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44화 (244/425)
  • 수상한 사람 (1)

    75년마다 찾아온다는 핼리혜성이 멋진 사진으로 뉴스에 소개 된지 며칠이 지났다.

    이젠 2월도 중순이 넘어 쌍둥이 애들도 곧 3학년에 올라갈 준비에 바쁘다.

    그런 와중에 최근 원, 엔 환율이 처음으로 다섯 배를 넘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미국에서 있었던 플라자합의 때문에 본격적으로 엔화가 강세를 띄기 시작한 탓이다.

    의외인건 그럼에도 일본의 경제는 더욱 더 호황이라는 사실.

    드디어 일본이 조만간 미국을 따라잡을 거라는 얘기도 나왔다.

    물론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아무튼 덕분에 일본에서 받는 원고료도 왕창 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활이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냥 통장에 적혀있는 돈의 숫자가 더 커졌을 뿐이다.

    뭐, 그건 그렇고 요즘엔 TV를 틀면 온통 86아시안게임 얘기다.

    외국인 손님맞이를 잘해야 한다며 나라 전체가 난리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외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느낌이랄까.

    전국이 외국손님 맞이에 여념이 없다는 분위기다.

    내가 살던 시절엔 아시안게임은 별로 크게 인기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온 나라가 축제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때문에 초록색 새마을운동 모자를 쓴 사람들의 청소하는 모습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건 우리 동네도 마찬가지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

    통장이 한집 당 한명은 나와야 한단다. 그래서 집안에 남자가 나 혼자인 관계로 내가 차출되었다.

    아침에 운동복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엄마가 초록색 모자를 내밀었다.

    “이 모자, 쓰고 나갈래?”

    “윽, 난 싫은데.”

    “그러니?”

    그래도 새마을운동 모자는 좀.

    그렇게 집을 나서려는데, 쌍둥이들도 초록색 두 줄짜리 운동복을 입고 따라 나선다. 내가 거절했던 초록색 모자는 경희가 쓰고.

    “너희들은 안 나와도 돼.”

    내 말에 경희가 양손을 허리에 척 올리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 오빠는 일하는 게 어설퍼서, 우리라도 도와줘야 욕 안 먹어.”

    “······.”

    “고맙지?”

    “고맙기는 한데, 기분이 영······.”

    “그럼 됐어.”

    “······된 거냐?”

    “된 거지.”

    그렇게 말하며 양팔 소매를 걷어붙이고 커다란 대나무 빗자루를 들었다. 그러자 선희도 같이 팔을 걷더니 쓰레받기를 든다.

    그리고 곧장 마을길 청소를 시작했다.

    그런데 경희 저 녀석······.

    커다란 빗자루 사용하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다.

    자세가 제대로 나온다.

    내가 그래도 예전에 군대에서 싸리비로 눈을 좀 치워본 경험이 있어서 잘 알지.

    나도 남자로서 질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능숙한 조교의 시범······, 이건 아니고, 아무튼 열심히 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힐끔 보던 경희가 의외라는 표정이다.

    “어? 오빠, 제법인데?”

    “야, 그래도 내가 군경험자인데, 당연하지. 이정도야······.”

    “육방(6개월 방위)은 군대로 안쳐준다고 실버오빠가······.”

    “······.”

    젠장, 현역을 경험한 내가 여기서 이런 대접을 받다니.

    그렇다고 현역 출신이라고 내입으로 말할 수도 없고.

    현역인데 어째서 말을 못하니, 왜!

    “어휴, 일본 총각 거기를 팍팍 쓸어야지. 팍팍.”

    “아, 네.”

    일본 총각?

    이 동네에 일본사람이 살고 있었나?

    아줌마의 말을 듣자마자 시선을 돌려보니, 두꺼워 보이는 안경을 쓴 작은 체구의 남자가 커다란 대나무 빗자루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얼핏 보니 대충 20대 중후반 정도의 느낌이다.

    그나저나 이건 뭐 사람이 빗자루를 사용하는 건지, 빗자루에 사람이 휘둘리는 건지.

    한눈에 봐도 일 못하는 사람의 전형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군대에서 저렇게 일하면 선임한테 갈굼 당하기 딱 좋은······, 일본인이 우리나라 군대랑 뭔 상관이라고, 나도 참.

    “자자, 이렇게! 이렇게 해봐!”

    아줌마가 직접 시범까지 보여주며 말하자 일본인이 어설프게 따라 하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다가 한참 열심히 바닥을 쓸고 있는 경희에게 다가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저 사람 아냐?”

    경희야 워낙 친화력이 좋아서 동네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으니까, 혹시나 하고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내 물음에 경희가 곧바로 머리를 끄덕인다.

    “어. 알아. 구로구 쪽에서 철공장에 다닌데. 방위산업체라던가?”

    “뭐? 방위산업? 일본인이?”

    “방위산업엔 외국인 일하면 안 돼?”

    “나야 모르지. 그냥 방위산업체하면 군대면제가 되니까. 그나저나 얼마나 일해야 면제가 되는 걸까?”

    “5년.”

    경희 앞에서 쓰레받기를 가져다 놓으며 선희가 말했다.

    “5년? 그렇게 기냐?”

    “전에 오빠가 말했는데.”

    “누구? 나?”

    “응.”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끄덕인다.

    그러자 뭔가 떠올랐는지 경희가 손바닥을 치며 ‘아하’하고 과장된 동작을 한다.

    “예전에 오빠가 군대 면제되는 방법 찾다가 방위산업체 들어갈까, 어쩔까하던 그때 말이구나. 뭐 그래도 결론은 육방이 되어서 포기했지만.”

    본체 녀석, 어지간히도 군대 가는 게 싫었던 모양이군.

    뭐, 한국남자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하여튼, 일본남자가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다른 방향으로 슬금슬금 이동하며 바닥을 청소한다.

    “일본에서 무슨 죄를 짓고 도망쳐 온 범죄자일지도 모른데.”

    “또 누가 그런 소리를 하디?”

    “아줌마들.”

    경희의 말에 내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넌 또래 친구들 없냐?”

    “많아. 그런데 왜?”

    “아줌마들이랑 그런 얘기 너무 하지 말라고.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할라.”

    “아하하, 그런 건 걱정 붙들어 매.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아줌마들에게?”

    “아니, 친구들. 뭐, 아줌마들한테도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경희가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그때 선희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본말을 하는 간첩이라고 하는 아줌마도 있던데.”

    “간첩?”

    이 동네 아줌마들, 심심하지는 않겠다.

    *

    - 삼사라가 1위에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시작한 파시엔시아는 4위로 출발했고요.

    지로가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삼사라가 1위를 다시 탈환했으니, 담당으로서 당연한 반응일 테지만.

    물론 전처럼 압도적인 1위가 아니라는 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되겠지.

    - 아, 그리고 인터뷰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인터뷰요?”

    - 네. 일단 몇 곳에서 들어왔는데, 가장 적극적인 곳이 뉴타입과 아니메쥬 쪽입니다.

    둘 다 애니메이션 잡지로 유명한 곳이다.

    “뉴타입에선 꽤 오랫동안 요청한 것 같은데.”

    - 맞습니다. 전부터 계속 요청이 있어왔지만, 계속 거절했었죠. 그럼, 이번에도·····.

    “아뇨. 뭐 이왕 다 알려진 상황이니까 이참에 인터뷰도 하죠.”

    - 그럼, 사진은 어떡할까요?

    “잠시 만요.”

    그렇게 말하고는 선희에게 물었더니, 별로 상관없다는 반응이다.

    오히려.

    “나도, 나도. 나 인터뷰 할래.”

    경희가 더 적극적으로 나선다.

    “넌 또 왜?”

    “가족으로서 참여. 어때? 아니, 이참에 내가 선희 역할을 할까? 얼굴도 똑같으니까 문제는 없을 거 아냐.”

    “팬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자는 거야?”

    “아······, 그건 아니고.”

    “헛소리하지 말고 넌 좀 가만히 있어.”

    “네엥.”

    그렇게 중얼거리며 혼자 흥, 칫, 뿡 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지로와 다시 통화를 이어갔다.

    “사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 그럼, 드디어 공식적으로 처음 얼굴을 노출하게 되시겠네요. 그렇게 되면 꽤나 파장이 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 그럼요. 그동안 많은 분들이 얼마나 두 분을 궁금해왔는데요? 편집부로 오는 엽서에도 이전부터 써니 작가님 공개해달라는 요청도 엄청 많았었는데요.

    하기야, 작정하고 꼭꼭 숨겼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무튼 적당한 때에 인터뷰를 하기로 하고, 다른 간단한 이야기를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화실로 오는 건가요?”

    박소미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네. 우리가 일본으로 갈 수는 없으니까요.”

    “와, 그럼 우리도 잘하면 사진 찍힐 수도 있겠네요.”

    “어머, 정말?”

    “우리도 사진 찍혀요?”

    여자 어시들의 반응이 격하다.

    “날짜 정해지면 꼭 알려주세요.”

    “저도요.”

    “왜요?”

    “꽃단장 하고 와야죠. 잡지에 나올지도 모르는데.”

    박소미의 말에 실버가 코웃음을 쳤다.

    “안 나와, 안 나와. 그런 건 너무 기대하지 마.”

    그 말에 여자어시들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그때 경희가 실버에게 따졌다.

    “오빠는 또 왜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찬물이 아니라 현실을 얘기하는 거지. 화실 사진 찍혀봐야 머리를 책상에 처박고 작업하는 장면이 나오면 다행이지.”

    “그래도······.”

    “그냥, 맘 편하게 안 나온다 생각하고 출근해. 괜히 기대했다가 절망하지 말고.”

    하여튼 실버는 이런 순간에도 악마 같은 말은 잘도 한다.

    문제는 그 말이 전혀 틀리지 않을 것 같아서 더 분위기가 다운된다.

    덕분에 화실 여자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모두 실버에게 집중되었다. 김기철은 그런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머리를 더 푹 숙이고 작업에 열중한다.

    나도 부담스러운 분위기라 모른 척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안 그래도 스토리가 길어지면서 막히는 부분이 있는데, 바람이나 쐐야지.

    “어? 오빠 어디가?”

    “아, 근처 슈퍼에. 뭐 간식이라도 사올까?”

    “이왕 사오려면 할매분식에······.”

    “거긴 안가.”

    또 성준희의 사촌오빠라는 작자와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별로 안 멀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무튼 안가. 슈퍼에서 과자나 사올 테니까.”

    “알았어.”

    화실을 서둘러 빠져나와 화실 앞 슈퍼로 갔다.

    그런데 슈퍼 앞 평상에 낯이 익은 사람이 앉아있다.

    어? 이 사람 우리 집 근처에 산다는 그 일본인이네.

    남자는 날도 추운데 평상에 앉아서 호빵을 먹으며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만화잡지 같은데, 한국 건 아니고······.

    어라? 주간소년 히어로?

    오, 한국에서 이 만화잡지 보는 사람 처음 봤다.

    신기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잡지를 힐끔거렸다.

    그런 시선을 느낀 걸까? 남자가 머리를 들고 날 돌아봤다. 그러더니 곧 몸을 돌려 등을 보인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대놓고 몸을 돌리다니, 너무 하네.

    곧장 난 혀를 쯧하며 차고는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들고 나왔더니 남자는 온데간데없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장 봉지를 들고 습관처럼 화실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아, 참. 바람 쐬러 나왔는데.”

    나도 참.

    귀찮긴 하지만 봉지가 무거운 것도 아니니까, 이대로 동네 한 바퀴나 돌자싶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둑한 동네 길을 돌고 있는데, 그때 구석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

    근처로 다가가 슬쩍 살펴보니 아까 그 일본인이다.

    연탄재 위에 널브러져 있던 그가 신음소리를 내고 있길래 서둘러 그를 일으키려고 하자 흠칫 놀라며 버둥거린다.

    “죄, 죄송 하무니다. 죄······송······.”

    “아무 짓도 안 해요. 그런데 다쳤어요?”

    “아······.”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가 잠시 동안 멈칫하더니 곧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한다. 그래서 그를 부축해 일으키자 그가 어설픈 한국어로 고맙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일본어로 물었다.

    “아까 슈퍼 앞에서 봤을 땐 괜찮은 것 같더니. 그 사이 무슨 일 있었어요?”

    내가 갑자기 일본어를 사용하자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홱 돌아본다. 그리고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 일본어, 할······ 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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