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20화 (220/425)

100만 클럽 (5)

다음날 오후쯤에 다시 지로에게서 전화가 왔다.

- 일단 빌런X는 결정이 보류되었습니다.

“보류면 역시 원고를 받지 않겠다는 건가요?”

- 결국은 그렇죠. 제 입장에서는 좀 아쉬운 결정이었지만요. 물론 당사자의 심정은 더 최악일 테지만.

지로의 목소리엔 정말 아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도 빌런X의 장점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역시 편집부에선 그림이 가장 문제라고 판단한 거군요.”

- 네. 맞습니다. 스토리는 파격적이라서 호감을 가지는 사람도 많았지만, 역시 만화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이야기니까요. 상업적인 관점에선 성공이 어렵다는 게 최종결론이었습니다.

확실히 이 시대에 먹히기엔 그림이 너무 떨어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좀 이상한 것도 있다.

이상하리만치 스토리에 비해 떨어지는 그림솜씨 때문이다.

보통은 이만한 스토리와 분위기 연출이면 그림도 어느 정도는 따라가는 게 정상일 텐데.

하긴, 미래에선 원펀맨을 비롯해서 한국에서도 만화는 못 그렸지만 수준 높은 스토리와 분위기, 그리고 연출력을 가진 인터넷 만화고수들이 상당히 있었으니.

그러니까 아예 없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역시 그런 부류의 인간인건가?

“그래도 스토리는 좀 많이 아깝네요.”

- 안 그래도 개인적으로 그게 아쉬워서 따로 작화를 맡아줄 만화가와 이어보려고 했는데, 거절하더군요.

“그래요? 본인이 무조건 자신의 그림으로 만들겠다는 입장인 모양이군요.”

-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런 모양입니다.

하긴, 의외로 신인 중에 이런 사람이 많기는 하지.

만화가로서 목표를 가진 사람이라면, 스토리 작가로서만 남게 되는 걸 일찍 결정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도 한때 그런 꿈에 빠져있을 땐, 내가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니까.

어쨌건 본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

아쉬운 작품이긴 하지만, 그 문제를 내가 고민할 필요는 없다.

아무튼 지로와의 전화를 끊고 난 뒤 한참 뒤 쌍둥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화실에 들어왔다.

요즘엔 얘들도 바쁘다. 2학년이 끝나가는 시점이라 학교에서도 본격적으로 입시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선희야 별로 걱정할 것이 없지만, 경희는 나름 공부에 열을 올리느라 바쁜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진심의 남자 스토리를 준비하는 건 게을리 하지 않는다. 앞으로 스토리 작가로의 꿈을 가졌으니까.

선희의 경우는 특별히 생활에 달라진 건 없다.

저렇게 만화에 빠져있으면서도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라.

오빠로서는 좋은 대학에 갔으면 하는 욕심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본인이 원하는 곳에 가는 게 우선이 아닐까싶다. 물론 가족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고.

그러고 보니 중학생 이던 쌍둥이들도 어느새 내년이면 고3이구나.

만화에 신경 쓰느라 시간가는 줄도 몰랐는데.

“오빠.”

“······어? 뭐?”

“이거.”

잡념에 빠져있던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선희가 내 앞에서 원고를 내밀고 있다.

“이게 뭔데?”

“어제, 삼사라 콘티, 그거 보고 새로 그린 데생.”

“어? 뭐? 설마 그걸 벌써 작업했어?”

콘티는 어제 늦게 넘겨줬었는데, 그걸 밤에 완성했던 모양이다.

하긴, 데생이야 원래 빠른데다가 요즘 그림도 많이 데포르메 시켰으니 순식간이긴 하지.

“······!”

그런데 선희가 내민 데생원고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그림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 탓이다.

아니, 그림은 원래와 달라지지 않았지만, 연필선의 두께가 시원시원하게 뻗은 느낌이 다르다.

기존에 2B연필로 데생을 했었는데, 지금 데생에 쓰인 연필은······, 4B보다도 훨씬 두껍다. 느낌상으론 8B 같은데.

“8B 연필이니?”

“응. 전에 일본 아저씨가 선물해준 연필로 그려봤어.”

지로가 수시로 도구들을 가져오거나 소포로 보내주고는 있지만, 대부분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늘 쓰던 펜이 아니면 익숙하지 않아서 싫다고 하더니, 이번엔 어쩐 일로 이렇게 두꺼운 연필을 사용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페이지를 넘겨 가는데······.

어? 단순히 연필선이 굵어진 것뿐만이 아니라 콘티에 대한 연출 표현도 상당히 달라졌다.

더욱 두꺼운 선을 이용해 그리다보니 자연히 그림도 더 단순해 진 느낌이랄까.

전에 같은 그림에 사용하던 선이 10개였다면 지금은······, 대충 6-7개 정도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전에 비해 오히려 퀄리티가 올라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안정감이 있다.

굵어진 선이 액션감과 강렬함을 더욱 잘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이번 데생이랑 비교해보니 전에 그렸던 그림이 어설프게 느껴질 정도다.

선희가 또 성장을 해버렸다.

얘는 계단식 성장을 수시로 하는 느낌이다.

“······.”

“이상해?”

“아니. 괜찮아. 확실히 더 좋아. 그런데 갑자기 왜 그림을 변화시킬 생각을 했어?”

“어제 그거.”

“응? 뭐?”

“빌런X.”

“······.”

그걸 보고 그림을 변화 시켰다고?

아니, 도대체 어떻게 그런 그림을 보고 이런 변화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이젠 그림에서만큼은 내가 이해하기 힘든 수준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그래도 궁금해서 물었다.

“난 잘 모르겠다. 어디가 영향을 받았다는 건지. 네가 설명해 줄래?”

“······음.”

선희가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는 뭔가 설명하려고 입을 뻥긋거리다 다시 다물고, 다시 열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진다.

그런 선희를 보면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됐다, 됐어. 설명하기 힘들면 하지 마. 뭘 그렇게 무리하려고 하냐?”

“······.”

선희는 입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에 익숙한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 곤란하지.

그냥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선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남은 페이지도 살펴보기 시작했다.

콘티에서 보여준 연출에 비해 월등히 좋은 느낌으로 표현했다. 이젠 콘티의 연출은 그냥 참고만 할뿐 그대로 그리지 않는 경지에까지 올라버린 것이다.

그나저나······.

문제가 있다.

연필로 그린 이 그림을 어떻게 펜으로 묘사하느냐 하는 것이다.

원래 삼사라의 펜선을 담당하던 정미자가 독립한 상태에서 박수미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느낌이다. 어설프게 펜선을 입혔다가는 데생의 느낌을 반도 살리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고 선희가 직접 그리는 것도 문제다.

펜선만 놓고 보면 선희의 실력은 좀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아무래도 펜선의 베테랑들인 어시보다는 빠르게 그리기는 해도 그것을 살리는 것에는 부족한 편이다.

물론 펜선까지 시킬 생각도 없고.

그럼 남은 건 한사람뿐인데······.

내 시선이 작업에 열중하고 실버에게 향했다.

저 인간이라면 이런 그림을 제대로 살려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왜?”

깜짝이야.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머리를 들지 않은 채로 묻자 내가 화들짝 놀랐다.

“할 말 있어?”

“어. 부탁.”

“부탁?”

“어.”

그제야 실버가 머리를 들고는 날 쳐다본다.

“뭔데?”

난 바로 원고를 가지고 실버의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밀었다.

“선희가 그린 삼사라의 새로운 데생인데. 한 번 봐봐.”

“······?”

왜 그러나 싶은 표정으로 날 보더니 곧장 데생원고를 본다. 그리고 곧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변했다.

한 장씩 넘겨가던 그가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날 쳐다본다.

“확실히, 재미있는 데생이네. 네가 뭘 원하는 지 알 것 같다.”

“그렇지?”

“그래.”

머리를 끄덕인 실버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날 보며 말했다.

“역시, 이건 내가 할 수밖에 없겠네.”

하지만 문제는 남아있다.

실버가 만약 삼사라를 맡게 된다면, 다크 프린세스도 비슷한 방식으로 그려질 테니, 그것도 감당해야 하게 된다.

그렇다면 파시엔시아는?

사실, 파시엔시아의 경우도 펜선이 상당히 어려운 편이다.

물론, 변해버린 삼사라보다는 좀 덜 하긴 하지만.

그런데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실버가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다 입을 열었다.

“파시엔시아는 이제 소미가 맡아야지.”

“제가요?”

아까부터 우리대화를 신경 쓰고 있던 박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삼사라의 새 원고를 보고는 움찔한다.

“어?”

“그럼 이거 네가 감당 해볼래?”

“······이런 거면 곤란하겠네.”

박수미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다.

기존의 삼사라라면 모를까, 이렇게 급변한 그림이라면 부담스럽기도 하겠지.

“파시엔시아도 어려워요.”

“그건 내가 가르쳐 주지. 그리고 어려운 거 내가 조금씩 도와줘도 되고. 어때?”

“그럼 해봐야죠. 그나저나 오빠는 파시엔시아에 대한 정도 깊을 텐데, 너무 쉽게 넘겨주는 거 아니에요?”

“아니, 삼사라라면 괜찮아.”

“뭐야? 그럼 삼사라를 계속 노리고 있었던 거예요?”

“······.”

“오호라, 역시 예전엔 미자 언니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는 거군.”

그 말에 실버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한다.

나도 그건 몰랐는데.

“그건 아니지. 방금도 봤잖아. 윤환이도 내가 그릴 수밖에 없다고 하잖아. 어쩔 수 없으니까 맡는 것일 뿐이야.”

“왜 내 눈을 피하면서 말해요?”

“크음.”

* * *

새로운 그림체로 변모한 삼사라가 외부에 나오자 그 파급력은 생각이상으로 강력했다.

기존의 팬들도 ‘2차 업그레이드’라는 표현까지 쓰며 삼사라의 변화에 열광할 정도였다.

“이거 써니가 그린 만화가 맞아?”

“그림체는 그대로야. 펜선의 느낌이 달라진 걸 보면 어시가 바뀐 게 아닐까?”

“와, 이전에 그림도 엄청났는데, 지금은 소름이 끼칠 정도야. 발전 속도가 인간이 아닌 것 같아.”

“난 그림도 그림이지만, 연출 때문에 오싹하다. 우아한 공포가 이런 느낌일까?”

“우아한 공포? 난 세련된 느낌이던데.”

“과연 써니야. 이젠 그림이 너무 대단해서, 일본을 벗어나 버렸어.”

“괜히 천재라고 하겠냐? 삼사라가 아직 권당 판매부수가 50만부 언저리라는 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만화연구회 사람들은 모였다하면 삼사라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런 반응은 만화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80년대부터 만화가 활동을 시작한 젊은 세대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했다.

삼사라는 언제부턴가 만화가들의 교과서처럼 사용되어지는 작품 중 하나였으니까.

오토모의 아키라의 영향을 받은 작가가 대거 출현하는 것과 동시에 삼사라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도 무더기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새롭게 변한 삼사라에 열광을 하고 있었다.

* * *

흥분한 지로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다.

- 단행본 판매량이 다시 늘고 있습니다.

새롭게 변한 느낌의 삼사라가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는 얘기는 며칠 전에 들었지만, 그새 단행본 판매에도 연향을 미치고 있는 모양이다.

- 여러 큰 서점에서 단행본 재고가 없다는 소식도 출판부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요?”

- 네. 현재 1권만 60만부에 근접하고 있어요. 이런 분위기라면 70만부도 넘길 기세입니다.

“70만부요?”

- 네. 지금 삼사라가 계속 미쯔다쇼텐 단행본 판매량 기록을 계속 갱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사라 효과 때문에 소년 히어로의 발행량도 덩달아 늘고 있습니다. 새롭게 변한 삼사라가 좋은 반응이 있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나도 몰랐다.

- 어쩌면 미쯔다쇼텐 최초로 권당 100만부 고지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100만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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