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30화 (230/425)
  • 팬들을 무시하지 마 (1)

    이대봉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어이없다는 듯 히죽거린다. 그리고는 중년의 남자 사진에 손가락을 올려놓으며 실버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바로 지금 우리가 연재중인 소년 히어로의 출판사인 미쯔다쇼텐의 전무, 아니 전무였던 사람이라는 거지?”

    “······그래.”

    실버가 시큰둥한 음성으로 대답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대봉은 여전히 사신을 노려보며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아, 이 사람도 참 대단하네. 이런 얼굴을 하고선 잘도 이렇게 어린 여자가수랑······.”

    “야, 그보다 이거 안 치울래? 나 지금 바쁜 거 안보여?”

    실버가 눈을 감은 채,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하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주간 루머잡지가 자신이 작업하려던 원고 위에 놓여있는 탓이다.

    “그렇게 바쁘면 좀 치우지, 그걸 내가 치워줄 때까지 기다리냐?”

    “······맞고 싶냐?”

    “하여튼, 뭐든 폭력으로 해결······.”

    “역시 맞아야······.”

    실버가 커다란 주먹을 가볍게 쥐는 시늉을 하자 이대봉의 입에서 대답이 바로 튀어나온다.

    “알았어.”

    화들짝 놀란 이대봉이 잡지를 거두어들인다.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쉰 실버가 다시 원고의 데생을 확인하며 펜선을 그려 넣으려다 곧 멈칫했다. 그리고는 입을 앙다물며 인상을 쓰고는 다시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잡지, 내거다.”

    그 말에 잡지를 가지고 돌아서던 이대봉이 멈칫했다. 그리고는 돌아보며 혀를 찼다.

    “덩치도 큰 녀석이 왜 그렇게 쪼잔 하게 구니? 조금만 더 읽어보고 줄게.”

    “쪼잔······.”

    실버의 이마에 핏줄이 툭 붉어져 나오자 서둘러 이야기를 바꾼다.

    “그나저나, 벌써 30일이야, 내일이면 1985년도 마지막 날. 아, 이렇게 또 한 살을 더 먹는구나.”

    “······.”

    “아, 어쩐지 서글프다.”

    “누가 보면 너 혼자만 나이 먹는 줄 알겠다. 그리고 그게 뭐가 서글퍼?”

    실버의 말에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손거울을 꺼내더니 얼굴을 비춰보며 한숨을 쉰다.

    “나이를 하나 더 먹으니까 그만큼 주름이 더 늘 거 아냐!”

    그 말에 실버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 우리가 지금 주름 걱정할 나이냐! 아니, 그보다 주름 걱정을 왜 해!”

    “우리도 이제 곧 29살, 아홉수라고.”

    이대봉도 슬슬 결혼을 생각하는 건가?

    “그게 뭐?”

    “앞으로는 남자도 피부 관리에 힘써야 한다니까? 조만간 남자들도 화장하는 시대가 올걸?”

    역시 이대봉은 결혼에 관심이······, 그보다 앞으로 남자들도 화장을 하게 된다니, 이 인간은 간헐적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실버는 그런 이대봉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화장을 한다고? 아예 치마를 입고 다닌다고 하지 그러냐?”

    “너는 그렇게 신문이랑 잡지도 많이 읽으면서 그런 건 모르냐? 일본 봐라, 남자들이 얼마나 예쁘게 꾸미는데.”

    “지랄.”

    “쯧쯧, 이러니까 말이 안통하지. 너희들도 내 말 동의하지?”

    그렇게 말하며 작업 중인 어시들을 돌아보자 이제까지 쿡쿡거리며 듣고만 있던 어시들이 화들짝 놀라며 이대봉의 시선을 외면한다.

    실버가 이대봉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확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튼 두 사람의 요란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난 다른 생각에 잠겨있었다.

    지금 이대봉이 들고 있는 저 잡지.

    주간 루머에 전무와 신인여가수의 폭로 기사.

    흑백의 사진이 큼직하게 여러 장 실려 있고, 자극적인 큰 글자가 눈길을 끄는 페이지.

    난 이미 기사를 읽은 상태.

    그런데 그 미네라는 여자는 보기와 달리 냉철하면서도 보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게끔 기사를 써서 꽤 놀랐다.

    실제 이야기에다 적당한 MSG까지 섞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적당한 상상력도 발휘하게끔 쓴 탓에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디테일한 내용 부분도 제법이었다.

    그동안 전무의 행적, 그런 그와 여가수의 동선이 언제 어떤 식으로 겹쳤는지, 어디서 얼마나 머물렀는지.

    그리고 어떤 호텔에 머물렀는지.

    저 기사를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이 조사를 하고 다녔을까.

    아무튼 이번 기사 덕분인지, 평소보다 잡지의 판매량도 제법 늘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큰 이슈는 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전무나 신인 가수가 딱히 거물이라고 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당사자들에게는 치명적인 폭로였을 것이다.

    “······.”

    일본에서 이 일로 큰 주목을 받은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난 그냥 넘길 수가 없다.

    다음 타깃이 우리일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만만치 않은 여자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쨌거나 이 일로 분명해졌다.

    이 여자는 반드시 우리에 대한 걸 폭로하려고 할 것이라는 걸.

    이젠 솔직히 숨긴다고 해서 그냥 계속 숨겨질 일도 아니다.

    이미 삼사라라는 만화에 관련된 사람은 넘칠 정도로 많은 상황.

    거기다 파시엔시아와 다크 프린세스까지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이래저래 다른 것으로도 연관된 사람도 많다.

    그래서 며칠 동안 계속 생각해 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그리고 어느 정도 생각의 윤곽을 잡았다.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다.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자, 오늘은 그냥 이걸로 일은 마무리하고, 송년회 겸 회식이나 하죠. 시내에 있는 호텔레스토랑에 자리도 잡아뒀으니 그쪽으로 모두 갑시다.”

    내 말에 모두가 깜짝 놀라더니 곧 환호했다.

    연말이니 올해는 즐겁게 마무리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일은 내년에 결정을 내리면 된다.

    내년이라고 해봐야 당장 이틀 후면 새해긴 하지만.

    *

    1986년의 새해가 밝았다.

    그리고 새해 첫 출근날인 1월 2일의 화실.

    점심을 먹고 난 뒤 나른 한 오후,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모두가 음악을 들으며 나른한 오후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내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한마디 하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박상식이었다.

    “뭐? 한국인인 걸 밝혀버리자고?”

    “그래.”

    내 말에 박상식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실버도 묘한 표정으로 날 보고만 있다. 다른 어시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이고.

    “너는 그런 엄청난 일을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하냐?”

    “그렇다고 요란하게 하기도 그렇잖아.”

    내 말에 박상식이 헛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표정이 심각해진다.

    “역시 전에 찾아왔었다는 그 스캔들잡지 기자 때문이야?”

    “그래. 어차피 폭로되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냥 차라리 밝혀버리는 쪽이 나을 것 같아서.”

    “다른 방법은 없어?”

    “······그래봐야, 잠시 시간 벌기용 임시방편일 뿐이겠지.”

    “그러니까, 그런 시간이라도 벌어서 뭔가 대책을 세우는 편이······.”

    그때 실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 생각도 윤환이 말대로 차라리, 그냥 밝혀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형까지 왜 그래? 이런 시기에 밝혀서 어쩌자고?”

    박상식이 버럭 했지만 실버는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보나마나 윤환이 너, 그 기자와 만난 뒤로 한동안 고민했을 거 같은데, 내 말이 틀렸냐?”

    “······.”

    “저거 봐. 우리가 즐거운 연말을 보내고 어제까지 쉬는 동안에도 저러고 있었을 게 뻔하지.”

    그 말에 박상식이 내 쪽을 돌아본다.

    그러더니 계속 찌푸려 있던 인상을 펴고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랬냐?”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한 건 아니야.”

    별로 큰일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더니 박상식이 다시 인상을 썼다.

    “간단한 일도 아니구만.”

    “윤환이 말대로 해. 어련히 고민했을라고. 그리고 나도 솔직히 그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아무래도 계속 숨기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그냥 이참에 정면 돌파 해버리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더 낫지 싶다.”

    “이러다 완전히 몰락해버리면?”

    “뭐, 그러면 할 수 없는 일이고.”

    “형!”

    “아, 짜식이 평소답지 않게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

    실버의 말대로 평소의 박상식이라면 걱정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반응이 크지는 않았을 거다. 왜 이러지?

    그렇게 생각하며 박상식을 쳐다보자 그도 이런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복잡한 표정으로 변한다. 그리고는 곧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와 선희는 무너지면 곤란하잖아. 너희들이 중심을 잡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기회를 잡고 하나 둘 진출한 거고. 만약, 네가 혹시라도 무너지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도 자멸하게 될지도 몰라.”

    “다르게 생각하면 어때?”

    “뭐?”

    “반대로 말이야. 이번 일을 잘 넘긴다면 다른 사람들도 굳이 한국인인 걸 숨길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

    “어차피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야. 자꾸 미루기만 하면 일만 커질 뿐이고, 또 결국 밝혀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될지도 모르지.”

    “······.”

    “이참에 파시엔시아도 밝혀버리고, 텐겐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밝혀버릴 생각이야. 써니는 작화담당, 그리고 텐겐은 스토리담당.”

    “······괜찮을까?”

    “안 괜찮아도 할 수 없지.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라도 화실을 해체하지는 않을 거니까. 나 보기보다 돈 많이 모았거든.”

    내가 농담을 하자 박상식이 버럭 했다.

    “야, 불안하게 말하지 마.”

    그런데 그때였다.

    박소미가 나랑 선희 쪽을 번갈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 참에 선생님 생각대로 밀어붙여 보세요. 저희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 말에 다른 어시들도 수긍하며 거든다.

    “네, 맞아요. 일본에서 이만큼이나 자력으로 성장하셨으니까 앞으로도 잘 이겨나가실 거예요.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실력만 있다면 일본이 한국보다는 기회가 많은 것도 사실이잖아요. 물론 편견이야 있을 거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요. 하지만, 지금이 새로운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평소 조용하던 차미정이 저렇게까지 말하고 나서는 모습은 처음 본다.

    하지만, 그녀 말대로 어쩌면 새로운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 역시 이 시대의 일본이 어떨 거라는 건 짐작하기 어려우니까.

    대중의 반응은 그리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말이다.

    아무튼 차미정의 말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자 차미정은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더니 허둥댄다.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아 그냥 머릿속에서 막 나오는 대로 떠들어서······.”

    그때 실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정이 말대로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이만큼이나 쌓아올렸는데, 이제 와서 뭐가 두려운 거냐? 까놓고 말해서 너 돈도 많이 벌었잖아. 한동안은 우리 굶기지는 않을 거고. 맞지?”

    “어? 그럼 일 안하고도 공짜로 월급 받는 거예요?”

    눈치를 보던 막내어시 김기철이 웃으며 말하다 내 눈과 마주치더니 움찔하고 놀란다.

    “노, 농담인데.”

    “아니, 실버 형 말대로야. 까짓것 잘못되면 내가 모두 책임지면 되지.”

    “아, 아니요. 일 없으면 여기 머슴이라도 할게요.”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머슴은 무슨.”

    * * *

    팀장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뭐? 한국인이라는 걸 밝히고 싶다 했다고?”

    “네.”

    지로가 머리를 끄덕이자 멍하게 그를 쳐다만 보던 팀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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