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36화 (236/425)

예상치 못한 리메이크 (1)

선희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힐 때만 해도 뭔가 엄청나게 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사실상 생각만큼 위기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다.

물론, 앙케이트 순위가 떨어지기도 했고, 항의 전화나 엽서를 받았다고는 하는데.

문제는 이게 일본에서만 벌어진 일이라, 딱히 와 닿는 게 없었다는 거다.

인터넷이라도 있다면 대충이라도 흘러가는 사정, 혹은 일본인들의 댓글이라도 읽으면서 분위기를 파악했을 텐데.

물론 극우성향의 일본인들이 주로 상주하고 있다는 모 사이트였다면 허구한 날 조센징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비하하는 모습도 많았을 테지만.

하지만, 애초에 일본에 대한 것이 차단된 상황이니 정보라고 해봐야 지로나 미치코, 혹은 스미레처럼 인맥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주워듣는 게 전부다.

그것도 들어보면 만화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나 일어나는 일이지,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도 않는 모양이다.

솔직히 이번 일로 인해 혐한류······, 아 이건 아닌가?

한류라는 말이 나오던 시절도 아니고.

아무튼, 이로 인해 한국비하 관련 책들이 나오지나 않을까하는 걱정도 하긴 했는데, 이 시절엔 한국자체에 관심이 없어선지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의 해프닝처럼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

“······.”

소파에 앉아 새로운 삼사라의 새로운 에피소드에 대해 생각하며 메모를 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책상위로 선희의 얼굴이 계속 보이고 있다.

응? 왜 저러지? 무슨 일 있나?

보통 때라면 원고 때문에 소파에 앉아서 선희의 얼굴을 보는 일은 드물다. 그만큼 작업에 열중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어떨 땐 존재감도 없을 정도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까부터 대충 2-30분 정도 저러고 있으니.

표정도 뭔가 난감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정확한 사정을 알 수가 없네.

무슨 일인가해서 소파에서 일어나 선희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여전히 묘한 표정을 선희를 향해 물었다.

“뭐해?”

“······아, 응.”

내 말에 뭔가 애매하게 반응한다.

뭐지?

그런데 선희 책상 위에 뭔가 하얀 털북숭이가 꼬물거리는 것이 보인다.

“어?”

뭔가 싶어 고개를 쭉 들이밀어 봤더니, 하얀 고양이 백설기다.

요즘 통 보이지 않다가 오랜만에 나타나서는 아까 경희를 다그쳐 부엌에서 잔뜩 먹는 것 같더니, 어느새 여기에 올라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녀석이 평소와 달리 책상 중앙에 턱하니 널브러져 있다는 거다.

뒤집힌 채로 혀를 날름거리며 자는 모습에 어이가 상실할 지경이다.

“이 녀석,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평소엔 모서리나 바닥에서 자더니.”

“······.”

“내가 치워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백설기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냐앙!

“아얏!”

자는 줄 알았던 녀석이 이빨을 드러내며 내게 앞발을 휘둘렀다.

발톱을 제대로 세운 건 아닌 모양인지 살짝 긁히긴 했지만, 갑작스런 공격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백설기는 팔자 좋게 책상에 다시 널브러진다.

뭐여? 잠꼬대여?

이 털북숭이 자식, 내게 모욕감을 주려는 건가?

그나저나 이 녀석 오늘따라 왜 이러지? 이제까지 저렇게 널브러진 모습을 많이 보긴 했지만, 한 번도 선희의 일을 방해한 적은 없는데.

“이 녀석, 왜 이래? 대 놓고 깽판 치는 것 같은데?”

선희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선희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하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얘, 어쩐지 오늘은 내가 그림 그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나 봐.”

“뭐?”

이게 무슨 소리야. 마음에 안 들다니.

꼴을 보니까 놀아달라는 것도 아니구만.

보통의 고양이도 그렇지만, 이놈은 정말 뭘 생각하는 지 1도 모르겠다.

“놀아달라는 거야?”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럼 그냥 깽판을 치겠다는 거 맞네.”

“······모르겠어.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선희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평소라면 백설기와 그렇게 소통이 잘 되는 것 같더니, 오늘은 전혀 그런 것 같아 보이지 않고.

역시 고양이의 단순한 심술인건가?

그런데, 그때 선희 책상 앞에 놓여있는 종이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순간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혹시라도 백설기 이놈이 또 내게 앞발을 휘두를지도 몰라서.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며 녀석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다.

서둘러 그것을 집어 들고는 바로 확인했다.

종이도 많은데, 거기엔 연필이나 펜으로 그려진 일러스트가 빽빽하게 채워져있다.

엄청나게 많은 양.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선희가 바로 입을 열었다.

“그냥 심심해서.”

“심심해?”

심심해서 그린 엄청난 양의 그림들.

최근엔 못 봤는데.

“언제 이렇게 많이 그렸어?”

“오늘.”

“뭐? 오늘?”

아직 점심도 되지 않은 시각.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분량을 그렸다니,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림의 퀄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놀라는 것도 이젠 지친다.

그나저나······.

“너, 요즘 너무 많이 그리고 있는 거, 아니야? 어제도 늦게까지 그렸잖아.”

“난 괜찮은데.”

“오른손 줘봐.”

선희가 눈동자를 데굴거리다 곧 손을 내게 내밀었다.

그런 손을 슬쩍 쥐고는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선희의 표정을 살폈다.

가끔 내가 선희의 손을 살펴보는 일이 있는데, 평소라면 이렇게 만지거나 툭툭 쳐봐도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살짝 표정에 변화가 보인다. 통증이 있는 건가?

그 순간 내 음성이 착 가라앉았다.

“선희야, 너.”

“······?”

“오늘은 그냥 쉬고, 나랑 병원에 한번 가보자.”

그 순간 작업 중이던 어시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선희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갸웃거린다.

“난 괜찮은데.”

“괜찮긴. 손도 살짝 부은 것 같고, 너 지금 표정도 보니까······.”

“난 아무렇지 않아.”

“아무렇지 않긴, 방금도 움찔거리더만.”

“······아닌데.”

“정말이야?”

“······.”

이젠 내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조금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한숨을 푹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래. 일단 알았으니까, 같이 병원이나 가보자.”

그때 부엌에서 간식거리들을 챙겨 들어오던 경희가 화들짝 놀랐다.

“왜? 무슨 일인데? 우리 선희, 어디 아픈 거야?”

“아니, 일단 병원부터 가보고.”

“왜? 왜 그러는 건데? 선희 손, 뭔가 잘 못 된 거야?”

경희가 내 손에 쥐어진 선희의 손을 내려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직은 몰라. 일단은 병원부터.”

“괜찮은데······.”

선희는 여전히 내 눈치를 보며 괜찮다는 말만 계속하고 있다.

평소보다 말이 많은 걸 보면 이상한 게 확실하다.

때문에 손을 자세히 보니 약간 부어오른 것 같기도 하고.

워낙 손과 손목이 작고 가는 녀석이라 확실한 건 잘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이 작은 손으로 그 많은 분량의 원고를 잘도 해내고 있었구나.

그때 널브러져있던 고양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 손 쪽으로 머리를 쭉 내민다. 그리고는 손위에 있던 선희의 손을 핥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희가 옅은 미소를 짓더니 왼손으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순간, 녀석을 보고 있으니 방금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

이 녀석, 설마 선희를 위해서 책상위에 누워버린 거였나?

선희에게 생긴 이상을 알아차린 건가?

“이제 안 아파.”

“넌 헛소리 말고, 나랑 병원 갈 준비나 해.”

그렇게 말한 경희가 선희를 끌고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나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쌍둥이들을 따라 나섰다.

“너희들 점심밥 준비되었는데, 어디 가니?”

“어, 잠시만 다녀올 데가 있어서. 밥은 나중에 먹을게.”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괜한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지, 경희가 부엌에 있는 엄마에게 대충 말하고는 서둘러 화실을 나선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

결과적으로는 내 착각으로 끝나버렸다.

80년대 병원이라 어느 정도까지 정밀검사가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는 진단결과를 받았다.

혹시나 싶어서 한군데 병원을 더 들렀다가, 한의원까지 들러봤지만 결과는 똑 같았다.

아니, 오히려 엄청 튼튼하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병원을 나오면서 확인하니 약간 부어있던 팔도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눈에도 말끔하게만 보인다.

내 착각인가?

“하여튼, 오빠는······. 하마터면 나 울 뻔 했잖아!”

경희가 나를 찰싹찰싹 때리면서 투덜거리며 말한다.

아직도 녀석의 눈가에는 번들거리는 빛이 남아있다.

하긴, 울 뻔 한 게 아니고, 병원에 들어가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줄곧 울었으니까. 그리고 첫 번째 병원에서 결과를 듣고 좋아하던 애가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만 한의원에서 들은 결과이후 다행이라며 또 울었던 것이다.

“나 괜찮다고 했잖아.”

“그래, 그래. 오늘은 진짜 오빠 때문에.”

그렇게 말하며 한 번 더 찰싹 때린다.

나도 착각이라서 다행이라고는 생각하지만.

* * *

- 파시엔시아가 언제 연재를 시작하는지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뭐, 2부의 대략적인 스토리는 잡아가고 있지만, 아직 자료가 충분치 않아서 당장 시작하는 건 무리입니다.”

- 그렇습니까?

지로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남아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시절 자료가 많은 것도 아니고,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만으로 계속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물론 이 시절엔 말도 안 되는 방식의 진행이 흔했던 시절이니, 스토리만 가지고 그냥 시작해버려도 문제는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덕후 출신인 내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여전히 스페인관련 자료를 좀 더 모으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더해서 며칠 전에 있었던 일도 있고 해서 한동안은 선희의 작업량을 제안하고 있으니까.

물론, 파시엔시아 정도 데생을 더 한다고 문제될 건 없을 것이다.

오히려 평상시 쉬지 않고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리는 게 문제일 뿐.

특히나 지금은 방학이라 하루 종일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일단 작업시간은 2시간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

평소 같으면 그림을 그리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텐데, 다행히 말은 잘 듣고 있다.

요 며칠간은 백설기랑 놀며 지내는 시간도 늘어났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외국만화잡지와 사진집을 보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쨌거나 지로의 경우엔 이런 사정을 모르고 있다. 하지만, 그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여러 편의 만화를 그려왔으니, 그도 이해는 할 것이다.

아무튼 평소처럼 원고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있는데,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전상길이었다.

그가 간식거리를 사들고 화실로 들어서자 박상식이 그를 맞이했다.

“어, 전 선생님.”

“어, 반가워.”

그렇게 말하더니 통화중인 날 슬쩍 보며 웃어 보인다.

나는 그에게 목 인사를 하며 통화를 간단히 마무리하고 끊었다.

“오랜만이시네요.”

“어. 그래.”

그렇게 말하며 다른 이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소파에 앉았다.

평소처럼 간단한 근황을 이야기하고는 곧바로 그가 본론을 꺼냈다.

“경영의 왕이랑 평발 스트라이커의 스토리를 쓰고 싶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네? 이미 출판이 된 만화잖아요.”

“일본출판사에서.”

“······정말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