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클럽 (3)
100만부라.
역시 소문대로 미쯔다 히로유키라는 사람은 야심이 큰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 미쯔다쇼텐을 히로유키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을 때만해도 조그마한 출판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지로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작은 회사를 빠른 시간 만에 크게 키웠다. 물론 중심이 되었던 건 패션잡지였다.
지금도 미쯔다쇼텐에서 가장 잘나가는 부서도 패션잡지 쪽이고.
아무튼 그런 출판사가 만화를 시작한 건 결국 만화라는 트렌드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뛰어든 전쟁터에서 미쯔다쇼텐은 철저히 외면 받았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하게 지로가 삼사라를 담당한 채로 입사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만화부서 전체가 약진하고 있다.
물론 결과도 상당히 좋기는 하고, 실제로 소년 히어로의 경우엔 판매부수도 중견급이상이니까.
하지만 100만부는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 100만부를 넘긴 잡지가 몇 개 되기는 하지만, 다 일본 최고의 소년만화잡지들이다.
그런 곳에 소년 히어로가 들어간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편집부로 돌아온 지로가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으며 책상 위에 있는 두 개의 복사원고를 내려다본다.
삼사라와 파시엔시아.
삼사라의 경우엔 뭐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작품으로 발돋움하고 있긴 하지만, 파시엔시아는 좀 다르다.
작품으로서는 굉장히 출중한 작품이라 스포츠 만화 팬들 사이에선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정작 상업성은 지금 최고의 인기 만화인 ‘캡틴 츠바사’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림의 디테일함이나 리얼함에서는 충분히 대단함에도 정작 잡지의 주 독자층인 일반 팬에게는 어필이 부족한 것이다.
물론, 이 문제 역시 잡지의 인지도 차가 가장 큰 문제이긴 하다.
캡틴 츠바사의 경우 400만부를 팔아치우는 소년점프라는 괴물잡지에 연재되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파시엔시아가 캡틴츠바사와 싸우려면 소년매거진이나 소년선데이 정도엔 연재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캡틴츠바사의 경우 기존의 소년만화와 달리 여자들에게도 큰 인기가 있다. 그런 작품을 넘기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지로도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큰 작품이 바로 파시엔시아였다.
하지만 지금 이상의 인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다.
잡지의 인지도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지로가 생각에 빠져있던 그때였다.
“저······.”
“······?”
처음 보는 사람이 지로의 자리 근처로 다가와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리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에 더벅머리, 낡은 청남방을 입고 있는 왜소한 체격의 젊은 남자.
그를 자세히 살펴보니 한쪽 겨드랑이에 황토색 서류봉투가 끼워졌다. 그것을 보고나서야 지로가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이마도 만화가 지망생인 모양이었다.
“아, 원고 가져오신 거군요.”
“네······.”
“혹시 담당이 있어요?”
지로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더니 한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아, 아뇨. 여기 찾아온 건 처음이에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저도 편집자니까.”
“네. 부탁드립니다.”
“일단 저쪽으로.”
그렇게 말하며 편집부 구석에 있는 파티션 뒤쪽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남자가 내민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지로가 서류봉투에서 원고를 꺼내며 말했다.
“분량이 제법 많네요.”
“그런가요?”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다.
대충 봐도 4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다. 연재로 치면 2화분.
“이거 단편이에요?”
“네. 하지만 장편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기 때문에 뒤의 이야기는 더 만들어 두었어요. 물론 네임으로만.”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끄덕이고는 원고를 한 장씩 살펴나간다.
신중한 눈빛으로 원고를 빠르게 넘기며 전체적인 구성이나 그림실력을 살펴봤다. 하지만, 대다수의 다른 지망생에 비해 그림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한 건 아니다. 아니, 오리려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다.
애초에 개그만화라면 모를까, 얼핏 내용도 어둡고 리얼한 느낌이라 더 실망스럽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스토리는 살펴봐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스토리 위주로 원고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레이션이 많은 스타일이라, 읽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겨갈수록 자신도 모르게 점점 내용에 빠져들어 갔다.
강력한 힘을 얻은 인간이 처음엔 주변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나가며 살다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느껴 결국 악인으로 변해가는 이야기다.
보통 히어로 만화에서 등장하는 악인이 주인공인 듯한 전개방식.
그런데 그게 일반 히어로 만화처럼 과장된 느낌이 아니라, 상당히 리얼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거기다가 완전한 악인도 아니어서 그냥 이유 없이 악행을 하는 것도 아니다.
누가 봐도 최악의 범죄자는 자신이 직접 처단하는 일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아무튼 주인공은 미묘한 위치다.
완전한 악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도 아닌.
그냥 불안정한 느낌의 인간.
그러고 보면 아키라의 테츠오와도 닮아있다.
다만, 그림이 어설퍼서 크게 와 닿지는 않지만, 더 잔인하다는 게 다를 뿐.
아무튼 주인공의 폭주로 인해 사람들이 공포에 떨며 그를 막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지만, 많은 이들이 죽어나간다.
자비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충격의 연속.
소년만화 치고는 다소 파격적인 진행이긴 하지만, 몰입감은 상당하다.
그림이 아쉽다는 점만 제외하면 굉장한 만화라는 느낌이다.
“아까 말씀하신 이거 뒷이야기요.”
“네.”
“네임 혹시 지금 가지고 있어요?”
“아, 네. 잠시 만요.”
그렇게 대답한 남자가 허둥지둥하며 가방을 뒤적거린다. 그리고는 여러 권의 연습장중 한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지로에게 내밀었다.
지로는 다시 연습장을 펼쳐 네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네임 속 그림은 당연하지만 원고보다 훨씬 부족하다. 그래도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아 금당 몰입해 읽어갔다.
그리고 곧 연습장을 덮었다.
“이야기가 끝이 아니네요.”
“네. 이야기가 좀 길거든요.”
“그렇겠군요.”
납득한 지로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런 이야기라면 충분히 시간을 두고 천천히 표현하는 게 더 흥미가 있을 테니까.
물론 아직은 지망생이라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어색한 대사들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충분히 재미가 있는 만화다.
하지만, 당장 지로가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일단 오늘은 원고랑 연습장 모두 놔두고 가셔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로가 곧장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이랑, 테이블에 있는 메모지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이건, 제 명함이고요. 여기엔 이름이랑 전화번호를 좀 적어주시겠습니까?”
“아, 집에 전화기는 없어요.”
“네? 그러면 연락은 어떻게? 편지로 보내드릴까요?”
“네. 그래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평소엔 일하느라 바빠서. 오늘도 하루 쉬었거든요. 뭐, 그 때문에 내일은 야간잔업도 해야 하긴 하지만.”
“아, 네.”
“그럼 전 가 봐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그렇게 남자를 보내고는 곧장 원고를 다시 살펴보고는 야지마를 찾았다.
“선배, 이거 한번 봐 주실래요?”
“뭔데?”
“방금 왔다간 만화가 지망생의 원고에요.”
“왜? 꽤 괜찮아서 그래?”
“네. 하지만, 내용이 좀 파격적이라서······.”
“내용이?”
“일단 한번 보세요.”
“어. 그래.”
야지마가 지로에게 원고를 받아서는 곧장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름 지로의 말에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첫 페이지를 보자마자 실망한 표정이 된다.
“그림에만 집중하지 말고, 내용이요, 내용. 그걸 보라고요.”
“알고 있어. 하지만, 그림이 좀 너무 그렇지 않나?”
“일단 읽어보시라니까.”
“알았다, 알았어.”
야지마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원고를 살피기 시작한다.
“페이지는 좀 많네.”
그렇게 투덜거리며 페이지를 넘겨가던 그도 곧 내용에 심취했는지 보는 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
그렇게 한참을 보던 야지마가 곧 머리를 들었다.
“야, 이거. 제법 재밌는데?”
“제법이 아니죠. 이정도면 상당하지.”
“그래, 뭐. 그렇기는 한데······.”
머리를 끄덕이는 야지마의 표정이 복잡해 보인다.
“이거 내용이 좀 파격적인데?”
“그렇죠?”
“그래. 디테일한 그림이었다면 너무 잔인한 느낌이고.”
“역시 소년만화에 맞지 않을까요?”
“그래도 대사는 전체적인 흐름은 소년만화에 더 어울리는 편이라서 그런 것도 아닌데.”
“솔직히 저도 이런 그림이라면 느낌이 좀 반감되니까, 오히려 그게 장점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도 너무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게 문제인데.”
“그럼, 보류인가요?”
“아니, 이정도면 팀장회의를 건의해볼게. 그리고 결정이 나면 편집장님과 부편집장님이 회의를 참석하실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원고를 들고 팀장들 중 가장 선임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에게 뭔가를 이야기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도 보인다.
* * *
“제 의견이요?”
- 네. 내일 카와다가 복사원고를 가져다 드릴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만화가 지망생의 원고를 봐달라니, 무슨 일이지?
말로는 팀장회의에서 의견이 반으로 갈려, 결정을 하지 못한 원고라는데.
그리고 팀장 중 한명이 낸 의견으로 내게까지 원고가 온다는 모양이다.
뭐, 원고를 보고 내 의견만 이야기하면 되는 거니까, 별일은 아니기는 한데.
그래도 결정을 내리지 못할 정도의 만화라니.
뭔가 궁금하기는 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미치코가 화실을 찾아와서는 서류봉투를 내게 줬다.
“아카기 선배가 드리라고 하던 원고에요.”
“네.”
“정미자 선생님 화실에 들렀다가 오후에 다시 올게요.”
“네, 그러세요.”
내가 말하자 미치코가 서둘러 인사를 하고 곧장 화실을 나선다.
그 모습을 보고 난 뒤 서류봉투에서 복사된 원고를 꺼냈다.
일단 원고를 꺼내자마자 본 첫 느낌은······, 상당히 그림이 난잡하다는 거였다.
팀장회의에서 결정이 나지 않았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그래도 그림의 퀄리티는 좋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그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내용이라는 건데.
얼핏 봐서는 글이 많은 만화라가 눈에 잘 들어지는 않지만 그래도 천천히 집중해 읽어봤다.
그리고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깜작 놀랐다.
“······!”
생각보다 파격적인 장면이 많아서.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는 장면이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물론 생각해보면 내가 살던 시절의 기준으로는 파격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85년이라는 시대를 감안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게 맞다.
일본만화야 한국에 비하면 표현의 수위가 자유롭긴 하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좀 대단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소년지 다운 전개이고, 또한 상당히 재밌다.
이제야 팀장회의에서 결정이 나지 않은 이유가 납득이 된다.
그림이나,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반대한 집단과 내용이 재미있어서 찬성하는 집단.
물론 그림을 문제 삼았을 수도 있고.
아무튼 이런 만화가 80년대 중반에 나타났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충격이다.
잘은 모르지만, 일본 내에서도 만화의 동향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나라는 존재가 일본이라는 만화계에 영향을 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원래 있었는데, 주목을 받지 못해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만화가 만약 소년 히어로에 연재된다면 제법 큰 반향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더불어 나도 엄청 자극이 된다.
이렇게 뭔가 방법을 찾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도리어 퇴보할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