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23화 (223/425)

동생의 꿈 (3)

- 네. 안 그래도 빌런X의 작가님이 단편만이라도 써니 작가님이 그려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지로가 그렇게 말하며 빌런X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해준다.

그런데 나도 들으면서 꽤나 놀랐다.

일전에도 단편원고를 봤을 때, 생각보다 콘티능력에 비해 그림실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였다.

죽은 동생의 콘티를 형이 하던 일까지 그만두고 뛰어들어서 도전했다니, 한편으로는 참 대단하다 싶었다.

누군가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이미 동생이 죽은 순간부터 삶이라는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가족의 사망이 주는 허탈감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빌런X가 삼사라에게 영감을 받아 만든 거라니 생각도 못했다.

솔직히 우리가 오히려 빌런X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하긴, 사이버펑크의 경우 서양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키라와 공각기동대가 다시 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기도 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다.

물론 그런 거창한 일에 비교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온다.

- 부담되시면 하지 않으셔도······.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음, 일단 생각은 좀 해볼게요. 선희의 의견도 좀 물어봐야 할 것 같고.”

그 말에 지로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의외라는 듯 약간 얼떨떨해하며 대답했다.

- ······그렇습니까?

“어? 왜 그러세요?”

- 아뇨. 실은 키도 선생님의 의견이었거든요. 저는 솔직히 단번에 거절하실 줄 알아서.

키도의 의견?

잠시 머리를 갸웃했다가, 곧 머리를 끄덕였다.

키도의 어시 출신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그 인간 성격이면 충분히 그럴 것 같기는 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하지 않으셔도 문제는 없으니까, 너무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선희가 마음에 없으면 의미도 없으니까요. 일단 선희가 돌아오면 물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내 선에서 거절하고 끝낼 이야기였다.

하지만, 일단 결정을 미룬 이유는 최근 선희가 보였던 모습 때문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데생이 끝나고 시간이 남으면 연습장에 각종 설정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거나, 혹은 옆방에서 신작 애니를 보는 게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희가 빌런X의 콘티를 보는 일이 자주 눈에 띄었다.

콘티를 보며 뭔가를 끄적거리는 모습도 본 것 같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결정을 보류한 것이다.

늦은 오후가 되자 쌍둥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경희가 허겁지겁 화실로 들어온다.

“오빠, 오빠! 실버오빠!”

화실에 들어오던 경희가 실버에게 다가가 큰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실버는 묵묵하게 삼사라에 펜선을 입히며 조용하게 말했다.

“또, 뭐?”

경희가 들고 왔던 책을 실버에게 펼치며 물었다.

“여기, 이거. 너무 이상해서.”

그것을 힐끔 본 실버가 인상을 팍 썼다.

“그게 왜? 전에 설명해 준 것 같은데.”

“아니, 실버오빠가 설명해준 거랑 선생님이 설명하신 게 전혀 달라서.”

“······어디가?”

“여기, 여기 말이야.”

“젠장, 시험 때문이면 그냥 배운 대로 해. 내 말 너무 믿지 말고.”

“그래도 오빠 이야기가 더 진짜 같으니까.”

“뭐라는 거야?”

“그렇잖아. 선생님 설명은 이야기의 맥락이 없어. 그냥 외우라고만 하니까, 외워지지도 않고. 난 선희가 아니거든.”

“머리가 나쁜 걸 탓해야지.”

“우 씨, 나 그렇게 머리 안 나쁘거든.”

“누구나 스스로는 다 그렇게 믿고 있지.”

“오빠!”

실버가 성질은 좀 지랄 맞은편이지만, 시사 관련 지식이 상당한 편이라서 가끔 경희의 공부를 도와주기도 한다.

경희 말로는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고 하는데, 나도 그 점은 동감이다.

실버는 어떤 사건이 생기면 그것만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경위라든가, 주변 상황. 그리고 시대를 적절하게 섞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설명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상당히 디테일한 편이라 덕분에 나도 요즘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게 되었을 정도니까.

특히 최근엔 미국 뉴욕의 유명호텔에서 있은 일을 가지고, 앞으로 일본이 힘들게 될 거라는 얘기도 자주하는 걸 보면 선견지명도 제법 있는 것 같고.

내가 만화 말고 관심이 없는 인간이긴 해도, 80년대에 있었던 무슨 합의를 한 뒤 일본의 부동산이 폭등하고 나중엔 잃어버린 20년인가, 뭔가를 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실제로 지로에게 들은 이야긴데, 일본 부동산이 들썩인다고 했으니까.

그럼에도 지금 한국의 그 어떤 뉴스나 신문에서도 이 사건을 별로 다루지 않는걸 보면, 실버의 식견이 얼마나 대단한 지 알만하다.

물론 지로나 미치코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가져오는 신문이나 잡지도 꽤 열심히 보는 모양이고.

아무튼 그런 실버 덕에 최근 경희의 사회, 역사 성적이 부쩍 늘긴 했으니 저런 반응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경희와 달리 실버는 얼굴에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아, 귀찮아.”

“좀, 가르쳐 주셔요. 오라버니. 저기, 커피 드릴까?”

결국 평소처럼 경희의 애교에 무너지고 만다.

“삼일일!”

“오케이!”

크게 대답한 경희가 히히거리며 부엌으로 달려간다.

그 모습을 보던 실버가 한숨을 푹 쉬자 주변에 있던 어시들이 웃는다.

“형이 너무 많은 걸 아는 게 문제지.”

내 말에 실버가 눈을 부라렸다.

“시끄러. 네 동생이 너무 귀찮은 게 더 문제야. 네가 교육을 잘 시켰어야지.”

“넘어가는 사람이 바보지.”

“끄응.”

그런 와중에 나는 작업 준비를 하는 선희의 자리로 가서 곧바로 물었다.

“선희야, 너 혹시 말이야. 빌런X 콘티 데생 작업해 볼 생각 있냐?”

“······?”

갑작스런 말에 놀랐는지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아니, 아까 아카기 씨랑 통화했는데······.”

지로와 통화한 내용을 선희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그 얘기를 듣던 선희의 눈빛이 살짝 변하는 느낌이다.

내 경험상 저 눈빛은······,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어때?”

그런데 선희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곧바로 자신의 책상 가장 아래 서랍을 열고는 거기서 원고용 종이들을 꺼낸다. 그리고는 그것을 책상위에 올려놨다.

데생원고다.

“이게 뭐야?”

“빌런X.”

“뭐?”

이건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라 잠시 놀라 멍하게 있던 내가 곧바로 데생원고를 들고 살펴봤다.

겨우 다섯 장밖에 안 되는 원고긴 해도 저번에 봤던 단편을 기반으로 만든 원고라는 건 단숨에 알아볼 정도다.

앞부분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 선희의 방식대로 그린 원고라 그런지 원래의 만화보다 더 생생한 느낌이다.

그런데 최근 시작한 삼사라의 데생에 비해서도 상당히 디테일하게 표현되었다.

아마도 펜 작업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하긴, 이 녀석 마음먹고 그리면 어느 정도까지 디테일하게 묘사할지 나도 감이 잡히지 않으니.

내가 평소 연재는 효율이 우선이라고 강조를 해서 그렇지, 얜 원래 디테일한 만화를 그리는 것이 전문이었으니까.

아무튼 데생만 봐도 빌런X라는 작품이 선희의 손을 거치면 얼마나 무섭게 변하는지 알 것 같다.

지금 내 팔에 닭살이 돋고 있으니까.

다섯 페이지만으로도 이만한 느낌이라면, 이게 연재를 한다면 어떤 파장이 올지.

다 보고 나서 물었다.

“왜 안 보여줬어?”

“오빠가 싫어할까봐.”

“뭐?”

내가 황당해하며 묻자 잠시 내 눈치를 살핀다.

얘가 평소 남의 눈치나 살피는 그런 애가 아닌데.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선희가 입을 열었다.

“남의 작품이니까.”

“출판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걸 왜 신경 써? 그리고 싶으면 그리는 거지.”

“······.”

“그리고 내가 왜 싫어해?”

“프로는 남의 작품에 숟가락 얹으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

하, 이런.

얘 입에서 숟가락이야기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하긴, 평소에 내가 자주 떠들던 말이기도 했으니, 내 책임일지도 모르겠다.

곧바로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내 저었다.

“괜찮아. 연습이라면 많이 할수록 좋은 거니까. 물론 네 말대로 남의 작품을 도용해 출판하면 문제가 커지니까, 그건 안 되는 거고.”

“······알았어.”

선희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얘는 이런 걸로 혼자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은 애라는 건가.

아무튼 그런 선희를 보며 피식 웃고는 곧바로 물었다.

“그럼 할 생각은 있다는 거구나.”

“······응.”

내 말에 선희가 머리를 힘차게 끄덕인다.

“좋아, 그럼 전화부터 할 테니까, 그 뒷부분 작업을 시작해봐.”

“안 돼.”

“엥? 갑자기 왜?”

내 물음에 잠시 멈칫하던 선희가 조그맣게 말했다.

“더 이상은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이만큼이나 그려놓고 이제 와서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니.”

“다음 장면부터는 이야기가 끊기고 이상해서.”

“······?”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곧 내 머리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알만한 말이다.

사실, 빌런X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상당히 완성도가 있지만, 문제는 전개과정이다.

단편으로 완성된 원고도 그렇지만, 일단 콘티부터가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 심한 편이다. 이 시절엔 그럭저럭 납득이 가는 전개방식이긴 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보는 것이 좀 불편하다.

물론 나와 함께 작업하는 선희의 입장에서도 그런 느낌이 드는 건 당연할 테고.

아무튼 선희가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 이상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알았어. 그럼 나랑 같이 콘티를 고민해보자. 하지만 일단 아카기 씨한테 연락부터 하고.”

“응.”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고 나자 곧바로 지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

며칠 후.

“안녕하시무니까!”

미치코가 화실에 들어오며 어설픈 한국어로 인사를 한다.

그래도 그동안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 덕분인지 발음도 많이 좋아졌다.

뭐, 어시들과도 간단하게 대화를 할 정도고.

하지만 아직은 일본어가 가능한 쌍둥이나 나와 주로 대화를 한다. 실버는 무서워서 잘 접근하지 않고.

“어서 오세요, 미치코 씨.”

“안녕하세요, 선생님.”

“요즘 ‘어둠의 클럽’ 인기는 어때요?”

“괜찮아요. 순위는 중위권이지만, 점점 팬도 늘고 있고요. 핑크걸 편집부에서도 기대하는 작품이에요.”

진짜 반응이 좋은지 신나하며 말한다.

“그럼, 미자 씨 화실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아뇨. 오늘은 아카기 선배의 부탁을 받고 온 거에요. 완성한 원고가 있다던데. 그거 가져가려고요. 뭐, 정 선생님 화실엔 들렀다가 일본에 바로 돌아가야 해요.”

“아, 네.”

곧바로 선희의 자리로 다가가 밀봉된 서류봉투 하나를 미치코에게 내밀었다.

“이거에요?”

“네.”

“아카기 선배가 절대로 보면 안 된다고 하던데.”

“아, 네.”

“무슨 만화에요?”

보면 안 된다고 들었다면서 나한테 물으면 어쩌자는 거야?

“일단 가져가셔서 아카기 씨에게 물어보세요.”

내 말에 무척이나 실망한 표정이다.

“아카기 선배는 고지식해서 절대로 그냥은 안보여 주실 거예요. 거기다 요즘 제가 주로 핑크걸에서 일을 하다보니까, 스파이로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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