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51화 (251/425)

공개 사인회 (3)

전처럼 지로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점심때쯤 그의 맨션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타고 도쿄 시내로 나갔다.

선희는 여전히 번화한 도쿄 시내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뭔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어?”

깜짝 놀란 나는 곧장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여기 좀 세워주세요.”

“여기 말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택시가 멈추자 곧장 돈을 낸 뒤 선희와 함께 내렸다.

선희는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탓에 내 얼굴을 멀뚱거리며 바라본다.

“왜?”

“아, 저기.”

내가 도로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건물에 붙어있는 광고용 포스터를 가리키자 선희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타카하시 루미코 팬 사인회]

“타카하시 루미코? 그게 누군데?”

“몰라? 화실에 있는 ‘시끌별 녀석들’이랑 ‘메종일각’을 그린 만화가.”

“아.”

그제야 기억했는지 머리를 끄덕인다.

하지만 별로 관심은 없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선희야 만화에는 관심이 많아도 정작 만화를 그린 작가에 대한 관심은 없는 편이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다르지.

군 입대 전에 일본에 갔을 때 실제로 루미코 여사의 사인회에 간 적이 있을 만큼 좋아하는 작가니까.

그때는 이미 루미코 여사도 중년을 넘어가고 있던 상황. 그러다보니 젊은 시절의 그녀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이 86년이니까, 대충 29살 정도려나?

가보고 싶다.

“우리, 저기 가 보자.”

“사인회?”

“어.”

내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그런 모습을 빤히 바라보더니 곧 머리를 끄덕인다.

“알았어.”

뭐야, 이 녀석.

지금 저 눈빛, 뭐지?

“왜, 그렇게 날 쳐다보냐?”

“오빠는······, 만화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서.”

“넌, 아니야?”

“나도 그렇긴 하지만······.”

하기야, 이 녀석이 좋아하는 방식과 내 방식이 같진 않지.

만화 그리는 것 자체를 좋아하니까.

그나저나 서점 주위에 사람들이 엄청 몰려있다.

젊은 남녀가 잔뜩 몰려 있고 분위기를 보니 대부분 사인회 때문에 몰려든 사람들이 분명하다.

일단 선희를 데리고 맞은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서점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서점 직원 몇 명이 나오며 몰려든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줄을 서 주세요. 안으로 들어가면 붐비니까. 저기 그쪽 길을 좀 터주세요. 사인회와 관계없는 분들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질서를 잘 지켜주세요.”

“그쪽 분 옆으로 서 주세요.”

남자 직원이 나와 선희를 보며 소리친다.

와 이거 사람들이 장난이 아니네.

루미코 여사야 초창기부터 워낙 엄청 인기가 많았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막상 사인회가 열린다는 서점 인근에 와서 보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아, 이거 어쩌지? 사인은 받고 싶은데 사람이 너무 많다.”

“······.”

“줄서서 기다리면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고. 오늘 가봐야 할 곳이 많은데.”

그때 선희가 머리를 감싼 채로 고통 받고 있던 날 툭툭 건드렸다.

“······왜?”

“그럼, 저기는 어때?”

“뭐?”

선희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바로 옆 건물 벽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광고용 포스터.

그런데 그곳엔 익숙한 그림과 함께 이곳처럼 ‘사인회’라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어?”

그림이 익숙하긴 하지만, 혹시나 싶은 생각에 포스터 근처로 다가갔다.

[‘궁극초인R 작가 유우키 마사미 사인회]

궁극초인R?

유우키 마사미.

어째 그림이 익숙하다 했더니.

바로 인기 만화 ‘패트레이버’의 만화가다.

날짜를 확인해야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포스터 쪽으로 다가갔다.

“어? 오늘이네? 어디지?”

장소를 확인하니 근처에 있는 대형서점이다.

그러고 보니 서점이름이 익숙하다.

지로에게 들었던 바로 그 서점이다.

“저긴 내일 우리가 사인회를 하는 곳인데.”

이것도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포스터를 보다가 선희를 돌아봤더니 얘도 뭘 생각하는지 턱을 긁적이며 멍한 얼굴이다.

“뭘 생각해?”

“저 사람······.”

“왜?”

“나 저 사람 알아.”

“그래?”

“철완버디 그렸잖아.”

“오, 우리 선희 용한데. 그것도 알고.”

의외다.

선희가 관심을 가지는 작가가 있었다니.

“너도 좋아하는 작가야?”

“아니.”

“뭐? 그럼······.”

“오빠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

결국 내가 좋아해서 알고 있었다는 거군.

하기야, 집에 있을 때도 이 양반 만화를 많이 보긴 했으니까.

어쨌거나 얜 역시 만화가에 대해선 전혀 무관심이다.

처음 공부용으로 사줬던 동몽과 아키라마저도 그림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정작 작가인 오토모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너도 패트레이버를 본다면 마음에 들지도 모르는데.”

“패트레이버가 뭐야?”

“아, 뭐. 조만간 보게 될지도 모르는 만화.”

“······?”

아직 패트레이버가 연재를 시작한 건 아니지만, 이미 몇 년 전부터 애니메이션 기획까지 잡아둔 작품이다.

그러니까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기획은 되어 있는 상태다.

물론 이 기획이 받아들여진 제작사는 아직 없지만.

그 때문에 조만간 만화연재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애니메이션 화 되게 되고, 인기도 얻게 된다.

음, 메카닉 디자인을 맡은 사람이······, 자붕글로 데뷔한 이즈 부치 유타가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튼 그와 합작으로 태어난 패트레이버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인기 만화로 자리 잡게 된다.

물론 TV와 OVA, 그리고 ‘공각기동대’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오시이 마모루가 감독한 극장판도 상당히 주목을 받게 된다.

근 미래에 레이버라는 탑승형 로봇 기계들을 발달로 관련 범죄를 전문으로 다루는 경찰인 패트레이버 소대의 이야기가 주 내용이다.

근 미래라고는 하지만 1998-1999년의 세기말.

2018년을 살다온 나로서는 머나먼 과거의 배경일 뿐이지만.

거기다 탑승형 기계는 2018년에도 없는 물건이다.

물론 두발짜리 대형 탑승로봇이 개발을 시작하고 있다는 건 인터넷을 통해 본 기억이 있긴 하다. 그게 실용화 되려면 까마득한 미래일 테지만.

아무튼, 패트레이버는 SF이지만 일상물에 가까운 느낌이라 상당히 좋아하는 만화중 하나다.

“저기도 사람이 득실거리는 거 아닐까?”

“······.”

“일단 가보자.”

그런데 막상 사인회가 열린다는 서점으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모르고 왔다면 애초에 사인회라는 행사가 열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다.

“여기, 왜 이렇게 썰렁해?”

“······.”

“3층 맞지?”

“응.”

“그럼 어디에 있는 거야?”

소변도 마려운데. 쯥.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찾다가 직원에게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즈음.

“저기.”

선희가 가리킨 곳에 사인회 방향이라는 화살표 그림이 보인다.

아이고, 안 되겠다.

“너 먼저 가 있어라. 화장실에 들렀다가 갈 테니까.”

“알았어.”

3층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가 곧장 화살표를 따라 갔더니 한쪽 끝에 사인회로 보이는 행사가 눈에 들어온다. 생각보다 조촐한 느낌인데다가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이 이렇게 없다는 건······, 아직 시작을 안했나? 설마 벌써 끝난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선희가 어디에 있나 싶어서 살펴보니 몇 사람이 모여 있는 곳 앞에 보인다.

서둘러 다가가서 물었다.

“여기서 뭐해?”

“사인 받으려고.”

“뭐?”

그러고 보니 몇 사람 없어서 몰랐는데, 여기가 사인을 받기 위한 줄이었구나.

그리고 선희 앞을 보니, 정말로 만화가가 앉아있다.

바로 패트레이버, 아니 지금은 궁극초인R의 작가 유우키 마사미가.

지금이라면 아직 20대려나? 역시 젊다.

예전에 인터넷으로 봤을 땐 60대초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젊은 시절의 유우키 마사미가 갑자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더니 곧장 뒤쪽에 서 있는 남자에게 뭔가를 묻는다.

잘은 모르지만 뭔가 심각한 얘기를 주고받는 느낌인데.

뭐지? 무슨 일 있나?

그런데 갑자기 그가 놀란 얼굴로 변하더니 우리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와 선희를 번갈아 쳐다본다.

뭐야? 설마 우리를 알아본 건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그가 조용하게 물었다.

“저기······, 혹시. 삼사라?”

“콜록!”

이 사람 뭐야?

우리를 어떻게 알아본 거지?

그때 그가 주변을 슬쩍 돌아보더니 노트 한권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노트가 평소 선희가 쓰던 연습장과 비슷하다. 아니, 비슷한 게 아니라, 선희 거네.

그제야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어떤 식으로든 선희의 그림을 본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혹시나 해서 물었을지도······.

“맞죠?”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곧바로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아, 이런.

“역시, 그렇군요. 저기 잠시 만요.”

그렇게 말하더니 의자에 앉아있던 유우키 마사미가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린다. 그리고는 곧바로 신작 삼사라 10권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 나온 삼사라 산거에요. 여기에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인펜을 선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선희가 나를 슬쩍 바라본다.

‘해도 괜찮아?’하는 눈빛으로.

이미 써니라고 밝혔는데, 안 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곧장 매직을 받아 그가 내민 삼사라 단행본에 사인을 해준다.

이거, 사인을 받으러 왔는데, 도리어 사인을 해주고 있으니 참.

아무튼 사인을 받은 유우키 마사미가 즐거워하며 인사를 한다.

“고맙습니다. 써니 선생님. 이건 죽을 때까지 보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어? 진짜 이 여자 분이 삼사라 작가인 써니에요?”

“정말이야?”

“말도 안 돼!”

선희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난리가 나 버렸다.

그런데 그 얘기가 급속하게 주변으로 퍼지더니 곧 먼 곳에서 빠르게 이곳으로 다가오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까 유우키 마사미와 짧게 얘기하던 남자 선희 앞을 가로막더니 곧장 테이블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그러자 눈을 크게 뜬 선희가 날 돌아본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곧바로 내가 남자에게 물었다.

“누구신데요?”

“써니 선생님과 동행하시는 분이십니까?”

“네.”

“아, 저는 유우키 마사미 선생님의 담당 편집자 오쿠보라고 합니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일단 두 분 다 안쪽으로 들어가세요.”

“왜요?”

“주변을 보세요.”

어느 샌가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선희를 향해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일단 주변이 정리될 때까지 안에서 기다리세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그의 안내로 테이블 뒤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직원 휴게실 같다.

벽 쪽엔 자판기도 몇 대 보이고, 의자와 테이블도 몇 개 놓여 있다.

오쿠보가 문을 닫기 전에 우리에게 말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뭐.”

내 말을 듣자마자 그가 곧 문을 닫았다.

밖이 약간 소란스러운 것 같기는 하지만, 조용해지면 밖으로 나가면 되겠다 싶어서 일단 휴게실 의자에 앉았다. 선희도 의자에 앉더니 별말 없이 연습장을 꺼내 그림을 그리고 있다.

“뭐 그리냐?”

“칼파나.”

“아.”

얘는 별일 없으면 늘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는데, 오늘은 칼파나 그림에 꽂힌 모양이다.

선희가 그림에 빠져 있는 동안 자판기로 다가갔다.

“콜라 마실래?”

“응.”

캔 콜라 두 개를 꺼내 하나를 선희 앞 테이블에 두자, 따개를 따고는 홀짝거리며 계속 그림을 그린다.

그런 모습을 잠시 지켜보며 콜라를 마시고 있는데, 어째 밖이 점점 더 소란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더 시끄러워지는 것 같지 않냐?”

“······모르겠어.”

“그래, 넌 그림이나 그려라.”

“응.”

머리를 끄덕인 선희가 계속 그림에 열중해 갔다.

그러는 동안 난 밖이 신경 쓰여 슬쩍 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확실히 문 옆으로 다가가니 그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그리고 슬쩍 문을 열려고 하는데 그때 문이 확 열린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에서 강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야!”

이마를 힘차게 문지르는데 오쿠보가 미안해하며 물었다.

“아, 괜찮으세요?”

“뭐, 괜찮아요.”

그런데 열린 문틈 사이로 엄청난 소음이 안으로 밀려 들려온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마치 돛대기 시장한가운데라도 온 듯한 느낌이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기에 써니 선생님이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서 서점 안은 물론 밖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네?”

아,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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