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49화 (249/425)

공개 사인회 (1)

-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냐?

“뭐?”

- 적에게 너무 큰 무기를 안겨 줬잖아. 그 때문에 내가 지금 곤란하게 되었다.

잔뜩 흥분한 키도의 음성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다.

적은 뭐고, 무기는 또 뭐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갑자기 무슨 엉뚱한 말이야? 자세하게 말해 봐.”

- 니시다 말이야, 니시다. 그 친구에겐 신타로를 보내지 않았어야 한다고. 메카닉 디자인이 그렇게 능숙할 줄은 정말 몰랐거든.

“아.”

이제야 적이 누군지, 그 무기라는 게 뭔지를 알아채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진심의 남자야, 현대물이라 상관없지만, 니시다의 작품인 에스퍼 존은 장르가 SF, 거기다 우주선이나 미래 도시의 경우 상당히 자주 등장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덕분에 에스퍼존의 그림 퀄리티가 상승해 진심의 남자 순위가 위태로워진 모양이다.

실제로 며칠 전에 니시다에게서 전화가 온 적이 있다.

- 고이즈미 씨, 어시로서 너무 마음에 듭니다.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땐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타로가 진짜로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자신의 화실에 계속 머무르면 안 되겠냐는 제안도 했단다. 물론 어시비도 상당히 올려준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신타로는 내가 소개해 준 키도를 배신할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쓸데없는 걸로 의리 지킬 필요 없는데.

나야, 어느 쪽에서 눌러앉아도 별로 상관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형 말은, 니시다 선생님한테 주긴 싫고, 형 화실에선 별로 쓰임새가 없다는 거야? 계륵 같은 존재?”

내 말에 키도가 곧장 버럭 소리쳤다.

- 무슨 소리! 신타로 그 친구 현대배경도 엄청 잘 그리는데. 우리 화실 녀석들 근성은 있는데, 솔직히 배경 그리는 센스는 구리잖아. 그런데 신타로는 다르더라고. 그림 센스만큼은 발군이더라니까.

“그래도 형네 어시들을 그렇게 말하는 건 좀······.”

- 아.

본인도 지금 화실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모양이다.

- 뭐, 센스는 좀 구려도 실력이야 우리 어시들이 월등하긴 하지.

이젠 늦었어, 인간아!

말하는 폼을 보니까, 주변 어시들이 다 들은 모양이니까.

- 크으음, 하여튼 이참에 그 친구 집도 우리 화실 근처에 구해줄 생각이야. 아예 저쪽에 넘어가지 않게. 니시다 녀석, 신타로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 나도 곤란하거든.

오, 그런 것도 알고 있나?

역시 키도는 눈치가 빨라.

아무튼 두 만화가가 신타로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어차피 신타로도 데뷔하기 전까진 가족부양을 위해 안정적인 생활비가 필요할 테고.

지금 작업 중인 단편이 통과하더라도 작가로 데뷔하려면 적어도 1년은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음, 아무튼 두 사람에게 인정받고 있다니 다행이다.

키도와 니시다라면 어시 비를 쩨쩨하게 책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거기다 기회가 되면 각자 담당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여줄 기회도 있을 것이고.

그런데 키도가 계속 아쉬운지 엉뚱한 소리를 한다.

- 그냥 우리 화실에 고정하면 안 되겠느냐?

“그건 본인한테 얘길 해야지. 나야, 그냥 소개만 시켜줬을 뿐인데.”

- 네가 그렇게 애매하게 말한 덕분에 자리를 못 잡고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확실하게 우리 쪽으로······.

“으이그, 그런 건 좀 알아서들 하세요.”

- 그러지 말고······.

“거, 그 얘긴 그만 합시다!”

- ······.

처음 부탁할 땐 ‘어시가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부탁이니까 받아준다’는 식으로 말하더니, 이젠 본인이 더 안달이 났다.

아무튼 덕분에 자신의 실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그건 뭐, 잘 된 일이라고 해야지.

그렇게 키도가 내게 몇 번 더 찔러보더니 씨도 안 먹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포기했다.

한숨을 쉬고 난 키도가 이번엔 다른 이야기를 했다.

- 아, 그리고 이번에 영 히어로 단편으로 나온 ‘4구의 지옥’ 그거, 당구는 잘 모르지만 꽤 재미있었다. 우리 화실 식구들도 재밌다고 하더구나. 확실히 이제까지 나오던 것들과는 상당히 다른 감성의 만화라 특이하기도 했고.

“안 그래도 아카기 씨가 그러던데, 편집부 반응도 괜찮았다고 했어.”

“재능 있는 친구들이네. 네 주위엔 실력자들이 많구만. 부럽다.”

추양구와 박상식의 데뷔작은 그런데도 괜찮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4구의 지옥 후속편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물론, 서너 편짜리 짧은 이야기로.

- 이참에 나도 그 친구한테 도움 좀 받아볼까? 스토리도 슬슬 막히고 하니까. 경희도 이제 3학년이라 바쁘다고 아이디어를 별로 보내주지도 않는데.

“당연하지. 걔도 올해 대학시험이야.”

- 써니는?

“걘 걱정 안 해. 지금도 성적이 톱이니까.”

- ······.

“아무튼 도움이라면 상식이 형한테 물어는 볼게.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 그래. 잘 좀 말해주라. 요즘 내가 체력적으로 힘들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카락도 많이 빠지는 것 같고.

“이런, 머리 심어야 하는 거 아냐?”

- 너 이 자식······.

“아, 미안.”

그래도 머리카락은 건드리면 안 되지.

내가 경솔했다.

- 아, 그리고 진심의 남자 말이야. 영화사에 판권이 팔렸다.

“영화? 진짜?”

- 하하, 그래. 하지만 뭐 유명한 배우가 나오는 건 아니고. 그냥 조그마한 영화라더라. 계약이나 기타 세부적인 건 뭐 출판사에서 알아서 하는 거라서,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원작비도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내 작품 중 처음으로 나오는 영화라서 기대는 하고 있지. 뭐, 어쩌면 극장 개봉은 안하고 바로 비디오로 출시될지 모르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대는 되는지 목소리가 잔뜩 흥분돼 있다.

- 나중에 비디오 나오면 내가 보내줄게.

“고마워.”

- 그리고 신타로 말인데, 네가 좀······.

“전화 끊는다.”

- 망할 녀석······.

하여튼 미련을 못 버려.

아무튼 키도와의 통화를 끝내고 콘티작업 중이던 노트를 다시 펼쳤다.

요즘 삼사라는 슬슬 이야기의 완결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처음 구상했던 이야기는 거의 다 한 상황이라, 이젠 결말도 그리 멀리 않은 것이다. 굳이 억지로 늘리자면 늘리지 못할 건 업지만, 역시 계획한 대로 끝내는 것이 가장 좋은 결말이니까.

물론 다크 프린세스의 경우엔 연재가 느린 탓에 한동안 더 연재가 될 것이다.

후속 작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진행 중인데 마땅한 이야기가 떠오르는 건 없다.

뭐,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윤환아, 이거 좀 봐라.”

신문을 읽고 있던 실버가 갑자기 날 부른다.

“뭔데? 큰 뉴스거리라도 있어?”

그렇게 말하며 실버의 자리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손가락으로 자그마한 기사 한 곳을 가리킨다.

자세히 보면 보일 듯 말 듯 한 크기.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정도의 기사라는 거다.

아무튼 별 생각 없이 머리를 쭉 들이밀고 신문기사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 움찔하고 놀랐다.

“어? 이거······.”

놀랍게도 일본에서 연재중인 삼사라에 대한 기사다.

[일본 모 잡지에 인기리에 연재중인 만화 ‘삼사라’의 만화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인기 만화인 삼사라는······.]

뭔 비상한 관심까지야.

그보다 내용은 별로 길지 않고, 특별히 자세하지도 않다.

그저, 한국인 만화가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다.

만화라는 분야가 가진 위치 때문에 특별히 주목을 받지는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시대에 일본에서 활동 중인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둑계의 조치훈 명인 정도다. 바둑에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TV나 신문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조치훈을 알 정도로 유명인이니까. 거기다가 과거엔 야구선수인 장훈이나 레슬링의 역도산 정도랄까.

어쨌거나 만화가는 그 정도로 주목받기 힘든 직종인 것이다.

“대단하네. 신문에도 다 실리고.”

“왜요? 뭔데요?”

“신문에 뭐 났어요?”

“······?”

어시들도 우리의 대화에 관심을 가진다.

“우리 삼사라 얘기가 신문에 조그맣게 기사가 났어요.”

내 말에 어시들이 깜짝 놀란다.

“어? 정말요?”

“와, 진짜에요?”

사람들이 몰려들며 기사를 확인한다.

별로 읽을 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흥분한 표정을 기사를 읽느라 정신이 없다.

“한국 신문에서 우리 얘기하는 거 보니까 너무 신기해요. 일본에 실리는 건 이제 익숙해져서 크게 의식되지 않는데, 한국은 처음이라 그런가?”

“그래도 기사가 너무 작아서 좀 아쉽다. 나름 일본에서 잘 나가는 만화인데.”

“그러게. 조그마한 공장에서 일본으로 이만큼 수출해서 벌어도 훨씬 더 기사가 컸을 텐데.”

그 얘기를 듣던 실버가 콧방귀를 뀌었다.

“다음 달이면 5월이야. 올해도 보나마나 학부모 모임이니 어머니회니 하는 곳에서 또 학교 운동장에 모여 만화책 불태우지 않으면 다행이야. 바랄 걸 바래.”

“듣고 보니 씁쓸하네요.”

“만화가 폭력성을 키우고, 쓸데없는 망상에 빠지게 만든다고 몰아세우니까.”

“성적에도 방해된다는 거지.”

“그래도 요즘은 분위기가 전보다 많이 좋아졌잖아요. 만화전문 잡지도 슬슬 늘어날 분위기고.”

“맞아. 요즘 한국도 원고료가 예전보다는 많이 올랐다고 들었어. 코믹스 쪽도 슬슬 판매량이 늘어나는 모양이고.”

처음엔 어두운 이야기를 하다가 그래도 긍정적인 대화로 이어진다.

그들 말처럼 한국만화계는 지금 스타급 만화가들이 나오고 있고, 대박을 치는 만화가 출간되면서 슬슬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길어야 10년 정도.

무너질 땐 한순간이었다.

또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하네.

*

며칠 후.

집으로 소포가 도착했다.

보낸 곳은 에이엔샤, 경영의 왕 소설 판을 내겠다던 곳이다.

소포를 뜯어보니, 경영의 왕 첫 편, 다섯 권이 들어있다.

얼마 전에 소설 1권이 끝났다고 연락을 받았는데, 그새 책이 완성된 모양이다.

일단 5권정도 예상인 모양인데, 1쇄로 1만권을 찍는다고 한다.

책이 자그마하긴 하지만 글자가 작고 한 페이지 당 글자 수도 제법 된다. 삽화는 처음부터 몇 장 그려 넣지 않았던 덕분에 책 자체는 그리 두껍지는 않다. 표지도 선희의 일러스트가 깔끔하게 잘 인쇄되어 있다.

읽어보니 내용도 만화책을 기반으로 하긴 했지만, 상당히 재미나게 만들어져 있다. 만화에서는 표현하기 힘든 심리묘사도 잘 되어있고.

그래도 가벼운 문체라 읽기는 수월하다.

그렇게 한참 책에 빠져 있는데 그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박소미가 나를 불렀다.

“선생님. 아카기 씨 전화에요.”

“네.”

그러게 대답하고는 전화기를 받아든 뒤 지로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곧 그가 본론을 이야기했다.

- 이번에 ‘경영의 왕’ 소설 판이 출판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네. 안 그래도 오늘 소설책을 받았어요. 책이 잘 나왔더군요.”

- 네. 저도 책이 나오면 구입해야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더니 곧 조금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 이번에 소설책 나올 시점에 삼사라도 단행본이 출간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전에 사인회 하기로 하셨던 거, 이번에 하시면 어떨까 해서요.

“사인회요?”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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