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50화 (250/425)

공개 사인회 (2)

사인회라.

안 그래도 이젠 한국인이라는 것도 알려진 상황이니 언제 기회 봐서 하자고 얘기는 해두기는 했었지만 특별히 날짜를 정해 두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소설이랑 삼사라 단행본 10권이 출간되는 시점이고 이걸 또 기념하는 자리라면 시기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 전부터 사인회를 요청하는 엽서도 많이 있었고, 저희 편집부뿐만이 아니라 영업부 쪽에서도 이번 기회에 제대로 사인 이벤트를 열면 그 파급효과가 클 것이라 기대하고 있어서요.

출판사에서 저렇게 판단하고 있다면 시기는 나쁘지 않겠지.

“알겠습니다. 일단 선희와 이야기를 해보고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일단 학업문제도 있으니까요.”

- 네, 알겠습니다.

* * *

금요일 저녁 김포국제공항.

“나도 사인은 만들어 놨어. 같이 가면 잘 할 수 있는데, 뭣하면 선희 대신할 수도 있고. 혹시 모르잖아. 선희가 갑자기 화장실이 급할 때······.”

경희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한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혀를 찼다.

“쉰소리 하지 말고 너는 그냥 내일 얌전히 학교나 가.”

“히잉, 그래도 부러우니까 그렇지. 선희는 벌써 일본에 여러 번 갔는데.”

“걱정하지마라, 너 대학 들어가고 나면 자주 같이 가면 되니까.”

내 말에 경희가 급 반색을 한다.

“정말이지?”

“그래.”

“약속!”

손가락까지 내밀자 엄마가 경희 등짝을 찰싹 후려친다.

오, 사운드가 찰지다.

꽤 아플 것 같은데.

역시 경희가 온몸을 마른오징어 불에 굽히듯 비틀어 댄다.

“아야! 왜?”

“너는 정말. 꼭 이럴 때 호들갑떨어야겠니?”

“······힝.”

“얼른 가거라, 얼른.”

“맞아, 비행기는 일찍 기다려야 한다며.”

엄마랑 누나가 서둘러 가라며 손을 휘적거린다.

“응, 알았어. 이제 갈게.”

우리가 서둘러 걸어가자 경희가 소리쳤다.

“꼭, 맛있는 거 사 와! 알겠지?!”

찰싹.

“아야!”

* * *

도쿄 시내의 한 서점.

실내에선 작은 칸막이를 세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배가 불룩한 중년의 남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이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한산하네. 괜찮겠어요?”

그가 말하며 바로 앞에 있는 비쩍 마르고 키가 큰 남자에게 묻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죠. 인근에서 다카하시 선생님이 사인회를 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같은 소년 선데이만환데. 날짜라도 다른 날로 하지. 인지도 차이가 나도 너무 나······.”

그렇게 말하다가 멈칫하더니 곧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했다.

“아무튼 너무 하잖아요.”

“뭐, 어쩌겠어요. 이렇게 시간이 잡혔으니.”

그런 반응이 어이가 없는지 뚱뚱한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래도 담당 편집자면서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런가요?”

그렇게 대답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던 뚱뚱한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가 곧 인근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저쪽 사인회장도 가봐야 하니까, 먼저 가볼게요.”

“네. 그러세요.”

그가 사라지고 나자 편집자는 곧바로 작업 중인 사람들에게 다가가 뭔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곧 시계를 보더니 머리를 끄덕거렸다.

“올 시간이 되었네.”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잠시 후, 먼 곳에서 긴 머리의 붉은색 체크무늬 남방셔츠 차림의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아, 여기요. 여기.”

편집자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긴 머리의 남자가 그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다가온다.

“시간에 딱 맞춰 오셨네요.”

“네. 그런데 여기서 사인하면 되는 거예요?”

작업 중인 곳을 힐끔 보며 남자가 물었다.

“네. 작업하시는 분께 방금 물어보니까, 20분 정도면 끝난다고 하더군요. 뭐, 지금 5분정도 지났으니까, 대충 15분정도면 완성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할 준비 하면 되는 거죠?”

“네. 필요한 건 다 준비해 뒀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별로 안보이네요. 역시 다카하시 선생님의 사인회랑 시간이 겹쳐서 그런 거겠죠?”

젊은 만화가가 실망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편집자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인지도 차이야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저쪽은 ‘메종일각’이랑 ‘시끌 별 녀석들’의 다카하시 루미코 선생님이니까요. 겨우 ‘궁극초인R'로는 상대가 안 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거예요.”

“······.”

“뭐, 그래도 최강의 인기작가 아닙니까. 그냥 재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거참, 위로가 되는 말이네요. 그리고 철완버디도 있는데.”

“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하하.”

편집자가 특유의 묘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만화가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늘 보는 모습이긴 하지만, 정말 속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무튼 그래도 최초의 사인회이니만큼 의미 있는 자리라며 주변을 둘러본다.

데뷔한지 5년이 넘어서야, 사인회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동안 나름 괜찮은 성과를 낸 작품도 있었다.

철완버디, 그리고 지금 연재중인 궁극초인R도 그렇고.

물론 대중적인 인기는 좀 미약한 편이지만, 나름 만화를 좋아하는 모임에선 꽤나 인지도도 있다.

물론 지금 분위기를 보니 별로 그런 것도 아니지만.

“준비 대충 끝났어요. 의자에 앉으세요.”

편집자의 말에 만화가가 자리에 앉았다.

“아, 네.”

그때였다.

수수한 남방차림의 사람들이 여러 명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이 그가 앉아있는 자리 쪽으로 다가왔다.

“와, 진짜 멋지다. 사토 씨가 인기 만화가라는 게 실감나요.”

“지금 사인회 시작한 거야?”

“아니, 뭐. 시작이고 뭐고, 사람이 오면 바로 시작이지.”

“아.”

“······.”

다가왔던 지인들이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가 눈치를 보더니 곧장 들고 있던 책들을 내밀었다.

“그럼, 기념으로 나부터 해줘. 여기.”

그렇게 말하며 지금 연재중인 ‘궁극초인R’의 단행본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만화가가 제일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사인을 멋들어지게 썼다.

유우키 마사미(ゆうきまさみ).

“오, 사토 씨 사인 멋지다.”

“연습 많이 했거든.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유우키 마사미니까, 여기서 만이라도 본명은 좀 삼가 해줘,”

“아, 미안. 유우키 마사미 씨.”

“이번엔 나도 해줘.”

“다음엔 나.”

그렇게 말하며 지인들은 하나둘 줄을 서며 사토의 사인의 받기 시작했다.

그때 젊은 남자 한명이 그들 사이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사토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 유타카. 바쁘다면서 왔네.”

“어. 그래도 사인회인데, 와봐야지.”

그런데 그런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이즈 부치 선생님.”

“누군데? 누군데?”

“단바인 말이야. 단바인. 거기 메카닉 디자이너.”

“어? 정말?”

“우리 유우키 선생님이랑 친구잖아.”

“아, 맞다.”

그렇게 말한 지인들이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었다.

“사인 해주세요. 사인요.”

“저도요.”

“아니, 이것들이.”

사토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 모습을 보며 유타카가 웃었다.

“네. 저라도 괜찮으시면.”

“아니에요. 저희들은 선생님을 더 좋아한답니다.”

“아, 저는 선생님이 아닌데.”

“저희에겐 선생님이죠. 저희들 모두 메카닉 광인데요, 뭐.”

“하하,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유타카가 간단하게 사인을 해준다. 그리고는 곧 시계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바빠서 회사로 가봐야겠다.”

“뭐야, 토요일인데도 바빠?”

“야,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토요일이 어딨어?”

“아, 그래 와줘서 고마워.”

“그래.”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와, 오늘 운 좋았어.”

“그러게. 좋아하는 메카닉 디자이너도 만나고.”

“난, 자붕글 때가 좋았는데.”

“난 가리안.”

“건담 쪽은 안한대?”

“모르지. 앞으로 건담이 계속 나오면 할지도.”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사토가 인상을 팍 썼다.

“도대체 누구 사인회에 온 건지 모르겠네. 모두 내 친구들 맞아?”

그의 반응에 모두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게 좀 더 인기를 얻었어야지.”

“맞아.”

그때 지인 중 한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다 곧 얼굴이 밝아졌다.

“아, 저기 사람들이 온다, 와. 만화책 보니까, 맞네.”

사람들이 단행본을 들고 오는 모습을 보며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우리가 바람을 좀 잡아줘야 된다니까.”

“맞아, 맞아.”

“그런 말 들으니까, 어째 서글프네.”

“아, 미안. 그래도 오늘은 어쩔 수 없잖아. 근처에서 다카하시 선생님이 사인회를 하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거기에 비하면 우리 유우키 씨는······.”

“더 이상 말하지 마. 더 괴로우니까.”

그때 사람들의 그들의 뒤에 줄을 서며 점점 사람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비슷한 복장의 남자들이고, 그나마도 숫자가 그리 많지도 않다.

그 모습을 본 사토가 한숨을 푹 쉬었다.

겉모습만 봐도 이들이 만화에 열중하는 집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팬들인데, 표정 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

사토는 이내 웃으며 지인을 제외한 첫 번째 팬을 위해 웃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팬입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인을 시작했다.

대략 20여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대부분 칙칙한 복장의 남자들.

그런데, 그 사이에 눈에 띄는 소녀가 보인다.

얼핏 봐도 아담한 체형에 엄청 예쁜 여자애다.

대충 고등학생쯤 되었으려나?

그런 여자애가 남자들 사이에 서 있으니 튀는 건 당연하다.

사토 인근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지인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와, 엄청나게 예쁜 미소녀다.”

“오, 그러게. 사토 씨의 팬인가?”

“사인을 받으려고 왔으니 당연히 팬이겠지.”

“아닐지도 몰라요.”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만화가의 사인이 있는 만화책을 팔려고 할지도.”

“야, 사토, 아니 유우키 씨가 그 정도 만화가는 아니지.”

“아, 그런가?”

사토가 사인을 하다말고 그들을 홱 돌아봤다.

지인이라는 인간들이 자신을 확인사살까지 하고 있으니.

하지만 사인을 멈출 수는 없는 일.

다시 표정관리를 하며 사인을 계속한다.

그러면서도 저도 모르게 미소녀에게 눈이 간다.

그런데 얼핏 보니, 미소녀는 줄을 선 상태로 계속 뭔가를 계속 깨작거리고 있다.

글자를 쓰는 건지, 그녀의 손이 굉장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뭘 하는 걸까?

어쩌면 시험을 앞두고 있는 학생일지도 모른다.

바쁜 공부시간을 쪼개 찾아온 미소녀 팬이라.

역시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새 그녀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미소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녀가 들고 있던 연습장이 사토의 테이블 위에 툭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는 얼른 사토가 집어 들며 말했다.

“어쿠, 떨어뜨리셨네요. 여기······.”

그렇게 말하려다 펼쳐졌던 연습장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갔다.

그리고 흠칫하고 놀랐다.

공부 중일 거라고 생각했던 연습장엔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그림이었다.

“······어, 칼파나?”

놀랍게도 그림은 유명한 만화 다크 프린세스의 주인공 칼파나였다.

그런데, 그 그림이 너무 원작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아니, 그냥 써니가 그렸다고 해도 믿을 만큼의 그림이다.

하지만, 그림만 보고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어색하게 웃으며 그것을 돌려주려는데, 그때 남자 한명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

“······?”

“······.”

그런데 갑자기 들려온 외국어에 사토가 깜짝 놀랐다.

정확한 건 모르지만, 대충 한국어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들 대화에서 남자가 미소녀에게 써니 비슷하게 부른 것 같다.

그리고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삼사라, 다크 프린세스의 작가가 써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거기다······.

뒤를 홱 돌아보더니 담당 편집장를 발견하고는 곧장 물었다.

“저기, 내일 써니 선생님 여기서 사인회 있다고 하셨죠?”

“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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