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32화 (232/425)
  • 팬들을 무시하지 마 (3)

    - 그러니까 그게 말이 안 되잖아!

    아이고, 귀야!

    전화기를 살짝 떨어뜨린 채로 잠시 그것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귓구멍을 살짝 파고 나서 다시 수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말이 안 될게 뭐있어?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영원히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그건 알지. 하지만 그래도 하필 지금이냐, 이 말이다!

    “이미 내려진 결정이잖아. 그러니까, 형은 그냥 지켜보기나 하셔.”

    -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이 형이 그걸 어떻게 두 눈 뜨고 지켜보라고. 아우가 지옥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려고 하는데.

    윽, 시끄러.

    이 양반은 정말 기차 화통을 삶아 드셨나.

    “아이고, 오버는 적당히 하시고.”

    - 오버가 아니야, 오버가! 지금 상황을 보란 말이야! 삼사라의 독주 정도가 아니야. 소년 히어로의 틀을 깨고 날아오르려는 가장 중요한 때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와중에 그런 걸 알려서 어쩌자는 거야?! 그런 이야기를 듣고 이 형의 마음이 어떻겠느냐 이 말이야!

    키도, 이 양반이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구나.

    어째 마음이 쨍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결정 난 일을 주워 담을 수도 없다.

    난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형, 일단 내 이야기나 들어보고 나서 생각해 봐.”

    내 말에 격해졌던 키도의 숨소리가 가라앉았다.

    - 그래, 알았다. 자세하게 설명해 보거라. 되도록 상세하게, 아주 디테일하게.

    “······알았어.”

    그렇게 말하고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랑 그동안 그 결정을 내리게 편집부에서 최종결정을 내리게 된 상황까지 그의 말대로 세세하게 설명했다.

    내가 그렇게 한참 떠드는 동안 키도는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그저 묵묵하게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전화가 끊긴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가끔 국제전화는 통화중 끊기는 일이 가끔 발생하기도 했으니까.

    “저기, 형. 듣고 있어?”

    - ······아, 그래. 처음부터 몽땅 깨끗하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렇게 말하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가 곧 키도가 입을 열었다.

    - 음, 역시······. 상황이 그렇게까지 흘러갔다면 쉽게 판단하는 건 어려운 문제로군.

    앞뒤 사정 확인하고 보니 키도도 납득을 한 모양이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니까, 정면으로 부딪쳐 볼까싶어서 그렇게 결정한 거야.”

    - 네 말은 잘 이해하고 있다만······.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말이 없다.

    이번엔 정말로 전화가 끊겼나?

    “여보세요?”

    - ······.

    “여보세요?”

    - 그래!!

    키도가 갑자기 버럭 소리치다 화들짝 놀랐다.

    “아 깜작이야!”

    - 네 말이 맞다. 그냥 이 형은 너의 결정에 찬성을 하겠다!

    “찬성이고 뭐고, 어차피 결정된 일이고 내일이면 잡지책이 발행 될 거야.”

    내 말에 테이블을 탁치는 소리가 들린다.

    - 아, 그렇군.

    어휴 이 인간.

    “형은 그냥 지켜만 봐주면 돼.”

    - 알았다. 그럼 이 형은 너의 가시밭길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있으마!

    “그렇다고 그렇게 너무 노골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지.”

    - 하하핫! 힘 내거라, 동생아!

    다시 커다란 키도의 소리에 깜짝 놀라 귀에서 수화기를 뗐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 *

    다음날, 소년 히어로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소년 히어로의 편집부 내 전화기는 하나도 빠짐없이 미친 듯 울어댔다.

    “네, 맞습니다! 써니 선생님은 한국인이세요!”

    “납득할 수 없다하셔도······.”

    “그게 일본인의 수치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네? 더 이상 잡지는 사지 않겠다고요?! 그런······.”

    “네, 사실입니다. 잡지에 실려 있는 내용대로······.”

    “자자,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사방에서 전화를 붙들고 우왕좌왕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던 편집장이 앉은 채로 인상을 쓰고 있다.

    그의 곁에서 부편집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직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역시, 그 주간 루머의 여기자를 직접 만나서 부탁이라도 해볼걸 그랬나 싶습니다.”

    그 말에 편집장의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용없는 일일거야.”

    “네? 그래도······.”

    “전무님 사건 때도 그렇게 가차 없었잖아. 그런데 나 같은 편집장 따위가 설득한다고 될 일도 아니잖아.”

    “······.”

    “그런데 아카기는 어디 갔지?”

    “삼사라 팬들을 만나러 갔다고 합니다.”

    그제야 편집장도 생각났는지 머리를 끄덕인다.

    “아, 그래, 삼사라 팬들도 자주 만난다고 했었지?”

    “네. 이번 사건이 팬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지 직접 만나겠다고 아까 점심도 안 먹고 나갔습니다.”

    “······음.”

    그렇게 편집장에 팔짱을 끼며 심각한 표정으로 편집부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때였다.

    혼란한 편집부 내로 말끔한 정장차림의 늘씬한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시끄러운 사람들 사이를 뚫고 편집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던 편집장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윗분들이 반응하신 거군.”

    “네?”

    그렇게 말한 부편집장이 근처로 다가온 여자를 보더니 그제야 놀란 눈으로 편집장을 다시 돌아본다.

    그때 편집장 앞으로 다가온 여자가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임원 회의실로 지금 급히 오시랍니다.”

    여자의 말에 편집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네.”

    *

    임원회의실.

    주간소년 히어로의 편집장이 들어오자마자 임원들이 그에게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편집장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난 임원들이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니,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고 무작정 이렇게 발표를 해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그래, 어떡하든 시간이라도 끌었어야지!”

    “지금 우리 미쯔다쇼텐에서 써니 선생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떤지 모르는 건가?”

    모두 이번 결과에 불만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다그쳤다.

    하지만 편집장은 그저 입을 꽉 다물고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이봐,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라고, 그렇게 가만히만 있지 말고!”

    “변명할 건 없습니다.”

    “뭐? 이 친구가 진짜!”

    그때 팔짱만 낀 채 생각에 잠겨있던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래, 지금 편집부 상황은 어떤가?”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가 오고 있습니다.”

    “그래, 독자들 반응은?”

    “······좋지 않습니다.”

    “······그렇군.”

    부사장이 상황을 이해하고는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써니 선생 쪽은 지금 어떻지?”

    “담당인 아카기는 지금 외근중이라 자세한 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임원 한명이 성난 얼굴로 끼어들었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자네라도 전화를 걸어봤어야지.”

    “죄송합니다만, 그 일은 담당들에게 일임하고 있어서.”

    편집장의 대답에 이번엔 다른 임원이 버럭했다.

    “이런 꽉 막힌 사람을 봤나.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야?! 자네라도 무조건 걸어봤어야지!”

    “이런 일로 제가 전화를 걸게 되면 아무래도 부담을 가시실테니까, 차라리 담당인 아카기가 직접 전화하는 편이 마음을 추스르는데도 도움이 될······.”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말게! 그걸 변명이라고······.”

    “자자, 그만. 진정들 하시고.”

    부사장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하자 따지던 임원들이 멈칫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편집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편집장은 표정이 담담하기만 하다.

    그런 그에게 부사장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알겠네. 이런 상황을 굳이 작가 선생에게 알려줘서 좋을 건 없겠지.”

    그 순간, 한때 전무의 라인이었던 임원들이 불만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부사장님!”

    “지금 편집부에 걸려오는 전화들 대다수가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잖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정작 공개를 결정한 본인이 맘 편히 그림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 말에 부사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시선을 그들에게 돌렸다.

    “그렇다면, 이 사정을 작가 선생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요. 회사를 이렇게 뒤집어 놨다는 것 정도는 스스로 알게끔······.”

    “그게 편집부의 역할입니까?”

    “네?”

    “우리가 엿을 먹었느니, 만화가 선생, 당신도 엿을 먹어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까?”

    갑자기 차가워진 부사장의 말에 따지던 임원들이 움찔하며 놀란다.

    “아니, 제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라······.”

    “네. 그저 사정을 어느 정도는 만화가도 알고 있어야······.”

    “그만하세요. 써니 선생이 지금 우리 미쯔다쇼텐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서, 설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한국인이라서 그렇다는 겁니까?”

    “······.”

    “······.”

    “······.”

    임원들이 말이 없자 한심한 사람을 바라보는 표정이 된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회사의 임원이라는 분들이······.”

    그 순간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누군가 소리쳤다.

    “이런 한심한 인간들! 임원이라는 작자들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미쯔다쇼텐의 사장인 미쯔다 히로유키가 임원 회의실로 들어온 것이다.

    “사, 사장님!”

    “······오, 오셨습니까.”

    임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물론, 편집장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어나 인사하긴 했지만 그들을 따라 인사를 하긴 했다.

    그리고 사장이 들어오자마자 인사를 하던 부사장이 옆자리로 물러나고, 상석에 히로유키가 앉았다.

    그러자 모두가 어정쩡한 자세로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사장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느라 바쁘다.

    “한심하긴. 임원들이 모여서 그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 이러니 다른 잡지사들을 따라잡지 못하는 거야. 그리고 자네들.”

    사장이 불만을 토로하던 임원들을 가리키자 그들이 깜짝 놀랐다.

    “자네들은 지금 우리 출판사 전체에서 가장 잘나가는 잡지가 뭔지는 알고 있어?”

    “그, 그야······· 소년 히어로·······.”

    “·······네. 소년 히어로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장이 피식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소년 히어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만화가는 누구지?”

    “······.”

    “······.”

    “······.”

    임원들이 말이 없자 곧 혀를 끌끌 차고 만다.

    “그런데, 편집부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고 그걸 만화가 선생도 꼭 알아야 된다고?”

    그렇게 말하고는 한참동안 그들을 노려본다. 모두 머리를 숙인 채 말이 없자 곧 시선을 편집장에게 돌렸다.

    “편집장.”

    “네.”

    “자네는 일단 직원들을 잘 다독여서 독자들 상대하는데 집중하고. 이참에 그 담당이라는 친구 선물을 가지고 한국에 좀 다녀오라고 해.”

    “네?”

    “이런 어려운 순간에 잘해야 할 거 아닌가. 사정이 좀 어려워졌다고 쓸데없는 말을 했다가 사이가 틀어지면 곤란해질 게 아닌가.”

    “아, 네. 알겠습니다.”

    편집장이 대답하자 이번엔 임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들도 누구 잘잘못이나 따지고 있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잘 넘길 수 있을지 제대로 회의해서 결과를 내 봐. 보고는 자네가 직접.”

    그 말에 부사장이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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