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42화 (242/425)
  • 4구의 지옥 (1)

    화실 식구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그 가운데엔 이번에 새롭게 들어온 키가 작고 통통한 체형의 남자 신입어시가 열심히 작업 중이다.

    “와, 자선 속도 엄청 빠르다.”

    “그러게. 손이 안보여.”

    “와, 무슨 기계 같아.”

    신입어시는 당연하게도 이대봉이 데려왔는데, 이름은 김달부, 나이는 화실 최고 연장자인 실버보다 2살 많은 31살이다.

    결혼은 했고, 아이가 지금 국민학생이라고 한다.

    느리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자를 사용함에 있어 상당히 능통하다.

    실제로 이대봉이 김달부를 데려왔을 때 이렇게 소개하기도 했었다.

    ‘배경, 특히 자를 사용하는 그림엔 도가 튼 고수야. 아마 실력 보면 깜짝 놀랄걸?’

    작업하는 거 보니까, 진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 하나만 놓고 보면 선희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특히 배경으로 자주 사용되는 집중선 같은 건 그야말로 괴물 같은 느낌이다.

    보통은 집중선을 그릴 때 속도를 높이기 위해 중심부위에 장구압정 같은 걸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양반은 그런 것도 없다.

    그냥 막 긋는 것 같은데, 중심이 틀어지지 않는다.

    하다못해 중심선을 찍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거기다 분위기에 맞게 강약 조절도 잘한다.

    덕분에 집중선 하나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달라질 정도다.

    이게 단순한 보기엔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론 어려운 일이다.

    제법 베테랑인 박소미도 이 작업에서 만큼은 좀 어려움을 겪을 정도니까. 물론 일반적인 느낌의 선은 잘 긋지만.

    아무튼 선긋기에 특화된 사람이 들어온 덕분에 일이 좀 더 효율적으로 돌아갈 것 같기는 하다. 다만, 나이 때문에 어시들이 조금 불편해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도 점심 식사 이후론 많이 줄어들었다.

    김달부가 생각보다 조용한 성격인데다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좋은 편이라 그 문제가 금방 해결된 것이다.

    사실, 최근 작업량이 적은데다가 어시들의 숙련도가 예전보다 상당히 올라서 딱히 사람이 더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어느 정도 작업에 여력을 두는 게 좋다는 판단에 한명 정도 더 받아두는 것도 괜찮다싶어서 이대봉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의외의 실력자를 데려온 덕에 생각보다 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여유가 있다면 좋은 점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거다.

    늘 작업에 쫓기게 되면 그만큼 사람들도 피폐해지고, 만화의 완성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내가 있던 시절이라면 저런 배경선 실력이 크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 개발된 컴퓨터 만화 작업툴 덕분에 배경선 따윈 순식간에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그런 스크린톤까지 흔하니까.

    “형, 일 잘하고 있어?”

    오후 늦게 찾아온 이대봉이 김달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 뭐. 글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실버의 눈치를 슬쩍 본다. 아무래도 실버가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다.

    “아, 저 인간은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인물 펜선 나부랭이일 뿐이니까. 형이 신경 쓸 사람은 저기에 있는 우리 예쁜 선희랑, 저쪽에 바보처럼 앉아있는 윤환이뿐이야.”

    바보처······ 저 인간이 진짜!

    “인물 펜선 나부랭이? 사람을 앞에 두고 뭐라는 거야.”

    화가 난 실버가 인상을 팍 쓰며 이대봉을 쏘아보자 오히려 김달부가 움찔하고 놀란다.

    하지만 이대봉은 실버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계속 떠들었다.

    “형은 평소처럼 하면 되는 거야. 평소처럼. 알겠지?”

    “아, 뭐. 그래.”

    “아참, 우리 선희.”

    그렇게 말하며 선희에게 다가갔다.

    “한 번씩 힘 팍 주고 싶은 배경이나, 장면이 있으면 달부 형에게 말하면 돼.”

    “그럼 이런 것도?”

    선희가 원고를 슬쩍 들어 올리며 이대봉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대봉이 그것을 받아 살펴보며 놀랐다가 피식 웃었다.

    “그럼, 그럼. 이 정도는 돼야, 우리 달부 형도 일할 맛이 나지.”

    그렇게 말하며 그 원고를 김달부에게 보여준다.

    어떤 장면인가 싶어서 슬쩍 봤더니 한 페이지를 몽땅 사용한 장면이다. 중앙에 주인공을 두고 거친 집중선이 사용되는데, 거기다가 집중선 사이로 복잡한 건물이 보이는 장면이다.

    얼핏 보면 너무 요란한 느낌 탓에 정신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어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아무것도 아니긴. 엄청난 그림인데.”

    “엄살은.”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선희 쪽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선희야, 이거 실패해도 돼?”

    그 말에 선희가 별다른 생각을 하지도 않고 머리를 끄덕인다.

    “응.”

    하기야, 저런 그림이라도 연필로 그리는 건 별로 큰 일이 아닐 테니까. 물론, 같은 그림을 그리는 건 좋아하지 않으니까, 다른 걸로 그릴게 뻔 하지만.

    그런데 갑자기 실패이야기는 뭐지?

    연습장으로 쓰겠다는 건가?

    실제 연재가 될 원고 한 장을 연습장으로 사용한다는 말이 얼핏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리기는 하지만, 이대봉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어째 궁금해지긴 하네.

    선희도 그런 표정이고.

    잔소리꾼인 실버도 별말 않는 걸 보면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다.

    “들었지? 형의 느낌으로 한번 작업해봐.”

    이대봉의 말에 김달부가 당황했다.

    “야, 그래도······.”

    “이참에 형의 실력을 보여주라고. 그동안 다른 화실에선 봉인해 뒀던 그 거.”

    “······하지만.”

    “나이 많다고 실력도 없는 인간들에게 무시당하고 왔었잖아. 여긴 형이 이제까지 지내왔던 화실과는 다른 곳이야. 형의 그 빠른 속도를 그냥 책 많이 뽑아내는 것에만 사용하게 했던 그런 곳 말이야.”

    “······.”

    “얼른.”

    “그런데······ 말이지.”

    “응? 왜?”

    “나이 많다는 거 좀 그만 강조해라. 너랑 겨우 두 살 차인데.”

    “그 정도면 많은 거지. 거기다 난 아직 20대라고.”

    “으, 확인 사살까지······.”

    그 모습을 보던 실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암튼 가까운 인간들이 가장 큰 적이라니까.”

    “적 아니거든.”

    “놀고 있네.”

    “야!”

    “아, 진짜! 오빠 두 명다 그만 좀 해!”

    “······.”

    “······.”

    이대봉과 실버가 입을 닫고 나서야 김달부가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처음엔 한 장의 원고를 살펴보며 약간 머뭇거리는 가 싶더니, 이내 작업에 들어갔다.

    슥슥슥.

    잉크를 찍은 펜이 자와 함께 원고 위를 빠르게 움직인다.

    그런데 직선용 자를 사용할 줄 알았는데, 곡선자를 사용해 배경 선을 긋기 시작한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역시 베테랑답게 선의 강약도 주면서 그림에서 풍기는 느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빠르게 작업하던 곡선 작업을 멈추고는 이번엔 다시 그 위에 배경을 그려가고 있다. 배경의 그림이 디테일하고 복잡하지만 그것을 여러 가지 자로 빠르게 작업해나간다.

    그런데 그림이 완성이 되어갈수록 뭔가 어수선하고 복잡해 오히려 정신이 없는 기분이다.

    차라리 배경을 그리지 않았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있다.

    그래서 연습용이라고 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 시점에 이번에 포스터칼라 하얀 물감 통을 열고는 그곳에 붓을 살짝 찍는다.

    “······?”

    붓?

    아, 역시 펜선 사이에 배경을 지우려는 거군.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작업시간이 많이······.

    그런데 그때 곡선자를 왼손으로 쥔다.

    그리고 곧장 곡선자 밑을 손으로 두껍게 쥐고는 거기에 붓을 대고 긋기 시작한다.

    “······!”

    엄청난 속도로 배경에 묻혀있는 그림들을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선 사이에 있는 그림을 지우는 건 이미 봐왔던 기술이지만, 이렇게 붓으로 능숙하게 지우는 건 또 처음이다.

    김기철이 붓 사용에 능통하기는 해도, 붓과 자를 함께 사용하는 기술은 김달부를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

    보통의 한 페이지짜리 배경보다는 다소 덜 복잡하다고는 해도 이렇게 빨리 완성하는 건 선희이후로 처음이다.

    물론 자를 사용하는 능력은 그 이상이고.

    어쨌건 연습장처럼 쓰려했다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이건 뭐, 스케치에서 본 느낌의 이상이니까.

    듣기론 문하생 경험만 15년이라더니, 괜한 말이 아니다.

    아니, 그보다 31살이라면서 15년이면, 16살부터 시작한 건가?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다.

    화실 식구 전체가 이 장면에 경악하고 있었다.

    잘 놀라지 않는 실버조차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와 그림을 빤히 쳐다보는 걸 보면.

    진짜 괴물들만 모였다고 할 만큼 대단한 인간들로 가득한 이곳이지만, 또 다른 능력자의 등장은 그만큼 충격이었던 것이다.

    “와, 대단해요. 어떻게 이렇게 빨라?”

    “제 팔 보세요. 막 소름이······.”

    “저도요.”

    “마음에 들어.”

    선희까지 그들 대화에 끼어들 정도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그렇게 크게 반응하자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이대봉이 어깨를 들어올리며 거들먹거렸다.

    “어때? 우리 달부 형.”

    그 모습을 본 실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왜 으스대냐?”

    “우리 형이잖아.”

    “너 김 씨야?”

    실버가 비꼬듯 묻자 이대봉이 버럭 소리쳤다.

    “야, 그만 좀 따져!”

    *

    어시도 새로 들어왔으니 파시엔시다도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최근 들어 새로운 작품도 구상하고 있지만, 지금도 세 작품이나 하고 있으니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박상식도 최근 신작 콘티 작업에 한창이다.

    우리 화실에서 작업을 도와주면서 틈틈이 자신의 작품작업도 하고 있었는데, 이제까지 작업한 대부분 콘티는 대본소용이었다. 물론 그 작품들은 친분이 있는 만화가들에게 넘겼는데, 대부분 반응도 좋은 편이다.

    그동안 박상식도 스토리에 대한 감각이 내가 봐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콘티를 작업하기 시작했는데, 내용은 내기 당구를 좋아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잘 모르고 있었는데 지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당구, 특히 4구가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당구를 해본적은 없지만, 규칙은 뭐 실버나 박상식에게 자주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아무튼 내가 보기엔 별로 재미도 없어 보이는 이 게임이 엄청난 중독성을 가졌는지 어떨 땐 박상식이 당구얘기를 할 때 보면 장난이 아니다.

    한참 좋아할 땐 잠자려고 누우면 천장이 당구대로 보인다고 할 정도였다니. 하긴, 나도 좋아하는 게임을 할 땐 비슷했으니까.

    아무튼 당구만화의 제목은 ‘4구의 지옥’이다.

    제목처럼 뭔가 목숨을 걸고 하는 4구당구 게임 이야기인데, 카이지 만큼은 절망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름 긴장감이 있고 재밌다.

    그동안 가벼운 명랑 물에 특화 되어있던 박상식이 의외의 능력을 개화시킨 느낌이다.

    “어때?”

    “어. 재밌네. 나도 당구는 잘 모르는데, 이거 보고 있으니까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박상식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오, 성공이네. 성공. 이거 쓰면서도 솔직히 많이 걱정했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이거, 대본소용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전에 아카기 씨가 일본으로 도전한번 해보라고 했잖아.”

    나도 기억난다.

    “설마 그럼 일본에 도전할 작품이야?”

    내 물음에 박상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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