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도 괜찮아 (2)
이것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로 연재라는 건 전혀 뜻밖이다.
하지만 뭐, 결국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좋고.
이 와중에도 내 걱정부터 하다니, 나도 참.
어쨌건 정미자 스스로에겐 감격스러운 순간일거다.
슬쩍 정미자의 자리를 돌아봤다.
아, 잊고 있었다.
며칠 쉬고 출근한다는 걸.
내가 그렇게 말이 없는 상태로 있자, 미치코가 뭘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말한다.
- 저도 좀 놀랐어요. 몇 번 정도 더 단편이 나간 뒤에 결정할 줄 알았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연재결정이 되면 당사자는 부담스러운 게 당연한데.
“그야 그렇죠. 시작은 늘 부담스러운 거니까요.”
- 좀 더 여유를 두는 게 좋을까요?
“준비가 너무 길어도 좋은 건 아니죠. 차라리 결정 났을 때 달리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매사에 너무 뜸을 들이는 건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내 말에 금방 목소리가 밝아진다.
- 역시 그렇겠죠? 그런데 지금 정미자, 아니 정 선생님 계신가요?
“아뇨. 며칠 뒤에 출근할겁니다. 단편 원고 혼자 작업하느라 너무 고생해서 며칠 쉬라고 했거든요.”
- 아, 네. 그럼 전화번호라도 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네. 그러죠.”
아마도 지로를 통해 통화를 직접 해보려는 모양이다.
- 아, 그리고 앞으론 제가 정 선생님을 담당하게 될 거예요. 임시가 될지 계속일지 모르겠지만 현재 자리도 핑크걸로 옮겼고요.
정미자를 위해서 편집부까지 옮겼다고?
그게 쉽게 되는 건가?
하지만 미쯔다쇼텐이라는 회사 내부 사정이야 내가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정미자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그렇군요. 미자 씨도 그게 더 편할 겁니다.”
- 그나저나,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 정 선생님, 삼사라 인물 펜선 담당이시잖아요.
“아, 그거요? 괜찮아요.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인데요, 뭐.”
- ······.
“신경 쓰지 마세요.”
- 선생님?
“네?”
- 파이팅!
“······아, 네.”
-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 테니까, 알려주세······.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뭔가 소리가 들린다.
얼핏 들으니, 지로의 음성 같기도 한데.
야단맞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금방 다시 미치코가 말했다.
- 선생님, 그럼 이만 끊을게요. 힘내세요!
“······네.”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나자 화실식구들이 궁금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모두 ‘자 어서 말해! 어서!’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내가 그런 그들을 보며 곧장 입을 열었다.
“정미자 씨, 일본 잡지에서 연재가 결정됐답니다.”
그 말에 어시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다.
“어? 단편에 대한 이야기 아니었어요?”
박수미의 질문에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요. 단편은 조만간 잡지에 실린답니다. 그런데 단편 때문에 연재까지 결정 난 모양입니다.”
“진짜요? 그럼 미자 언니 일본잡지에 데뷔하는 거예요?”
“그렇죠.”
내 말에 모두 환호했다.
어시 출신으로 처음 데뷔하는 사람이 나왔다는 것에 흥분하는 것 같다.
사실, 화실 식구들의 대부분 꿈이 일본으로 진출하는 거다.
아무래도 금전적인 부분, 그리고 더불어 성취도가 높기 때문일 테지.
그런데 아까부터 별 관심 없는 척 그림만 그리던 실버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게 보인다.
나 참, 좀 대놓고 웃어도 될 텐데.
*
며칠 후, 정미자가 출근했다.
그래도 며칠간 좀 푹 쉬었던 모양인지 얼굴색이 많이 돌아와 있다.
피곤에 절어있던 표정도 많이 좋아졌고.
그런데 그녀가 출근하자 화실식구들이 그녀에게 축하인사를 전했다.
“언니 축하해요!”
“축하해요, 미자 언니.”
“이젠 언니도 선생님이네. 정 선생님.”
“간지럽게 왜 그래?”
“와, 드디어 화실 출신 첫 번째 만화가의 탄생이네요.”
“그만 해.”
정미자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친다.
뒤늦게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이대봉도 호들갑을 떨었다.
“펜선 하나 제대로 긋지 못하던 코찔찔이가 일본에 진출하다니, 정말 천지가 개벽할 일이네.”
“오빠는 축하는 하는 거야? 아니면 시비를 거는 거야?”
“축하지, 축하. 안 그래 실버?”
“시비네.”
“너.”
물을 사람한테 물어야지. 쯧.
“뭐, 어쨌거나 축하해.”
“그래. 어쨌거나 고마워, 오빠.”
“야, 삐졌니?”
표정을 보면 이대봉이 더 삐진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정미자 너.”
“왜?”
“화실은 어떻게 할 셈이야?”
“화실? 여기?”
“아니, 네가 쓸 작업실 말이야.”
그제야 이해한 정미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응, 일단 천천히 알아봐야지. 여기서 아직 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
“네 일을 도와줄 어시는 내가 따로 알아봐 줄게.”
“고마워.”
“너희들만큼의 실력자는 힘들어도 꽤 괜찮은 애들을 좀 알고 있으니까.”
연재를 시작하려면 일단 독립을 해야 할 일이다.
혼자라면 이곳에서 지내며 그림을 그려도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만화가가 되려면 팀을 꾸려야 한다.
아무리 격주라고 해도 연재를 하려면 최소 2명이상의 어시는 필요할 테니까.
물론 무리한다면 혼자서도 가능하겠지만, 결국 몸에 무리가 올 테니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니다.
“윤환이 너도 미자 빠지면 사람 필요하지?”
“어. 미자 씨 빠지면 꽤 공백이 크거든.”
“나한테 맡겨.”
“고마워.”
지금 선희가 자리에 있었다면 자신이 하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선희의 작업량은 충분히 많으니까.
어쨌거나 정미자의 자리는 어떻게든 메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실버다.
정미자가 독립한다면 실버도 그녀를 따라 화실을 나갈 가능성이 높으니까.
실버의 공백은 누군가가 금방 커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 난 오후, 따로 실버에게 말했다.
“형, 잠시 얘기 좀 할까?”
“알았어.”
내 말에 실버가 머리를 끄덕인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다.
이대봉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있는 조그마한 슈퍼로 앞 평상에 앉았다.
“뭐 먹을래?”
그러자 실버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낮게 리듬을 타며 말한다.
“해애태~ 부라보 콘.”
갑작스런 실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갑자기 뭐야?”
“······머릿속에 계속 노래가 울린다.”
“알았어. 그거 사오면 되지?”
“어.”
슈퍼에 들어가서 콘을 두 개 사들고 나오는데 실버가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
그러고 보니, 화실에서 전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저 인간이 원래 골초였지.
“자.”
“땡큐.”
아이스크림을 받자마자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다.
그리고는 이상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12시냐?”
“어? 아닌데. 두시는 넘지 않았을까?”
“부라보 콘은 12시에 만나서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
무슨 말인가 싶었다가 곧 떠오른 게 있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광고에 나오는 노래 때문에 한 이야기 같은데, 하나도 재미가 없다.
역시 실버는 농담에 재능이 없어 보인다.
“그런 개그는 좀 하지 마.”
“·······.”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 때문인지 금방 헛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외면한다.
뭔가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평소라면 이렇지 않을 텐데.
내가 그런 실버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자리가 크긴 해도 말이지······.”
“난 안 나갈 거다.”
갑작스러운 대답에 내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안 나갈 거라고. 너, 나 그만둘 거라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 맞지?”
“······그렇긴 한데.”
“그럼, 이야기는 끝났네.”
“······.”
“안 그만 둔다고.”
“······.”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있자, 실버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살벌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설마, 나 자르겠다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형 같은 사람을 또 어떻게 구하라고.”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머리를 끄덕이고는 곧장 다시 아이스크림이 혀로 핥는다.
“흠, 그야 그렇겠지. 나 같은 사람을 또 구할 수 있다면 네 인복은 거의 삼국지 유비급이라는 거고.”
맞는 말이기는 한데, 본인이 직접 말하는 건 좀, 그렇다.
“그래서, 형은 삼국지에서 어떤 급인데?”
“나 정도면······. 조자룡 정도가 아닐까?”
“장비가 아니고?”
“야, 그래도 장비는······, 흠. 비슷하려나?”
잠시 갸웃거리다 납득했는지 머리를 끄덕인다.
“왜 그러는 건데?”
“뭐?”
“정미자 씨말이야. 독립하게 되면 형이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음, 안 그래도 그거 말인데······.”
머리를 긁적이더니 잠시 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문제는 뭐, 미자 씨가 알아서 할 거다.”
“무슨 소리야? 알아서 한다니.”
“스스로 하고 싶다더라고. 시작이 힘들지만, 혼자 힘으로 이겨내겠다더라.”
“······.”
“어시 뽑을 때만 대봉이 도움 좀 받고 스스로 해보고 싶데. 너에게서 많은걸 배웠다더라. 혼자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룬 널 보면서 느낀 게 많았던 모양이지.”
이 모든 것을 나 혼자 힘으로 이룬 건 당연히 아니다.
누구에게도 없는 미래의 지식이 있었고, 그보다 선희를 비롯해 굉장한 사람들이 도와줬으니 가능했을 뿐이다.
물론 미래의 지식을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건 같은 생각이고.”
“······형도?”
의외네. 실버가 이런 말을 다하다니.
그나저나 면전에서 들으니까 손발이 막 오그라 들러서 견디기가 힘들다.
그런데 실버도 그런지 몸을 살짝 떤다.
어쩌면 아이스크림 때문일지도 모르고.
하긴, 지금은 아이스크림을 먹기엔 좀 춥긴 하다.
“아무튼, 가끔은 나도 도와줄 생각이야. 너처럼 되고 싶다는 그 생각은 나도 존중하지만, 너 같은 사람은 흔한 게 아니거든.”
그 말에 내가 피식 웃었다.
“돕는 거야 나도 할 생각인데.”
“그럼 뭐 된 거고.”
“그런데, 형이랑 미자 씨 언제 그렇게 길게 대화를 했대?”
“······.”
잠시 멈칫하더니 어딘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꼬마 너, 아이스크림 먹고 싶냐?”
실버의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가 바라보는 쪽을 봤더니, 5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눈을 똘망똘망 뜬 채로 바라보는 다섯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보인다.
그런 그 아이가 실버의 말에 손가락을 쭉쭉 빨며 머리를 끄덕인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난 실버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똑같은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들고 나온다. 그리고 아이에게 다가가려하자, 초등학생, 아니지 국민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뛰어오더니 남자아이의 손을 꽉 잡고는 서둘러 그곳에서 벗어나 버린다.
그 때문에 실버가 어정쩡한 동작으로 멈춰있다.
“실버 오빠. 애들한테 함부로 먹을 거 주고 그러면 안 돼. 애들 놀라잖아.”
벌써 학교를 마쳤는지, 경희가 실버를 보며 말한다.
“내가 뭐?”
“요즘 학교에서 뭐 배우는 줄 알아? 모르는 아저씨가 먹을 거 주면 따라가지 말라는 거.”
“·······.”
“오빠, 조심해야 돼. 잘못하면 경찰한테 잡혀가.”
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된 실버가 곧장 화실 쪽으로 걸어간다.
“오빠, 갈 땐 가더라도, 콘은 주고 가.”
“니가 사먹어.”
“아이~”
“네 오빠한테 사달라고 하던가.”
그 순간 쌍둥이들이 동시에 날 돌아본다.
“그래, 알았다. 먹어라,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