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클럽 (4)
“이게 뭐야?”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경희가 테이블 위에 놓인 원고를 보며 관심을 보인다. 아무래도 우리 화실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아, 그거? 이번에 소년 히어로에 들어온 만화가 지망생 작품이래.”
내 말에 그림을 들여다보던 경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머리를 긁적인다.
“음, 그림은······, 좀. 그런데 갑자기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카기 씨가 한번 보고 의견 달라고 해서. 편집부에서도 결론을 못 내린 신인이래.”
“그림만 보면 별로 끌리지 않는데······. 뭐, 난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네 말대로 그림 때문에 반대하는 모양이야.”
“그림 때문에? 그럼 내용은 좋다는 거야?”
“그러니까, 결론이 안 난거지.”
“오, 그래?”
내 말에 경희가 감탄사를 날리며 급관심을 보인다.
“나 한 번 읽어봐도 돼?”
“어. 그래.”
“오, 땡큐.”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잡고 앉아 복사된 원고를 한 장씩 확인하며 보기 시작한다.
“음, 제목이 ‘빌런X' 라······.”
표지는 진짜 아마추어 초보 작가가 그린 것만큼이나 어설퍼서 그런지 경희도 별다른 느낌이 없는지 곧바로 페이지를 넘겨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첫 페이지부터 쏟아지는 지문들의 향연.
조금은 난잡한 진행임에도 경희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리고 10페이지쯤 되었을 땐 주변의 소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
원래 소설책을 볼 때도 집중력이 있는 아이긴 하지만, 이 만화 자체가 엄청난 몰입감을 주는 탓이기도 할 것이다.
평소라면 단번에 스슥하고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을 텐데. 이번 건 조금 시간이 걸리는 느낌이다. 그리고 한참 후, 다 읽었는지 마지막 장을 내려놓으며 내게 물었다.
“오빠, 혹시 이거 뒤편도 있어?”
“어. 콘티로는 있다고 들었는데, 여긴 없어. 내가 담당편집자는 아니니까. 그나저나 어때?”
“처음엔······, 그림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것은 알 수 없을 만큼 재미있어서 신경 쓰지 않게 되었어. 몰입하니까 되게 긴장돼.”
역시 경희도 나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좀 잔인해서 불편하지는 않던?”
“좀 그렇기는 하던데. 전에 일본만화 처음 볼 때만큼은 아니라 크게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어.”
하긴, 경희가 처음 일본만화잡지들을 봤을 때, 분명 소년지 임에도 사람을 토막 내고 목을 자르는 사무라이 만화에 꽤나 충격을 받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린 적이 있었지.
그때 뭐라고 했더라?
아.
‘이런 만화를 보는 일본사람들 정신이 온전한 거 맞아? 난 일주일 넘게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렸어.’
그렇게 말하며 호들갑을 떨었었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익숙해졌는지 그런 만화도 별 큰 멘붕 없이 보기 시작했다.
아무튼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긴 한다.
그러다 문득.
응? 그렇다면 큰 문제가 없는 건가?
경희도 잔인성에 대해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걸 보면.
그런데 그때 경희가 다시 말했다.
“그림 때문인지, 잔인한 느낌은 좀 덜하지만 확실히 분위기는 살벌하네. 그나저나 그림만 좋으면 딱 금상첨화인데.”
역시 마지막엔 그림이 아쉽다는 거군.
“그래서 결론은 재밌다는 거지?”
“응. 정말 재미있어.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기는 해도.”
“공포영화도 그렇잖아. 보는 동안 무서움에 움찔거려도 재밌어서 눈을 못 떼는 거. 그리고 다 보고나면 찜찜한 마무리를 주는······.”
“맞아.”
어쨌거나 경희도 재미는 인정했으니, 대중성도 괜찮아 보인다.
문제는 잡지가 이런 성향의 만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저녁.
모두 퇴근 한 뒤, 지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작품 같아요. 하지만 화실 식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의견이 좀 갈리기는 합니다. 그림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다는 사람도 있고.”
내 말에 지로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내 말에 금방 수긍하며 대답했다.
- 역시 그렇군요. 회의에서도 계속 그 문제 때문에 결론이 나지 않았거든요.
“그나저나 폭력수위가 상당히 높던데, 그냥 소년지 보다는 청년지가 낫지 않을까요?”
- 이 정도는 폭력성은 괜찮다는 게 편집부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각자 잡지마다 성향이 있는데, 저희 소년 히어로는 이런 부분에서는 좀 관대한 편이라. 좋게 말하면 자유롭고, 나쁘게 말하면 뭔가 특징이 없긴 하죠.
“아.”
사실, 지로의 말대로 소년 히어로는 특별한 특징이 없다.
소년매거진이 상남자, 혹은 야한 느낌의 성향이 강하다면, 소년선데이는 러브 코미디 작품이 강세를 보이는 곳이다.
소년점프의 경우엔 ‘우정, 노력, 승리’라는 로고가 정해진 곳이고.
아무튼 이런 빅3의 잡지들도 각자의 성향이 있지만 지금 소년 히어로엔 그런 것이 없다. 그러니까 그냥 이것저것 잡다한 느낌인 거다.
잠시 뜸을 들이던 지로가 웃으며 말한다.
- 제 발등을 찍은 건가요?
“하하.”
나도 덩달아 웃었다.
- 아무튼 선생님의 의견은 재미가 있으니 괜찮다는 거군요.
“네.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요.”
- 알겠습니다. 그 부분을 회의에서 다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원고를 살펴보았다.
분명 내가 살던 시절에는 그림이 어설퍼도 재밌으면 분명 통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80년대.
의도적으로 단순화 시킨 그림이 아닌, 그냥 그림자체가 많이 부족한 만화가 대중에게 먹힐 거라고는 장담하기 힘들다.
거기다가 내용도 주인공의 폭주가 주 내용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있는 그런 악한 모습을 밖으로 끄집어 낸 작품이라, 이 시대의 주류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미래에서야 이런 작품이 이미 성공한 케이스가 많이 존재했으니 가능성이 높지만, 지금은 글쎄······.
어쨌거나, 이 만화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앞으로 소년 히어로 편집부의 의견에 달려있을 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돌고 돌다가 소년 히어로까지 들어온 원고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언제 왔는지 선희가 내 곁에 앉아서 같이 원고를 보고 있다.
그러다가 슬쩍 자신 쪽으로 가져가서는 계속 바라본다.
선희는 그림 때문에 별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예전에 처음 아키라나 동몽을 봤을 때처럼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선희도 스토리 때문에 그러는 걸까?
한참을 들여다보던 선희가 이번엔 빌런X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계속 봐도 돼?”
“어. 그래.”
이 만화에서 뭔가를 본걸까?
일단 선희가 뭔가 생각을 시작한 모양이니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 선희의 모습이 신기한지 경희가 의아한 표정을 말했다.
“그림은 별론데, 이야기도 단순하고.”
“아까는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더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응. 맞아. 재미는 있어. 그런데······, 다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별다른 내용이 없었던 것 같아. 볼 때는 정신없이 본 것 같은데. 역시 오빠 말대로 공포영화 같은 이야기라서 그런 건가?”
“맞아. 공포영화에선 공포의 대상이 주인공인 것도 많으니까.”
“아, 그래서 삼사라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구나.”
“당연하지. 삼사라와 저 빌런X는 애초에 이야기의 목적도 달라. 우리 쪽은 희망이 목표지만, 저건 주변을 모두 절망에 빠뜨리는 게 목표잖아.”
경희가 내말에 머리를 끄덕인다.
빌런으로서 의무 같은 게 아니라 어찌 보면 주인공의 광기가 주 내용인 만화다.
공감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한 만화.
그렇게 내말에 뭔가를 생각하던 경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주인공은 정말 미지의 공포 같은 느낌일거야.”
“그렇지.”
그런데 그때 뭔가 머리를 스치는 느낌이 있었다.
“······어? 그건가?”
미지에 대한 공포.
빌런인 주인공에게만 집중해서 정확히 못 봤는데, 저런 식으로 입장을 바꿔보면 왜 이만화가 삼사라와 다른지 좀 더 명확해진다.
그러니까, 삼사라는 절망적인 미래를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느낌은 이 빌런X에 비해 오락성에 집중한 만화다. 그 때문에 절망적인 세상이라는 것에 심취하는 게 힘들다.
아니, 이 시대의 작품들은 보통 이정도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빌런X는 그 감정이 좀 더 실제에 가깝다는 거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내용에 더 심취하는 이유가 바로 공포감이 리얼하다는 점이다.
단순한 이야기를 가지고도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이었던 것이다.
“뭐야, 뭔데 그래?”
내가 왜 고민에 빠진 건지 궁금한 듯 보이는 경희가 재촉했다.
“잠깐만. 나중에 얘기해 줄게.”
“아, 궁금하게 해놓고 이렇게 딱 끊냐? 너무해.”
경희가 그렇게 말하며 투덜거린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도 난 그냥 콘티노트를 다시 꺼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불어 새로운 연습장에다 지금의 생각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외출 중이던 박상식이 화실에 들어왔다.
그런 그에게 내가 말했다.
“형, 나 좀 봐.”
“어? 왜? 무, 무슨 일인데?”
갑자기 왜 이러지?
뭔가 상당히 당황하는 느낌이다.
그러다가 뭔가 알 것 같은 기분에 박상식을 빤히 봤더니 은근히 시선을 피한다.
“전 선생님 화실에 갔다 온 거 맞아?”
“다, 당연하지.”
“······.”
“······신작 스토리 문제 때문에 만난다고 했잖아. 정 의심스러우면 전화를 걸어보던가.”
“전화를 왜 걸어? 내 일도 아닌데. 그리고 형은 왜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 죄지은 사람처럼.”
“쿨럭!”
딱 보니까, 전상길의 화실에 다녀온 건 맞는 것 같은데, 그 이후의 행적이 아마도 문제인 모양이다.
아마도 누나를 만났겠지.
사실, 이제는 두 사람이 많이 가까워진 상태라 아마도 따로 만나는 일도 잦은 것 같고.
다 큰 어른들인데 내가 간섭하는 건 웃기는 일이지.
그렇게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딴 짓을 하는 박상식에게 내가 말했다.
“형, 삼사라 콘티 수정해보자.”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박상식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뭐? 갑자기 왜? 무슨 문제 있어? 내가 보기엔 이번 에피소드는 엄청 재밌던데, 이야기의 흐름도 나쁘지 않고.”
“아니, 스토리는 괜찮아. 그냥 분위기 묘사를 바꿔보고 싶어서.”
“분위기? 내가 보기엔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일단 내 얘기를 듣고 나서 판단했으면 좋겠는데.”
“알았어.”
박상식이 끄덕이고 나자 곧바로 내가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장면 말인데, 시점을 좀 바꿔서······.”
그렇게 한참동안 수정해야 할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해나갔다.
처음엔 별다른 표정 없이 머리만 끄덕이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박상식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호기심이다.
오랫동안 같이 스토리를 만들다보니 이젠 박상식의 표정만 봐도 뭘 생각하는 지 짐작이 된다.
분명 지금 엄청 재밌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생각했던 부분의 설명이 끝나자 박상식이 팔짱을 끼며 몸을 살짝 떨었다. 그리고는 날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왜?”
“넌, 정말. 어떻게 이런 생각을 잘도 하냐?”
“어때, 형 생각은?”
“말해 뭐하냐? 당연히 이걸로 가야지. 같은 이야기지만 연출을 이런 식으로 한다면 독자들 정신이 저릿저릿 할 거야. 이건 무조건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