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구의 지옥 (2)
“음, 4구, 이거 일본에서는 크게 인기가 없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
내 말에 박상식이 깜짝 놀랐다.
“어? 이거 일본에선 별로야?”
“잘은 모르는데, 포켓볼이라면 모를까, 4구는······.”
내 말에 박상식이 급 실망하는 눈치다.
“4구 칠 때 용어가 거의 일본어라서 인기가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당구 자체가 일본에서 그리 크게 인기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당구 용어에 일본어가 많은 건, 그게 들어온 때가 일제시대(일제강점기)때라서 그래.”
갑자기 실버가 끼어들며 말하자 우리 둘이 그를 향해 돌아봤다.
“그렇게 오래된 게임이야?”
내 물음에 실버는 이쪽에 머리를 돌리지도 않고 여전히 머리를 숙여 작업에 열중한 채로 말했다.
“그래.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대충 7-80년쯤 되었을 거다.”
“오, 이거 의외로 역사가 깊은 게임이구나.”
“당구 자체는 훨씬 오래되었지. 옛날엔 당구공을 코끼리 상아로 만드는 바람에 코끼리가 많이 희생되었다는 얘기도 있으니까. 그런 사실이야 상관없는 일이지만 하여튼 당구라는 스포츠로 만화를 그리면 일본에서 성공하긴 힘들 거야.”
냉정하다 싶을 정도의 말을 들은 박상식이 머리를 긁적인다.
그래도 나름 고민하고 만든 것일 텐데.
“당구는 안 되는 건가?”
“아마도.”
여전히 냉정하게 대답하는 실버.
“당구가 통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건 너무 억측이지.”
이번에 내가 반대하고 나서자, 실버가 의외라는 표정이다.
“너도 아까 4구가 힘들 거라더니, 갑자기 왜 말을 바꿔?”
“힘들 거라고 했지. 그런 작품이 없었다는 건 아니야.”
“뭐? 그런 만화가 있어?”
“어.”
“뭔데?”
“70년대 만화 중에 ‘사기꾼 더 키드’라는 5권짜리 작품이 있긴 했어. 내가 알기론 이 작품이 4구가 소재일 거야. 물론 제법 인기도 있었고.”
그 말에 실버가 피식 웃었다.
“역시, 만화 쪽 정보만큼은 널 못 이기겠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박상식이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보인다.
“그런 만화가 진짜 있어?”
“어. 있긴 한데. 그렇다고 붐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고.”
“내가 처음인 것보다는 낫지.”
“그야 그렇지.”
“그럼 됐어.”
박상식의 표정이 훨씬 밝아진다.
그런 그를 보던 실버도 슬쩍 웃더니 다시 작업에 열중한다.
당구만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떠오른 작품이 하나 더 있다.
음. 올래가 1986년이니까······.
내년에 연재를 시작하게 될 작품이다.
바로 ‘쿵푸보이 친미’로 유명한 ‘마에카와 다케시’의 ‘브레이크 샷’이다.
브레이크 샷은 포켓볼 중 나인볼이 주 내용인 만화인데, 특유의 액션 감으로 상당히 인기를 끈 만화다.
이 만화가 한국에서도 해적판이 나와 엄청 인기가 있었는데, 당시 주인공 특유의 ‘찍어 치기’ 기술 때문에 한동안 국내 당구장에서 ‘300이하 맛세이 금지’라는 말이 유명했다고 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액션이 난무하는 비현실적인 만화라는 게 함정.
더글러스 샷이니, DHS니 하는 황당한 이름을 붙인 기술들을 생각하면 진짜 만화다운 작품이다.
뭐 당구라고는 하지만 이 작품은 4구가 아닌 포켓볼 중 하나인 나인볼이고.
아,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도 대본소 만화 중엔 당구만화가 등장하는구나.
기억이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헌책방에서 80년대 후반쯤에 나왔던 당구만화를 본 기억이 있다. 제목이 허슬러였던가?
아, 그러고 보니 박상식이 만들고 있는 이야기랑 허슬러가 닮은 구석이 좀 많기는 하네.
“그래도 어쨌건 생소한 만화라 어렵기는 할 거야.”
“저 녀석, 방금은 가능성이 있다는 듯 말하더니. 왜 그렇게 오락가락 하는 거냐?”
“그러게. 나도 왜 이렇게 말하는 줄 모르겠네.”
“나 참, 뭐라는 건지.”
실버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재밌으면 통한다는 주의가 맞긴 하지만, 어쨌건 개척을 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런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건 변함이 없는 거고.
그런데 의외의 말이 작업 중이던 실버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번엔 내가 그 의견에 반대야.”
“형은 나랑 장난치려는 거야?”
“장난은 네가 치는 것 같다만.”
“······.”
쩝,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다.
“아무튼 당구에서 살짝 시선을 돌린다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당구에서 시선을 돌려?”
“그래.”
뭔가 호기심이 생긴다.
실버의 새로운 의견은 뭘까?
“왜? 그런 건데?”
“일본은 도박이 일상이 된 사람들이잖아.”
“뭐?”
“파칭코 몰라?”
“아······.”
그러고 보니 일본엔 파칭코 가게가 엄청 많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전에 얼핏 들은 바로는 일본 전역에 1만 5천개 이상이 있다고 하던 모양이던데.
어쨌건 도박장인 그런 곳이 마치 편의점처럼 흔하다는 건 그만큼 익숙하다는 거다.
“걔네들 파칭코 규모가 전 세계 카지노보다 더 커. 전성기 땐 전국에 게임장이 7만개 정도 있었다고 알고 있다.”
“진짜? 그 정도라고?”
“그래. 연간 규모가 상상초월이야. 그리고 대부분 게임장을 운영하는 건 민단이나 조총련계고.”
이 인간 진짜 뭐 별걸 다 아는 구나.
만화 빼고는 오만 잡다한 지식이 머릿속에 있는 인간이다.
아니, 만화도 나와 비교해서 조금 밀릴 뿐이지, 이쪽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역시 불가사의한 인간이야.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실버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차피 당구에다 도박의 개념을 합친 거잖아. 그러니까, 괜찮을지도 모르지. 일본에선 그런 거 잘 통할걸? 물론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어쩌면 실버의 말대로 일지 모른다.
하기야, 일본 드라마, 영화, 만화를 보면 이 파칭코가 얼마나 일본에서는 익숙한 문화인지 알 수 있지만.
음.
역시 도박이라는 소재가 먹힌 다라.
유명한 ‘도막묵시록 카이지’라는 만화가 엄청나게 히트를 치긴 했으니.
그리고 일본은 은근히 이런 어두운 이야기가 인기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살던 미래엔 도박뿐만이 아니라, 각종 살인, 자살 같은 내용의 만화도 인기가 있었고.
아무튼 도박을 소재로 한 만화는 상당히 인기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
아, 한국도 화투로 성공한 만화와 그이야기를 영화로 성공하기도 했으니 비슷한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능성은 높아 보이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거참, 이래서 편협한 사고는 무섭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푹 쉬자 박상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아참, 그런데 배경은 한국으로 할 거야?”
내 질문에 박상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일본문화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지.”
“그래도 한국이야기라면 걔네들이 공감을 하지 못할 텐데.”
“할 수 없잖아. 내가 어설프게 일본을 묘사하면 그게 더 문제니까.”
“그런 그러네.”
맞는 말이다.
알지도 못하는 일본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면 그게 더 공감하기 어렵겠지.
사실 어떻게 보면 이런 도전정신이 더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실패할까싶어서 처음부터 어쭙잖은 잔머리를 쓰는 것보다는 훨씬 말이다.
“한국이 배경이라 거부감이 생기는 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 되긴 하지만.”
“그런 거라면 내가 도와줄게. 아무래도 그동안 일본에 연재하면서 느낌 부분도 많으니까.”
내 말에 박상식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지. 안 그래도 솔직히 엄청 불안한데.”
“불안하긴. 곁에서 그렇게 오래 지켜봐 놓고선.”
“그래도 내가 주도하는 콘티는 처음이잖아.”
“괜찮아. 내용도 괜찮으니까, 그건 그런데······. 작화를 맡아줄 사람은 어쩔 거야? 한국이 배경이면 일본사람은 어려울 것 같은데.”
사실, 이 부분이 가장 궁금했었다.
내가 알기로 주변에 연재를 할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으니까.
물론 이대봉에게 부탁한다면 어찌어찌 가능해 보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갑자기 소개받은 사람과 작업을 한다는 게 쉬운 건 아니라서.
“이 콘티, 보여준 사람이 또 있어.”
“누구? 설마 전 선생님?”
“맞아.”
전상길은 여유가 없을 텐데.
“전 선생님이 이거 그리시겠대?”
“그건 아니고.”
아니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추양구 씨.”
“추······ 양구 씨? 전 선생님이랑 같이 있는 그 분?”
“어.”
박상식이 머리를 끄덕이자 내가 깜짝 놀랐다.
추양구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양구 씨. 독립했어?”
놀란 표정으로 물었더니 머리를 가로 젓는다.
“아니, 아직은.”
“그렇다면, 설마 이걸로······ 독립?”
“전 선생님이 한 번 해보라고 기회를 주신 모양이야. 안 그래도 괜찮은 스토리가 있으면 추양구 씨 독립시키고 싶었다고 하시더라.”
하기야, 추양구라면 전상길의 화실에서 가장 오래된 문하생이니까.
뒤에 들어온 후배들도 몇 명 독립했다고 들었는데, 추양구는 실력도 있으면서 왜 독립을 미루나 했더니, 이제야 그 시기가 온 모양이다.
거기다 이 정도의 스토리라면 도전해 볼만 하지.
아니, 어쩌면 만화가로서 이런 스토리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인지도 모른다.
“양구 씨도, 나도 이젠 홀로 서는 법도 배워야 하고.”
“나는 아직 형한테 의존하는 게 많은데.”
“그건 아니지. 오히려 내가 너에게 더 의존하는데. 그리고 홀로 선다고 해서 나갈 생각은 없어. 여기만큼 좋은 곳을 찾는 건 불가능하니까.”
“이거보다 더 좋은 집도 구할 수 있을 거야.”
“장소를 말하는 게 아니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지. 널 포함해서.”
이 양반이 낯간지럽게 왜 이래?
잘도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구만.
“물론, 양구 씨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거지, 일본에서 계속 작품을 해 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어.”
“왜?”
“너야 특별한 경우지. 실제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일본에 원고를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담당이 수시로 한국에 나올 수 있다는 것도 무리니까.”
내 경우가 좀 특별하다가는 건 알고 있다.
아무래도 선희 같은 천재를 가족으로 둔다는 것도 로또보다 낮은 확률이니까.
거기다 아직은 여행이 자유화된 세상도 아니니 일본에 쉽게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번거로운 것보다는 그냥 한국에서 만화가 생활을 하겠다는 거겠지.
“아무튼 나도 모든 걸 쏟아 부어 볼 생각이야. 이제 삼사라 콘티도 선희에게 넘겨줄 생각이고. 솔직히 이젠 콘티 만드는 것도 선희가 더 잘하니까.”
나도 그건 알고 있다.
파시엔시아의 경우 선희가 직접 콘티 작업을 해왔고, 박상식의 콘티도 선희가 수정해서 작업하고 있으니 자신의 역할이 이젠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래서 따로 계속 자신만의 콘티를 작업해왔고, 이전처럼 친분 있는 대본소 만화가들에게 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이름이 따로 만화책에 적히지는 않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걸 수 있는 큰 무대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동안 그런 박상식의 잘 살펴주지 않은 내 책임이 크다.
나도 참 멍청하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