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을 무시하지 마 (2)
팀장이 소리치는 바람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본다.
그 때문에 흠칫하던 팀장이 주변을 의식하며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한국인이라는 걸 밝히겠다니. 그게 말처럼 간단한 일인 줄 알아?”
“하지만 언제간가 밝혀야 할 날이 올 거잖습니까?”
“알고 있어, 알고는 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는 거야. 지금처럼 분위기 좋을 때 꼭 그걸 밝혀야 할 필요가 있어?”
지로에게 머리를 바짝 가져다대며 말하자 지로가 살짝 물러났다.
하지만 행동과는 달리 대화는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지금이니까 해야죠. 인기가 상승중일 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무슨 헛소리야? 상승세가 꺾일 텐데, 그럼 그게 좋은 선택이라는 거야?”
“어차피 겪을 거라면 그게 낫다는 겁니다.”
“난 반대야. 그건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팀장이 잔뜩 경앙되어 있자 일단 그를 데리고 휴게실 쪽으로 이동했다.
그 때문에 주변에 있던 직원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곁눈질로 그들을 바라본다.
휴게실로 들어오자마자 지로가 서둘러 의자에 팀장을 앉히고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뽑았다. 그리고는 그중 한 잔을 팀장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커피를 훅 들이킨다.
“앗 뜨뜨, 뜨거!”
그렇게 말하며 혀를 내밀며 인상을 팍 쓴다.
“뜨거운 커핀데, 왜 그렇게 드세요?”
“말했어야지!”
“여긴 다 뜨거운 거 밖에 없잖아요.”
“······.”
팀장은 곧 커피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손에 뭍은 커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낸다.
그 모습을 보던 지로가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흥분이 안되는 게 말이 돼?”
“이거, 사실 이 선생······, 아니 텐겐 선생님은 지금 밝히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 말에 팀장이 인상을 팍 쓰더니 지로를 쏘아봤다.
“그러니까, 자네가 텐겐 선생님을 잘 설득해어야지. 나도 솔직히 텐겐 선생님이 받았을 스트레스에 대해 짐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동안 작품 활동하면서 자신의 국적조차 밝히지 못하며 만화를 만들어왔으니 당연하다고 나도 생각하니까. 하지만 자네까지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기분에 휩쓸려 어쩌겠다는 거야?”
그 말에 지로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기분에 휩쓸린 게 아닙니다.”
다시 남은 커피를 확인하며 종이컵을 입에 가져가려던 팀장이 멈칫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분에 휩쓸린 게 아니라니.”
“이번 전무님 스캔들 사건에 대해서는 팀장님도 잘 아실 겁니다.”
“······응? 갑자기 전무님 스캔들은 왜 꺼내고 그래? 가뜩이나 그 사건 때문에 윗선에도서 심기가 불편해서 직원들도 가급적 그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번 사건으로 전무는 완전히 회사에서 퇴출되었다. 거기다 가지고 있던 주식까지 사장에게 팔았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 때문에 최근 미쯔다쇼텐 전체 분위기가 뒤숭숭해 있었다.
“설마 전무님 스캔들이 지금 네가 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지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전무님 스캔들을 터뜨린 주간 루머에서 써니 선생님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라는 모양입니다.”
“뭐?!”
팀장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 때문에 다시 커피가 옷에 튀었지만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걔들이 왜? 그 녀석들 만화 쪽엔 관심도 없잖아? 그리고 만화가 뒤를 캐서 뭐하게? 이런 건 대중의 관심이 별로 없을 텐데.”
설마, 연예계의 어두운 이야기나 캐고 다니는 인간들이 갑자기 만화계를 조사한다니.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한국에 있는 텐겐 선생님의 화실에도 찾아간 모양이던데.”
“진짜!”
“네.”
“그럼 진짜 곤란한 거잖아.”
팀장은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서는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지로가 라이터를 들어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심각한 표정의 팀장이 담배를 한 모금 당기고는 곧바로 길게 연기를 뿜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지로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갑자기 상황이 전부 이해가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팀장이 곧장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더니 지로를 슬쩍 흘겨보며 뚱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얘기를 할 것이지.”
“저도 오늘 전화를 받고서야 안 사실입니다.”
“······.”
“이대로 계속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가느니, 차라리 스스로 밝혀버리는 쪽이 낫다는 게 텐겐 선생님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이젠 수긍한다며 팀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음.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
“저도 그 부분은 동감하고 있고요.”
“그래도 지금 이런 때에······, 그런 걸 밝혀버리면 삼사라랑 파시엔시아, 그리고 다크 프린세스에 엄청난 타격이 갈 텐데······.”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잖습니까?”
“······젠장, 그건 알고 있어. 그렇기는 한데······.”
팀장이 턱을 긁적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뭔가를 결심했는지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일단 이 문제는 편집장님이랑 부편집장님과 이야기를 해보고 결정하도록 하자. 지금 당장 얘기할 테니까, 쓸데없이 주변에 이거 퍼트리지 말고.”
“네.”
“좋아.”
그렇게 말한 팀장이 곧장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남아있던 지로가 그 모습을 보더니 곧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갑자기 기가 확 빠져나가는 기분에 몸이 축 늘어진다.
* * *
“선생님, 저 왔습니다.”
테고시가 인사를 하며 화실로 들어서자 작업 중이던 키도가 머리를 슬쩍 들었다가 그를 확인하고는 머리를 끄덕인다.
“어, 왔나?”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최근 키도는 다시 삼사라를 잡겠다며 스토리와 그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고 있던 터라 늘 바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인물펜선까지 작업을 끝냈던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처음부터 새로 작업한 탓에 시간이 더 빡빡해진 것이다.
물론, 그 덕분에 어시들도 몰골이 엉망이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이 더 부족해진 탓에 결국 화실에서 합숙을 계속 하고 있어서다.
키도 만큼은 아니지만 모두 잠을 제대로 못잔 모양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게. 두어 시간 정도면 완성되니까.”
“네.”
그렇게 대답한 테고시가 소파에 앉으며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선생님. 그런데······. 내일 출간될 책을 가져왔는데요······.”
“테이블에 올려두게. 나중에 읽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던 테고시가 이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원고 끝나면 얘기하겠습니다.”
그 말에 키도가 머리를 슬쩍 들어 올리며 테고시를 쳐다본다. 그런데 최근 피곤에 절은 생활을 계속한 탓인지 눈 밑이 거무죽죽하게 죽어있다. 거기다가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어서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만화가의 몰골이다.
“뭔데 그러는 건가? 그렇게 말을 마무리지어버리면 궁금하지 않나.”
“일단 원고부터 완성하시고 나서······. 지금은 선생님의 원고가 더 중요하니까요.”
그 말을 들은 키도가 곧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은 이 원고보다 급한 일은 없을 테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원고에 열중한다.
그때 평소처럼 키도의 부인이 따뜻한 차를 쟁반에 들고 들어온다. 그리고는 테고시가 앉아있는 소파 앞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이거 한잔 하시면서 기다리세요.”
“네, 매번 감사합니다. 사모님.”
“뭘요.”
키도의 부인이 평소처럼 웃으며 그곳에서 물러난다.
키도는 귀신같은 손놀림으로 데생을 그려나가고는 한 장이 마무리될 때마다 종이를 뒤집거나 자세히 바라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그려나가고 있다.
어시들도 머리 한번 들지 않고 원고에 열중해 있다.
화실은 온통 펜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 때문에 평소엔 들리지도 않던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또렷하게 들릴 정도다.
하지만 그런 정적이 흐르는 와중에도 테고시는 아까부터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느낌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 마지막 원고를 어시들에게 넘기고 나서야 키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시들에게 주의 점을 몇 가지 일러주고 테고시가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그래, 무슨 일인데 그렇게 아까부터 앉아서 안절부절 못하는 건가?”
“아, 제가 신경 쓰이게 한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테고시의 말에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며 키도가 말했다.
“죄송은 됐고. 아까 들어오면서 했던 얘기랑 연관 있는 건가?”
“아,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한 테고시가 가져왔던 소년 히어로 잡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실은 내일 나오게 될 이번 소년 히어로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만······.”
그러자 키도가 손을 뻗어 자신에게 달라는 시늉을 하자 서둘러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을 건네받은 키도가 표지를 슬쩍 보더니 눈살을 찌푸린다.
눈에 띄는 글씨가 그의 눈에 띈 탓이다.
“써니의 모든 것을 밝힌다? 이게 뭔가?”
“일단 먼저ㄷ 보시죠.”
테고시가 그렇게 말하며 관련페이지를 서둘러 찾아준다. 그리고 표지에 나왔던 기사가 있는 페이지에 도달하자, 키도가 멈칫했다.
사진은 없지만, 그 내용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내용을 서둘러 읽어나갔다.
그리고 곧 책을 책상위에 떨어뜨리듯 내려놓더니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게, 뭐야? 갑자기. 써니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갑자기 왜 밝힌다는 거야?!”
“안 그래도 이 일 때문에 편집부에서도 난리입니다. 책이 내일 전국으로 퍼져 나갈텐데 이 일이 어떤 현상을 일을 킬지, 편집장님이나 각 팀의 팀장님들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에요.”
“이거 회의에 통과된 내용이야?”
“그럼요. 몇 시간 동안 팀장급 이상 회의까지 거친 모양이던데.”
“통과가 된 거 확실해?”
“네.”
“이거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지? 설마, 유난이나 써니는 아닐 테고, 설마 담당인 지로 그 친구야?”
“아뇨, 써니 측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뭐? 갑자기 왜? 걔들, 지금 잘 나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잖아.”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오늘 책 나오고 나서야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더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키도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전화기 앞으로 달려갔다.
“이건 유난에게 직접 들어와야겠어.”
“서, 선생님. 그래도.”
“자네는 원고 완성되면 어서 가져가기가 해.”
그렇게 말하더니 어시 쪽을 돌아본다.
어시들도 갑작스런 대화의 내용에 놀란 표정으로 키도와 테고시를 번갈아보고 있다.
“자네들은 빨리 원고 마무리 지어. 그리고 완성되면 여기 정리는 관두고 어서 씻고 한숨 자도록 해. 그리고 내일은 휴무다.”
그렇게 말하더니 곧장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