은 일이긴 하지만,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그런 결정을 한 모양이다.
하기야, 어제만 해도 실내뿐만 아니라 바깥 인도까지 사람이 몰려 난리도 아니었지.
“그럼 팬 사인회는 그냥 물 건너 간 건가요?”
“아뇨. 그래서 오늘 부랴부랴 새로운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새로운 장소요?”
“네. 일본무도관입니다.”
“일본무도관요?”
야와라에서 자주 등장하던 그 체육관?
“네.”
“거기 너무 넓지 않습니까?”
“거기 내일부터 가면라이더 관련 행사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15주년이거든요. 이참에 써니 선생님의 사인회도 거기서 같이 열었으면 해서요.”
“가면라이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