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클럽 (1)
‘어둠의 클럽’ 단편이 들어간 핑크걸이 출간된 지 며칠 후.
독자들로부터 반응이 좋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편집부가 예상한 대로 연재를 원한다는 독자엽서가 제법 많이 날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핑크걸이 출간되는 잡지가 아니라서, 그 반응을 정확히 아는 것은 어렵다. 그래도 잡지를 받아오니, 일단 그림만으로도 확실히 튀는 수준인건 분명하다.
그동안 정미자가 사력을 다해 만든 만화인데, 결과가 나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모두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가 좋다는 말에 모두 안심했다. 아니, 안심정도가 아니라 모두 정미자를 더 축하해줬지만.
아무튼 단편의 결과도 좋았고, 연재도 결정된 마당이라 정미자는 독립을 더 미룰 수 없다며 작은 화실을 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동안 화실생활하며 모은 돈을 기반으로 인근에 작은 방 하나를 구해 그곳을 작업실로 삼을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화실을 구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얼마 후에 정미자는 모든 개인물품을 챙겨 화실을 그만두었다.
물론 일반 회사의 기준을 적용해 퇴직금도 정산했다.
화실에서 일하면서 퇴직금을 주는 경우가 드물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굳이 다른 화실의 사정을 따를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녀가 화실을 그만두고 나자 일하는 동안에는 그녀의 빈자리 덕분에 화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느낌은 강했다.
이제껏 한 번도 누군가가 화실을 그만두고 나간경우가 없었으니 당연한 거지만.
그러나 그것도 며칠 지나니까,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간다.
물론 실버는 정미자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별다른 변화가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아무튼 화실 일하는 것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기존 삼사라의 배경을 맡았던 박소미가 인물 펜선을 맡기로 한 것이다.
전문성에 집중하려면 계속 배경을 맡아주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만화가를 꿈꾸는 본인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박소미와의 대화를 한 뒤 인물펜선으로 보직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박소미가 대부분 맡고 있던 배경은 차미정이 거의 다 인수인계를 받았다. 물론 아직은 실력이 부족한 탓에 박소미가 조금씩 돕게 될 것이다.
물론 새롭게 어시가 들어온다면 일부 일을 맡게 될 것이고.
그나저나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박소미가 의외로 인물 펜선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알고 보니, 그동안 틈틈이 펜선연습을 해왔던 모양이었다.
기존의 화실에서도 배경담당에서 인물펜선담당으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나중을 위해서 스스로 연습을 꾸준히 해온 탓이다.
하지만 정미자의 빈자리를 당장 채운다는 건 무리, 그래서 한동안은 실버가 도와주며 적응해 나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어시는 이대봉이 알아보고 있었다.
“괜찮은 애들 몇 명 봐뒀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봐. 그래도 계속 같이 일해야 하는데 실력만 좋다고 덥석 데려올 수는 없잖아. 여기 화실은 다른 곳이랑은 분위기가 달라서, 이상한 애 데려오면 두고두고 욕먹을 거잖아.”
“뭔가 중신애비 같은 소리네? 경험이 있었나봐.”
“말도 마. 예전에 정신 나간 애 하나를 친한 화실에 잘못 소개해주고 얼마나 욕먹었는데?”
“아.”
“그리고 지금은 정미자, 걔한테도 신경 써야 해서.”
“아, 그렇구나. 거기 어시는 구했어?”
“뭐, 내일 여자애들 두 명 데리고 갈 예정이야. 그쪽은 아직 베테랑급 애들이 필요한 건 아니라서,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우리 화실에서 배경을 담당할 정도라면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신중하게 사람들을 물색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며칠 후, 휴일.
정미자의 화실이 완전히 정리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집들이를 위해 그곳을 찾아갔다.
쉬는 날이라 각자 방문하기로 하고 나는 쌍둥이들과 함께 그곳을 찾아갔다.
“여기에요.”
우리를 정미자의 화실로 안내 한 건, 박소미였다.
먼저 와서 정리를 도와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에 인근에 작업실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걸어서 대충 10분 정도 거리?
집은 이 동네에서 흔한 다가구 주택이다.
건물도 예전에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우리가족이 함께 살던 그곳이랑 닮았다.
박소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두 번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도착한 화실식구들이 모여 있다.
우리를 보자마자 정미자가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같이 인사를 한 뒤 안을 둘러보았다.
책상은 방 한쪽에 ㄱ자 모양으로 세 개를 이어놓았다. 공간의 효율성을 위해 서랍상자 위에 테이블을 올려놓은 형태다.
그럼에도 방이 커 제법 공간에 여유가 있다.
화실 식구들이 모두 들어와도 될 만큼.
하지만, 아직 실버와 이대봉은 보이지 않는다.
한쪽엔 다락방문이 보인다.
아마 잠은 저기서 자는 모양이다.
그래도 여자 방이라 그런지 정리도 잘 되어있고, 깔끔하다.
들고 왔던 휴지들과 세제는 방 한쪽 구석에 내려놓고, 방바닥에 앉았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네요.”
내 말에 정미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익숙한 동네라서 멀리는 못 벗어나겠더라고요.”
“실버 형이랑 대봉이 형은요?”
“실버 씨는 아까 갔고요, 제임스 오빠는 지금 내일 오기로 했어요. 지금은 부산에 있는 모양이에요.”
“부산요?”
“네. 늘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바쁘잖아요.”
“그렇긴 하죠.”
무슨 대동여지도라도 만들 작정인지 전국을 수도 없이 돌아다닌다.
“어시는 구했어요?”
“네. 며칠 전에 제임스오빠가 두 명을 데리고 왔었거든요. 경험도 있고, 실력도 제법 좋아서 내일부터 바로 일 시작하기로 했어요.”
“카와다 씨는 화실 위치 알아요?”
“일단 주소는 아카기 씨에게 알려드렸어요.”
내비게이션이 없는 세상이니 주소만으로 찾는 건 쉽지 않을 텐데.
뭐, 그거야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문제지만.
“배달 왔습니다!”
걸걸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미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은색 배달통을 든 남자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짜장면과 탕수육, 그리고 군만두.
정신이 없어서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정미자가 미안해했다.
하지만 모두 좋아하는 음식이니 신나하며 달려들었다.
쌍둥이들도 평소 좋아하는 음식이니 오히려 표정이 밝다.
아직 밥상도 준비 못한 덕분에 모두 방바닥에 둘러앉아 먹으면서도 연신 수다를 떨며 즐거워한다.
예전 처음 우리 화실에 찾아왔을 때의 이야기라든가, 소년 히어로에서 1위를 차지하고 회식을 했던 일, 그리고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까지.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화실생활의 이야기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 * *
“안녕하세요!”
미치코가 지로의 자리로 다가오며 인사한다.
“너는 이제 핑크걸 편집부 소속이잖아. 그런데 왜 여길 자꾸 들락거려?”
“어머, 저 임시에요, 임시. 핑크걸에선 임시로 머문다는 거 모르세요?”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어둠의 클럽이 연재가 결정된 마당에 임시는 무슨 임시. 설마, 금방 연재가 끝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지금 핑크걸 편집장님이 얼마나 기대하시는데.”
“그럼, 임시가 아니지.”
“에이, 그래도 원래 소속은 여기 소년 히어로에요. 아시면서.”
몸을 살짝 꼬며 콧소리까지 내자 지로가 인상을 팍 썼다.
“갑자기 왜 그래? 몸에 벌레라도 기어 다녀?”
그 말에 미치코가 볼을 부풀렸다.
“선배는 애교도 몰라요?”
“애교?”
“네. 다른 선배들은 엄청 좋아하는데. 분위기도 밝아지고 좋다던 걸요.”
“그런 걸로 분위기가 좋아진다고?”
그렇게 되물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미치코가 입을 꽉 다물더니 곧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해. 전 이만 갈래요.”
“······.”
그리고는 미치코가 뾰루퉁한 표정으로 돌아서서는 곧바로 편집부를 빠져나간다. 그 모습을 보던 지로가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언제 철이 들려는지.”
그런데 그때 야지마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니가 그런 말 할 처지냐?”
“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지로를 보며 야지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너나 정신 좀 차려 임마. 애꿎은 카와다에게 그러지 말고.”
“제가 뭐요?”
“네가 그러니까 여자가 없는 거야. 쟤 오랜만에 와서 편집부 분위기가 화사해지나 싶었는데, 온지 몇 분도 안 돼 쫓아버리다니. 주변을 좀 둘러봐.”
그 말에 지로가 슬쩍 돌아보자 편집부 직원들이 불만 섞인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다.
“모두 왜 저래요?”
“방금 내 말 못 들었냐? 네가 카와다를 쫓아내서 그런 거잖아. 가뜩이나 여자직원이 거의 없는 부서였는데, 핑크걸 편집부로 가버려서 모두 얼마나 아쉬워했는데.”
“그랬어요?”
“그랬어요는 무슨. 아무튼 너 한번만 더 카와다를 쫓아버리면 이지메 각오해야 할 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데 주변의 직원들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야지마의 말처럼 진짜 이지메를 당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때 다시 미치코가 편집부로 들어온다.
“아,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깜빡했어요.”
방금 잔뜩 부은 얼굴로 나간 미치코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는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자 지로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으면 그것부터 할 일이지.”
“죄송해요. 제가 잘 깜빡하잖아요.”
그 말에 곁에 있던 야지마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깜빡할 수도 있지.”
“그렇죠?”
“당연하지. 누구처럼 냉정한 것보다는 백배 낫지 안 그래?”
그 말을 이해했는지 미치코가 사악하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요. 냉정한 것보다는 좋죠.”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직원들까지 ‘맞아’를 반복하며 머리를 끄덕인다.
이 인간들이 단체로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지로가 주변을 돌아보다가 곧 미치코를 쳐다봤다.
“까먹은 거나 얼른 얘기해.”
그 말에 야지마가 지로의 옆구리를 푹 쑤시자 움찔하고 놀란다.
“읏!”
“야, 너는 왜 카와다를 그렇게 재촉하게 그래?”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미치코를 보며 웃었다.
“자자, 천천히 이야기해도 돼. 알겠지?”
“아뇨. 저도 일이 많아서요. 빨리 얘기하고 가봐야 해요.”
“그럼 빨리 얘기······ 아얏!”
지로가 다시 몸을 꿈틀대더니 곁에 있는 야지마를 쏘아본다.
“왜 그래요?!”
야지마는 여전히 모른 척 하며 웃었다.
“자자, 그럼 천천히 얘기들 나눠.”
그렇게 말하고는 금방 자리를 벗어나 버린다. 그런 그를 지로가 가재미눈을 한 채 쳐다보았다.
“······.”
그 모습을 보며 멀뚱거리던 미치코가 잠시 뜸을 들이다 곧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 지금 보자고 하세요.”
“뭐? 사장님?”
“네. 지금 당장 임원 회의실로 오시래요.”
갑작스런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걸 이제야 얘기해!”
“깜빡했어요. 헤헤.”
“야, 이게 웃을 일이냐?!”
그렇게 버럭 하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지로를 쏘아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