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루머 (1)
“히야, 이게 드디어 연재를 시작했네.”
소년점프 1986년 1.2호 합병호의 표지에 그려진 세인트세이야의 그림을 보며 내가 감탄했다.
아직 1986년이 된 건 아니고, 지금은 1985년이 저물어가는 12월이긴 하지만.
소년점프의 부흥을 견인하는 또 다른 히트작이 또 연재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스 신화와 별자리를 기반으로 점프식 에스컬레이터식의 전형적 배틀만화로 앞으로 엄청난 히트를 하게 될 만화가 드디어 시작한 것이다.
이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으니 감동이 물결치는 건 당연한 일.
연신 감탄한 표정으로 소년점프를 펼치는데 내 말을 들었는지 부엌에서 나오던 경희가 내게 물었다.
“뭐가 연재를 시작했는데?”
“······!”
오랜만에 보는 만화가 반가워 방심했던 탓에 깜짝 놀라버렸다.
아무튼 내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 신기했는지 들고 나왔던 떡볶이를 내 앞에 있는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내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는 날 툭툭 치며 물었다.
“뭔데? 뭔데? 왜 그렇게 놀라?”
“놀라긴, 누가 놀랐다고 그래?”
“아닌데, 놀란 거 맞는데?”
“······.”
내가 경희의 시선을 피하자 내 손에 들린 소년점프를 본다.
“어? 이 만화야? 음······ 성투사성시? 제목이 특이하네. 그림도 예쁘고.”
경희가 세인트세이야를 보며 호기심을 보인다.
하기야, 이 만화의 핵심은 미소년, 미소녀들이 왕창 나오는 격투물이라 남자, 여자모두에게 인기를 끌었으니까 경희의 반응은 당연하겠지.
그런데 어느새 다가왔는지 떡볶이 앞으로 다가온 경희가 행복한 표정으로 어묵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거린다.
“꺄악! 이 욕심쟁이야, 혼자 먼저 먹으면 어떡해?”
“······.”
“같이 먹어, 같이. 오빠도 얼른 먹어. 자.”
경희가 내게 젓가락을 내민다.
내가 그것을 받자, 경희는 서둘러 선희와 함께 떡볶이에게 달려들었다. 나도 얼른 다 뺏기기 전에 떡 하나를 서둘러 집어서는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소년점프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모처럼 쉬는 날이라 한가한 화실을 슥 둘러본다.
곧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 터라 일부러 마루의 창가에 크리스마스트리도 세워두었는데, 이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올해엔 일부러 분위기를 더 살려보자는 생각에 문방구에 가서 단음이긴 하지만 캐럴음악이 나오는 금색 종 모양의 스피커도 사서 달아두었다.
지금도 음악이 나오고 있어서 꽤나 분위기가 고요하니 좋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정도로 감상에 젖지는 않을 텐데.
그러고 보니 어느새 1985년도 저물어 간다.
1983년부터 생활했는데 어느덧 1986년이라니.
이젠 이곳 나이로도 곧 24살이 된다.
이젠 이전에 살던 시절에 대해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마치 오래전 어릴 적의 기억처럼 단편적인 느낌이 강하다.
내가 살던 곳도 어느새 잊어버렸고, 부모님의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어떻게 살았다는 정도의 기억만 남았을 뿐.
이제는 돌아갈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겠고.
뭔가 서글플 것 같지만, 기억이 희미해지니까 별로 그렇지도 않다.
마음이 메말라 가는 걸까?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이 지어진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오빠도 외로움을 타는구나?”
“뭐?”
“그렇잖아. 그 나이에 아직 애인도 없으니까.”
“이 녀석.”
경희의 머리를 꽁하고 쥐어박자 헤헤 거리며 웃는다.
“오빠랑 선희랑 영원히 지금처럼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경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나도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나저나 얼마 전에 영 히어로에 단편으로 나갔던 빌런X의 반응이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듣기론 영 히어로 편집부 업무가 마비될 정도의 문의 전화가 며칠간 지속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대부분 빌런X의 연재가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문의였고, 만약 진행된다면 써니가 작화를 맡느냐는 것이었다는데.
문제는 단편 말고는 거절할 상태라서, 영 히어로 쪽에서도 이것 때문에 상당히 곤란해 했다고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선희의 몸이 여러 개라면 모를까, 거기다 고등학생이라는 입장도 있으니.
조만간 다시 시작해야할 파시엔시아 2부도 준비 중이니까.
그리고 영 히어로의 입장 때문에 무리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화실로 거대한 그림자가 불쑥 들어온다.
실버였다.
“뭐, 먹냐? 나도 같이 먹자.”
우리가 먹는 떡볶이에 관심을 보인 실버가 내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빼앗으며 접시 쪽으로 달려든다.
“어머, 실버 오빠가 끼면 부족하단 말이야.”
“콩 한쪽도 나눠먹어야지.”
“콩은 맛없어서 괜찮은데, 이건 안 돼!”
“안 돼.”
경희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선희도 같이 거든다.
그런 쌍둥이들의 반응에 실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먹는 걸로 치사하구만.”
“토끼풀에 코끼리가 욕심내니까 그렇지.”
“말도 안 되는 예시구만.”
그렇게 말하며 달려들지만 쌍둥이가 잽싸게 접시를 피신시킨다.
“야, 치사해서 안 먹는다.”
그렇게 말하며 젓가락을 내려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실버에게 물었다.
“오늘 쉬는 날이잖아. 그런데 어쩐 일이야?”
“왜? 오면 안 되냐?”
그렇게 말하며 방심하고 있던 쌍둥이들이 뚫고 떡볶이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그 때문에 곁에 있던 경희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꺄악, 맨손으로 먹으면 어떡해?!”
“이런 건 손맛이지.”
“손맛은 무슨, 병 걸려! 구충제는 먹었어?”
“뭐라는 거야. 나 그런 거 안 키워.”
그렇게 대답하며 손가락에 뭍은 붉은 소스를 쪽쪽거리며 핥아먹는다.
“아, 디려!”
“손맛이라니까.”
“아니거든! 더럽거든!”
“되게 까탈스럽네.”
“오빠가 이상한거야.”
인상을 팍 쓰는 경희의 시선을 피하며 실버가 히죽거렸다.
“이야, 이런 거 보면 우리나라도 살만해졌네. 어릴 땐 정말 굶기도 많이 했는데.”
“어? 정말?”
그렇게 물었다가 아차 했다.
실버가 어릴 때라면 6-70년대 일 테니, 그땐 특별한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아무튼 내 질문 때문인지 실버가 피식 웃었다.
“넌, 잘 먹고 잘 자랐나 보네. 그런 말 하는 걸 보면.”
“그럼. 우리오빠는 특별했거든. 엄마가 오빠는 절대 안 굶겼으니까.”
경희의 말에 실버가 머리를 끄덕인다.
“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어머님이 평소에도 널 애지중지 하는 걸 보면.”
실버의 말에 경희와 선희가 떡볶이를 씹으면서 동시에 머리를 끄덕이며 ‘맞아, 맞아.’ 하고 중얼거린다.
이 녀석들이.
“그런데 미자 씨 일은?”
“오늘은 괜찮다더라. 이젠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야. 혼자서도 잘 해내더라고.”
“그래서 섭섭한 거구나.”
그 말에 실버가 움찔거리더니 인상을 쓰며 날 본다.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섭섭하긴 누가 섭섭해?”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래.”
“······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짓던 실버가 한숨을 푹 쉬더니 떡볶이를 한 개 더 집어먹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는 신문을 집어 들고는 읽기 시작했다.
그때 새로운 불청객이 화실로 들어왔다.
“여어, 모두 안녕들 하신가?”
화실 문이 열리며 요란한 과일무늬 남방을 입은 이대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이 추운 겨울에 웬 알로하셔츠야? 설마, 하와이라도 다녀온 거야?”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이대봉이 히히거리며 웃었다.
“하와이 다녀온 티가 나?”
“어머, 정말? 제임스 오빠 하와이 갔다 온 거야?”
경희가 깜짝 놀라서 묻자 이대봉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뭐, 완벽한 하와이는 아니고.”
“완벽한 하와이가 아니라는 건 무슨 말이야?”
“창녕에 있는 부곡하와이.”
그 말에 내가 실소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경희도 실망을 한 모양인지 주둥이를 툭 내민다.
“에이, 뭐야? 난 또.”
하와이라고 할 때부터 어째 이상하더라니.
아직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대였으니까.
“내가 일본인이었으면 하와이를 갔을 텐데, 한국인이라 못 간다니까, 어쩔 수 없이 기분이라도 비슷하게 내 보려고.”
“무슨 소리야? 일본인이었으면 하와이를 갔을 거라니.”
“편집부에서 중원요리왕 성적이 좋다고, 해외여행 티켓이 선물로 나왔거든. 그래서 작화를 맡은 무카이 선생님도 이번에 하와이에 다녀왔다더라고. 그런데 우리나라 사정이 이러니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미쯔다쇼텐 내에서 무슨 시상식을 열었다고 했었는데.
거기서 상품이 그거였던 모양이군.
물론 삼사라, 파시엔시아, 다크 프린세스도 각각 상을 받았다. 물론 삼사라는 대상.
상패는 지금 화실에 걸려있고.
아, 참. 그때도 지로가 ‘적당한 상품이 없어서 현금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했었지.
아마도 그 상품이 해외여행에 관련된 상품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일본도 겨우 왔다 갔다 하는 정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서 편집부에서 준 게 부곡하와이 티켓?”
내 말에 이대봉이 인상을 쓰며 버럭 했다.
“야! 그럴 리가 없잖아! 돈으로 줬다고, 돈으로.”
“아.”
“아무튼 그래서 기분이라도 비슷하게 내 보자고 갔다 왔다는 거지.”
“그래서, 혼자 다녀온 거야?”
내 말에 이대봉이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 우리 윤환이도 나랑 같이 가고 싶었어?”
“무슨 헛소리야? 내가 왜 형이랑 둘만 가?”
그때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일단 초인종이 울렸다는 건 화실에 자주 오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마당으로 이어지는 문과 가장 가까이 있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바깥으로 나갔다.
또 책 판매원인가?
최근 들어 여러 가지 전집들을 팔러온 판매원들이 늘어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 확실히 책 판매원처럼 생긴 단정한 복장에 안경을 낀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인다.
“책 안살 건데요.”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구요. 혹시······.”
그렇게 말한 남자가 옆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뭐라고 하셨죠?”
그런데 남자가 말한 건 일본어였다.
그때 문 옆으로 머리를 쭉 빼서 돌아보니,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인다.
한눈에 봐도 세련된 머리와 화장, 그리고 어깨가 과도하게 강조된 정장을 입고 있다. 느낌으로도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보인다.
그런 그녀가 남자를 보며 인상을 쓰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중원요리왕. 그거 쓴 스토리 작가님 이랬잖아요.”
“아, 맞다.”
그렇게 말하더니 남자가 다시 날 돌아보며 한국말로 다시 물었다.
“중원요리왕 스토리 작가님, 혹시 이곳에서 지내시나요?”
“······어디서 오셨죠?”
“아, 맞나보네.”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곧장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시는 일본 여성분이 그 작가님을 만나고 싶다하셔서요.”
그 말을 들은 내가 다시 머리를 쭉 빼서는 여자를 향해 일본어로 물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네?”
내 입에서 튀어나온 능숙한 일본어에 깜짝 놀랐는지 움찔거린다. 그리고는 곧 표정을 수습하고는 나를 묘한 시선으로 보면서 물었다.
“여기서, 일하시는 분이세요? 혹시 일본인?”
“뭐, 여기서 일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일본인은 아닌데. 그나저나 제가 먼저 질문을 드렸는데요?”
“아, 실례했어요. 전 ‘주간 루머’의 기자인 미네 아츠코라고 해요.”
“주간 루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