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48화 (248/425)

수상한 사람 (5)

늦은 저녁이 되자 경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팔을 위로 쭉 뻗어 올린다.

“아우, 피곤해. 오빠, 우리는 먼저 들어갈까?”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0시가 넘었다.

그리 늦은 건 아니지만 여자애 둘만 보내려니 신경 쓰이는 시간이라는 건 분명하다.

내가 살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밤길 조심해야 한다.

가로등도 어두운 편이라 밤엔 함부로 돌아다니는 게 신경 쓰이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애들은 일찌감치 집으로 보낼걸.

그런데 그때 화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덩치가 커다란 인간, 바로 실버였다.

“어? 실버오빠.”

“어? 형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

그런 우리들의 말엔 신경 쓰지 않고, 나와 함께 있는 신타로를 슬쩍 바라본다.

실버의 시선을 느낀 신타로가 엉거주춤 일어나며 목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런 그를 보며 실버도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내게 말했다.

“늦은 시간이잖아. 애들 바래다주려고 왔지.”

낮에 사정을 대충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것을 듣고는 집으로 갔다가 신경이 쓰여 돌아온 모양이다. 하여튼 외모와 달리 은근히 꼼꼼한 양반이라니까.

“오? 진짜? 와아 실버 오빠 대견하네.”

경희의 말에 선희도 동감이라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어린 것이 대견이라니.”

“역시 실버 오빠 최고!”

그렇게 말하며 경희가 실버에게 착 달라붙으려한다. 그러자 그런 경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었다.

“아야.”

손가락 하나에 애 머리가 확 젖혀진다.

과연 몬스터 실버.

“야, 까불지 말고. 어서 빨리 나가기나 하자. 늦은 밤에 애들 돌아다니면 못쓰니까.”

실버의 말에 경희가 머리를 슥슥 문지르며 인상을 쓴다.

“우리 애 아니거든.”

“고등학생이면 애가 맞지. 그리고 지금 시간엔 어른이라도 여자들끼리 다니면 안 좋아. 이 동네 은근히 불량한 놈들이 좀 돌아다니는 편이고.”

그건 나도 동감이다.

몇 번 그것을 경험한 적도 있으니까.

물론 내가 동행할 때라면 문제는 없다.

자랑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쨌건 내가 그래도 제법 피지컬이 좋고 전투력도 있어서, 어지간한 놈들은 혼자 해결할 수 있으니까.

아무튼 실버가 찾아온 덕분에 애들이 집으로 갈 준비를 서두른다. 그리고 잠시 후 실버가 애들과 함께 화실을 나선다.

“나 그럼 먼저 간다. 다음에 봬요.”

“네.”

경희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자 신타로도 같이 마주 인사한다. 그리고는 실버를 보며 다시 목인사를 한다.

모두 나가고 나자 갑자기 신타로가 한숨을 푹 쉬었다.

“휴우.”

“왜?”

“아니, 좀 대하기 어려워서.”

“아, 실버?”

하기야, 실버는 처음 대하면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

이대봉 정도의 친화력이 아니라면.

“그런데 진짜 이름이 실버야?”

“아니, 진짜 이름은 아니고.”

잠깐, 실버 진짜 이름이 뭐였더라?

아, 조심봉이었지.

계속 실버라고만 불렀더니 원래이름이 가물거릴 정도다.

그래도 역시 실버가 어울린다.

조심봉이라고 하니까, 어쩐지 웃기기만 하니까.

어쨌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자자, 하던 거나 마저 하자.”

일단 전체 콘티를 수정하는 것이 먼저다. 물론 콘티 말고도 데생이나, 펜선도 같이 틈틈이 해야 할 정도 실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기존의 실력이 어땠는지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실력으로 만화가에 도전한다는 건 솔직히 어려워 보인다.

80년대라고는 해도, 일본 만화의 평균은 상당한 수준이었으니까.

어쭙잖은 실력으로 스토리만 가지고 다시 도전해봐야, 그 작품 뒤로 다시 몰락할 가능성이 높으니 기본 실력은 탄탄할수록 좋다.

하지만, 나 혼자 이 양반을 제대로 훈련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런데 쌍둥이가 나간 지 30분 쯤 되었을 때 다시 실버가 들어왔다.

“왜? 뭐 빼먹은 거 있어?”

“너 혼자는 힘들지 않겠어?”

“뭐?”

“콘티나 연출만이라면 몰라도 실전 펜선이라면 내 도움도 필요할 것 같아서.”

“잠은?”

“여기서 한동안 자도 되고. 솔직히 여기가 우리 집보다는 좋지.”

이 츤데레 같은 인간.

그래도 나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그런 실버의 마음을 안 신타로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그런데 다음날 저녁부턴 어시들도 퇴근시간을 조금씩 미루었다. 신타로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누구한테 들었는지 어느 날은 이대봉이 늦게 화실로 찾아오기도 했다.

“건조한 실버랑 같이 있으면 재미없잖아. 나라도 있어야지. 스토리도 도움이 될 테고.”

“시끄러운 녀석이 껴 봐야 방해만 되겠지.”

“어휴 또 싸운다, 또!”

경희가 끼어들고 나서야 조용해진다.

저 두 인간은 늘 싸우면서도 저렇게 친한 걸보면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

- 어? 웬일로 저에게 전화를 다 주셨어요?

주간 루머의 미네 아츠코가 깜짝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은근히 반갑다는 느낌이네.

- 혹시 저에게 호감이 생기셨다 거나······.

“아니거든요.”

- 어머, 그건 아쉽네요. 혹시나 하고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단칼에 잘라버리자, 조금 아쉽다는 듯 오버스러운 어투로 말하며 웃음을 흘린다.

- 그럼 무슨 일로······?

“저기, 부탁을 하나 하려고요.”

- 부탁요? 윤환 씨가 저에게요?

“네.”

내 대답에 미네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 입을 열었다.

- 말씀해보세요. 뭐든 들어드릴게요.

“뭐든 이라니. 그래도 들어는 보고 말씀하시지.”

- 설마, 말도 안 되는 걸 부탁할 리는 없지 않겠어요? 전 윤환 씨 믿는데.

“······너무 믿지 마세요.”

- 아뇨, 믿을래요.

“······.”

- 자자, 어서 뜸들이지 말고 말씀하세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까, 오히려 내 쪽이 더 부담스럽네.

그래도 이왕 말을 꺼냈으니 어쩔 수 없다.

“사람을 좀 찾아서 확인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 사람요? 행방불명 된 사람인가요? 전문은 아니지만, 뭐 윤환 씨 부탁이니까.

계속 말할까말까 고민하게 만드네.

“그건 아니고. 주소도 있으니까, 찾는 건 문제가 아닐 거고. 그냥 사정이 어떤가 하는 정도. 그리고 또 하나 더 있는데. 괜찮아요?

- 일단 첫 번째는 별일이 아니니까, 두 번째도 들어드리죠.

에이 모르겠다.

“그럼 말씀드릴게요.”

*

신타로가 화실을 들락거린 지도 벌써 2주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대략 전체적인 스토리는 완성된 상태.

콘티도 시작점이 될 50페이지짜리 단편과 그 이후로 대충 5화 분량정도가 완성되었다.

그러는 동안, 신타로는 실버에게 펜선을 배우고, 선희에겐 데생을 배웠다.

그래도 원래 만화가 출신이라 그런지 실력이 금방 늘었다.

본인 말로는 원래 실력보다 더 늘었다고 하는데, 내가 봐도 이젠 어느 정도 만화가 실력을 보이고 있다.

그나마 평소에도 자주 그림을 그리고 자주 콘티에 대해 생각했던 탓이겠지.

그렇게 대충 3주 정도 되었을 때, 단편 연필데생이 마무리되었다.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 도움 없이도 어느 정도 해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콘티 작업 때만 가끔씩 내가 간섭하는 것만 빼고.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형. 회사는 당장 그만 둘 수 있어?”

“······뭐, 가능할거야. 그런데 왜?”

곧장 그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받아.”

하얀 봉투를 내려다본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이게 뭐야?”

“비행기 표.”

“뭐?”

신타로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날짜가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다니던 회사는 그만두고.”

“······.”

아직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은 탓인지 멍한 표정이다.

“형도 이젠 가족이랑 살아야지. 언제까지 여기서 원고 준비만 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형 빚. 내가 해결했으니까, 그 사람들은 찾아오지 않을 거야.”

“······뭐, 뭐라고?”

“아는 사람을 통해 알아봤어. 그 인간들 형네 처가에도 찾아간다고 하던데, 그건 알고 있었어?”

그 말에 머리를 푹 숙인다.

알고는 있었던 모양이네.

“형이 보내는 돈으로는 이자도 어렵다며?”

“······.”

“한국에서 돈 벌어서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랬냐?”

“······.”

“아무튼 그거 해결됐으니까 이제 돌아가서 가족이랑 같이 살아. 이제 형 실력도 어느 정도 돌아왔고. 스토리 부분은 가끔 전화해서 물어보고. 전화비 아까우면 키도 그 양반 화실에서 가끔 사용해. 나한테 전화하는 거면 아무 말 안 할 거야.”

“키, 키도? 누구? 설마 진심의 남자의 키도 죠타로?”

“어. 그쪽에 어시자리 하나 부탁해 뒀어. 길게는 아니고, 주당 2일, 몇 시간씩. 그리고 니시다 선생님한테도. 니시다 유키 알지? 에스퍼 존 연재중인 만화가.”

“······.”

“뭐 그쪽도 일주일에 2일이나 3일 정도는 일거리 있을 거야. 그 정도면 형네 가족 부양하는 데는 부족하지 않을 거야.”

솔직히 단번에 만화가로 데뷔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소년 히어로에 억지로 끼워 넣으면 가능은 하겠지만, 그런 건 신타로도 부담스러워 할 거고.

그래서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 어시 쪽 일을 소개해 주는 거였다.

키도역시 이런 사정을 전해 듣고는 흔쾌히 허락했고, 니시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신타로가 눈물을 글썽거린다.

“고, 고맙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열심히 해. 키도 선생이랑, 니시다 선생님 정도면 배우는 것도 많을 거니까. 지금 준비하는 건 꼭 마무리해서 출판사로 가져가는 거 잊지 말고.”

“아······ 알았어.”

“울지 말고. 쯧.”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그가 눈물을 서둘러 닦으며 어색하게 웃는다.

“울다가 웃으면······.”

“뭐?”

“에이, 생각하니까 기분만 나빠지네.”

“······?”

*

며칠 후.

신타로가 떠나는 모습을 배웅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왔다.

쌍둥이들과 나 이렇게 둘만.

다른 사람들까지 따라 나오면 부담스럽다고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조촐하게 셋만 나온 것이다.

신타로는 우리를 보며 머리를 푹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어설픈 한국말로 인사한다.

“저르대로 이지르 안게스므니다! 꼬그 이 은헤르 가프게스므니다!”

버럭 소리치는 바람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쳐다본다. 그럼에도 그는 눈물을 질질 흘리며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웃었다.

“콧물 나와요, 오빠! 이걸로 닦고.”

경희가 손수건을 건네자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콧물이랑 눈물을 닦아낸다.

“쓸데없는 말 그만 하고 얼른 가. 저기 들어가기 시작한다.”

“어, 그래.”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날 쳐다보고는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달려간다. 그리고는 슬쩍 뒤를 돌아보자, 경희가 손을 흔들어 준다. 선희도 손을 살짝 들고.

“잘 가요, 오빠! 돈 많이 벌어서 놀러와요. 화과자도 많이 사오고!”

“야, 무슨 가는 사람에게 큰 부담을 주고 그러냐.”

“아, 그런가?”

하지만 반응을 봐서는 경희 말을 들은 것 같지는 않고.

아무튼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는 몸을 돌렸다.

“이젠 오빠도 눈 밑에 검은 거 없어지겠네.”

“그렇지.”

그동안 신타로 때문에 늦게까지 작업하느라 피곤이 좀 쌓였던 탓이다.

“나온 김에 햄버거 먹으면 안 돼?”

“빨리 돌아가자. 나 좀 쉴란다.”

“아이, 오빠. 햄버거.”

“나도.”

쌍둥이들이 양쪽에서 내 팔을 잡고 늘어진다.

“놔라, 이것들아!”

“햄버거 사줘!”

“사줘!”

나 피곤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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