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어느덧 10월이 시작되었다.
국군의 날이라 쉬는 날이지만 아침 일찍 출근한 정미자는 자신의 첫 작품인 ‘어둠의 클럽’ 작업을 마무리하느라 바쁘다.
아, 내가 살던 시절엔 공휴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시절은 국군의 날도 공휴일이다.
올해는 추석휴일에 연휴가 끼어서 결국 10월 3일까지 쉬는 것으로 정해버렸다.
아무래도 10월초엔 공휴일이 잔뜩 몰려있어서 이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원고는 미리 해두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추석이 끝나자마자 선희를 경희와 내가 돕기로 했다.
물론 그래봐야 선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미자는 추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화실로 나왔다.
예상보다 원고 작업시간이 길어진 탓이다.
그런데 추석에도 집에서 원고작업을 했던 모양인지, 거의 작업이 끝나있다.
추석 때 바쁘다더니, 그 와중에도 열심히 그렸던 모양이다.
얼굴을 보니 피곤에 절어있다.
하긴, 바쁜 와중에 원고까지 했으니 오죽 힘들었겠나 싶긴 하다.
그런데 실버도 느닷없이 화실에 나와 있다.
정미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완성하겠다는 입장이라 실버가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 없을 텐데.
그럼에도 굳이 나와서는 원고를 돕는다.
“어디 갈 데도 없고, 그냥 시심해서.”
나 참, 이게 이유란다.
평소엔 그렇게 빈틈없어 보이는 인간이 이럴 땐 참 어설프다니까.
물론, 굳이 이 인간 앞에서 티를 낼 생각은 없지만.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도 실버가 있으니 큰 도움이 되고.
덕분에 경희는 아까부터 실버에게 간식까지 가져다주며 애교까지 부리고 있다.
“실버 오빠,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아무 때나 말해. 당장 준비할 테니까. 뭐 먹고 싶어? 응?”
“아니, 별로.”
“내가 미안해서 그러니까, 그러지. 사과 깎아 줘?”
“커피나 한잔 주든가.”
“오케이, 알았어. 삼삼삼이지?”
“삼일일.”
“아, 맞다. 잠시만 기다려.”
그렇게 말하며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간다.
그 모습에 실버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피식 웃고 만다.
하지만 곧 정미자 쪽을 곁눈질 한다.
조금은 걱정되는 듯한 표정을 하고는.
그러다 내 눈과 딱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며 곧장 원고에 집중한다.
뭘 저렇게 숨기는 건지 모르겠네.
화실에서 모르는 사람은 한명도 없는데.
아무튼 정미자는 지금 마지막 작업에 분주하다.
이미 원고는 모두 마무리가 된 상황.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원고에 빠진 작업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나름 50페이지나 되는 분량이다 보니, 세심하게 살피는 시간도 제법 걸리는 편이다.
그 모습을 보던 난 원고 뒤처리를 그만두고 옆방으로 갔다.
뒤처리도 평소에 별로 하던 일이 아니라 금방 피곤해진 탓이다.
허구한 날 탱자탱자 스토리만 짜던 빈약한 인간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물론 그런 인간치고는 평소 운동능력은 장난이 아니긴 하지.
음.
그러고보니 근처에 헬스클럽이 생겼던데, 거기나 가볼까?
한 달에 회비가 2만원이라던가?
이 시대를 생각해보면 결코 싼 건 아니지만, 따로 운동을 할 장소도 부족하니까.
에이, 헬스는 무슨.
그렇게 생각을 하며 옆방으로 건너간다.
그리고는 곧장 TV를 틀었다.
최근 일본에서 가져온 비디오테이프 중 뭘 볼까하며 생각하다가, 그냥 정규방송에 눈이 간다.
사실 이 시대에 오기 전의 나라면, TV방송을 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다르다.
가족들이 모여 있을 땐 항상 TV를 보는 것이 일과일 정도니까.
아무튼 국군의 날이라 그런지 군대관련 방송이 많구나.
지금 나오는 방송은······.
인기 연예인들이 군대를 직접 방문해 그들의 생활모습을 외부에 알려주는 그런 종류인 모양이다.
뭐랄까, 내가 살던 시절에 비해서 너무 포장해 보여준다는 느낌은 강해긴 해도 나름 재미있다는 느낌이다.
나도 군대를 경험하긴 했지만, 과거의 군대를 보고 있으니 군대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런데 어째 군대는 내가 살던 시절과 별로 달라진 것 같아 보이지는 않네.
물론 내무반이랑, 옷은 좀 많이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인 훈련이랑 내무생활은 똑같아 보인다.
아무튼 그렇게 비스듬히 누운 채로 TV를 보며 히죽거리고 있는데, 그때 화실에 누군가 왔는지 약간 소란스럽다.
누구지?
호기심에 옆방인 화실 쪽 문을 살짝 열었더니, 담당인 미치코가 보인다.
“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경희와 열심히 수다를 떨던 미치코가 나를 보자마자 넙죽 인사를 한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오늘 휴일인데, 어쩐 일로.”
“오늘이 휴일이에요? 아, 어쩐지. 길거리에 사람이 많더라니.”
그렇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정미자 씨, 원고 때문에 왔어요. 오늘쯤이면 완성될 거라고 며칠 전에 말씀하셔서.”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아, 그래서 정미자가 날짜를 맞추려고 죽자 사자 그렸던 모양이구나.
좀 여유 있게 말해도 괜찮았을 텐데.
하기야, 그동안 화실작업에 폐를 끼친다며 미안해했으니까, 저런 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런데 그때 한창 바쁘게 작업 중이던 정미자가 입을 열었다.
“다 됐어요.”
그 말을 경희가 통역을 해주자 미치코가 서둘러 정미자의 자리로 갔다.
“한 번 봐도 되죠?”
경희의 통역을 들은 정미자가 머리를 끄덕인다.
“네.”
정미자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원고를 건네자 그것을 받아든 미치코가 소파 쪽으로 가져가서는 그것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이미 콘티는 몇 번이나 확인했고, 작업 중간에도 봤으니 새로울 건 없겠지만, 그래도 완성된 원고니 신중하게 살펴야 할 테니까.
어쨌거나 원고를 넘기기 전까지는 자신이 담당이라 그런지 꽤나 열심이다.
장면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살피는 걸 보면.
거기다 듣기론 과거에 만화를 한 모양이라 제법 관련 지식도 많아서, 정미자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 모양이다.
그리는 실력도 제법 출중해서 그때그때 자신의 의견을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기도 할 정도니까.
덕분에 정미자도 최근 실력이 많이 늘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실전원고는 실력상승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어시로 있을 땐 안정감 때문에 그림에 관한 스킬만 상승하지만, 실전원고는 만화가로서의 종합적 능력을 키워준다. 아무래도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하고, 또 그것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본인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덕분에 주간연재의 고통은 상당하다.
물론 선희 같은 경우는 특별 케이스일 뿐, 대부분의 만화가들은 이런 과정을 평생 겪을 것이고, 그것을 이겨낸 사람만이 조금씩 진화해가는 것이다.
“굉장해요. 완성된 원고를 보니까, 막 가슴이 벅차오르고요. 제가 이 작업에 조금이나마 참여했다는 것도 자랑스럽고.”
미치코가 정말로 감격한 표정으로 말한다.
경희의 통역으로 미치코의 말을 전해들은 정미자는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걸 모두 쏟아 부었어요. 이젠 아쉬움이 없어요.”
“네, 할 만큼 하셨다면 된 거죠. 이제부턴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 저에게 맡기세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미치코가 원고를 고급스러워 보이는 서류봉투에 담아 자신의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는다.
그리고는 곧장 화실은 나선다.
“오늘은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가보겠습니다.”
“아, 벌써 가시게요? 간식이라도 좀 드시고 가세요. 명절에 준비했던 음식도 많고요, 과자도 많은데.”
경희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얘기하자 미치코가 미소 지었다.
“먹고는 싶은데, 이게 급하니까요.”
“그냥 바로 가시면 섭섭한데.”
“저도요. 하지만 오늘은 원고부터 해결하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아요. 그게 제 일이니까요.”
오, 미치코가 많이 성장했네.
전엔 좀 철없어 보이더니.
아무튼 그녀의 말에 경희가 여전히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죠. 미자 언니가 그동안 그렇게 고생했으니까.”
“네. 저도 잘 알아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그렇게 말하며 선희와 내게도 인사를 하고는 화실을 나선다.
“같이 나가요.”
경희가 대문 앞까지 따라 나가며 그녀를 배웅한다. 그리고 미치코가 떠났는지 잠시 서 있던 경희가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온다.
그 모습을 보고 난 정미자가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비틀거린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 동안 매달려 온 원고가 자신의 손을 완전히 떠나는 모습을 보고난 뒤라 그런지 그동안 긴장했던 몸이 한꺼번에 풀려버린 모양이다.
하기야, 그만큼 고생했으니.
그때 화실 안으로 들어온 경희가 그 모습을 보고는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언니, 일단 위로 올라가서 좀 쉬어요.”
“아뇨, 이젠 집으로 가야겠어요. 집에서 쉬고 싶어요.”
저런 와중에도 집으로 가려고 하다니.
하긴, 여기가 집은 아니니까.
난 서둘러 밖으로 나가 포니택시를 잡아두고는 화실로 들어와 그녀를 불렀다.
“택시 잡아 뒀으니까, 그거 타고 가요.”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자 씨는 6일인 일요일까지 그냥 쉬어요. 아무생각 하지 말고.”
“······그래도.”
“괜찮으니까.”
“고맙습니다.”
그때 정미자가 화실을 나가려하자 경희가 그녀를 부축하며 따라나선다.
“저랑 같이 가요.”
“내가 같이 갈게.”
갑자기 실버가 나선다.
그러더니 경희에게서 정미자를 넘겨받아 부축하더니 밖으로 나간다.
정미자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실버의 도움을 받았다.
피곤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아무튼 나와 쌍둥이들은 그런 두 사람을 따라 대문 밖까지 나섰다.
아직 기다리고 있던 택시를 발견한 실버가 정미자를 뒷좌석에 태운다. 그리고는 자신도 조수석에 같이 탄다.
“데려다주고 올게.”
“어, 그래.”
하지만 실버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택시를 출발시킨다.
그 모습을 본 경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자 언니,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며칠 무리했으니까, 피곤이 쌓여서 그래.”
“그나저나 저 언니도 참 대단해. 어시 생활하면서 50페이지짜리 원고를 혼자 완성했으니까.”
“그래.”
“그나저나 앞으론 어쩔 거야?”
“어쩌다니, 뭘?”
“미자 언니 말이야. 만화가가 된다면 화실을 떠나게 될 텐데.”
“만화가가 되면 좋은 거잖아. 그걸 왜 걱정해.”
“그야, 그렇긴 한데. 언니 없으면 좀 아쉬워서. 그리고 빈자리도 클 테고. 사람 뽑을 거야?”
“글쎄, 상황 봐서.”
“그런데 혹시 말이야······.”
경희가 조금 묘한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머뭇거린다.
“왜, 그래? 말해봐.”
“저기, 실버오빠 말이야.”
“실버가 왜?”
“실버오빠도 같이 빠져나가면 어떻게 해?”
“실버가······. 아.”
그러고 보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정미자가 만화가로서 데뷔를 하게 된다면 실버가 그녀를 돕겠다고 나설 수도 있는 일이니까.
정미자의 빈자리는 어떻게든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버는 좀 다르다.
파시엔시아의 만화 특성상 실버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실버는 이런저런 작업에도 관여할 만큼 만능의 인간이니까.
실버에게 주는 급여 두 배를 준다고 해도 그만한 실력자를 얻는 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음, 이건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네.
슬슬 준비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