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10화 (210/425)
  • 헤비메탈 (1)

    어느덧 푹푹 찌기만 하던 날씨도 선선해지고 있을 9월 중순이 넘어갈 무렵 평소처럼 점심시간 후의 화실은 평화롭기만 하다.

    최근 작업의 능숙도가 올라간 덕분에 점심시간도 조금 늘어서, 그 시간엔 각자 취미라든가 아니면 정미자처럼 자신의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도 늘었다.

    “이스탄불! 통행비에 호텔비! 110만원!”

    “짜증나네, 넌 밥만 먹고 이것만 하니? 나 개털이야.”

    “자자, 어서 내 놓으라고.”

    “옜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

    “땡큐!”

    이대봉과 박상식은 부루마블을 하면서 소란스럽게 놀고 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신문을 열독하던 실버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처음엔 시끄럽게 떠드는 두 사람 때문인가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인상을 찌푸렸다고 생각한 건 원래 표정이 더러워서 인거고, 사실은 조금 심각해 보이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원인은 실버가 내려다보고 있는 신문에 있는 것 같고.

    일본에서 좀 요란한 일을 겪었던 탓인지, 저런 모습을 보니 살짝 긴장된다.

    이 시절이야 실시간으로 뉴스를 확인한다는 건 겨우 신문이나 라디오, TV정도가 다니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중국비행기가 한국에 떨어진 일도 있었지.

    올해는 정말 비행기에 관해서는 악재가 많은 해인 모양이다.

    아무튼 그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며 실버 근처로 드가가 슬쩍 신문을 엿봤다.

    당잔 눈에 크게 띄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사진도 오밀조밀하게 있어서, 큰 사건은 아닌 모양이고.

    그나저나 지금의 신문은 온통 한자투성이라, 읽는 것이 좀 불편하긴 한데, 이것도 익숙해지니까 뭐 그런대로 적응이 되긴 한다.

    최근 가장 큰 뉴스는 뭐니 뭐니 해도 남북고향방문단의 이야기다.

    TV 뉴스에선 온통 그 얘기로 떠들썩거릴 정도니까.

    아무튼 별거 없어 보이는 신문을 살펴보다가 실버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걸린 구석자리에 기사가 보인다.

    거기엔[선진 5국 재무장관 달러화 하락유도]라고 적혀있다.

    별로 크게 난 기사는 아닌데 실버는 굉장히 집중해서 읽고 있다.

    뭐야, 경제관련 기사인가?

    내 관심분야도 아니고, 아는 것도 없어서 금방 흥미를 잃고 다른 기사를 슬쩍 훑어본다. 이 시대엔 인터넷이 없으니, 그야말로 신문을 제외하면 최신정보를 접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 덕분에 나도 가끔 신문을 보기는 하는데, 역시 재미는 별로 없다.

    하지만 그 중에 내 눈에 띤 기사가 있었다.

    [탈 아파트, 소형주택 인기]

    [······부동산투기가 한풀 꺾이면서 가족 수에 알맞은 적정규모의 주택이 인기를 끌고 있다.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바람직한······.]

    내가 지내던 시절에도 비슷한 뉴스를 본 것 같은데.

    이래서 인간사 돌고 도는 모양이다.

    그때 어시들의 대화가 들린다.

    “수미야, 너 이번 추석엔 집에 내려갈거니?”

    “당연하지. 언니는?”

    “나도. 모처럼 휴일도 5일이나 되니까. 그래서 금요일 새벽에 일찍 출발할 생각이야.”

    “나랑 똑같네.”

    “저는 목요일 저녁에 출발할 생각이에요.”

    화실식구들이 곧 있을 추석에 대한 생각에 들뜬 표정이다.

    올해부터 추석연휴라는 것이 생겨서 처음으로 3일을 쉬게 된다.

    물론 우리 화실은 시작할 때부터 기본 3일이었기 때문에 2일을 추가해 5일을 쉬게 된다. 물론 추석이 일요일이라 하루를 손해 봐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며칠 후엔 화실식구들에게 줄 선물 때문에 백화점에도 들릴 생각이다. 보너스도 이번에 들어온 돈이 많으니까, 평소보다는 더 많이 줄 생각이고.

    그나저나 선물은 뭐로 할까?

    올 초 설에는 과일로 하긴 했는데······, 요즘엔 뭐가 유행이지?

    참치로 할까? 소고기?

    이것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

    대충 할 수도 없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그때 화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아니, 이젠 이대봉처럼 수시로 들락거리는 탓에 손님이라고 할 수 없는 느낌이랄까.

    바로 미치코다.

    지로가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번 찾아오는 데 반해 이 여자는 일주일에도 어떨 땐 두 번을 찾아오기도 할 정도다.

    싱글거리며 화실에 들어와 평소처럼 어설프지만 활기차게 한국어로 인사를 한다.

    “민나, 아녕하시무니까!”

    “어서 오세요, 미치코 씨.”

    “안녕하세요.”

    미치코의 밝은 목소리를 화실 식구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미치코는 곧장 내게 다가와서는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써니 선생님은요?”

    “학교요. 4시 넘어서 올 거예요.”

    “아, 참. 써니 선생님이 고등학생이라는 걸 깜빡했어요.”

    자주 오면서 늘 저런 소리를 하고 있다.

    “며칠 있으면 명절이라면서요?”

    “네. 추석요. 일본으로 치면 오봉 비슷하죠.”

    “아, 그렇군요.”

    그렇게 대답한 미치코의 표정이 순간 좋지 않다.

    아무래도 얼마 전 일본에서 벌어진 여객기 추락사건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하긴 일본에서 그 난리를 피웠으니.

    물론 아직도 그 사건에 대한 진상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모양이지만.

    어쨌거나 미치코는 이내 표정을 다시 풀고는 웃으며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린다.

    “명절엔 선물을 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준비한 게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조그마한 알록달록한 종이로 포장된 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명절 선물이요. 출판사에서 드리는 거니까,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되요.”

    “지금 열어봐도 됩니까?”

    “그럼요.”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었더니 조그맣게 생긴 검은색 상자가 나온다.

    무슨 보석반지 곽처럼 생겼는데, 크기는 조금 더 크다. 무게도 좀 나가는 것 같고.

    “뭔가 곽부터가 부담가게 생겼는데.”

    “아이, 별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화실을 돌며 비슷한 크기의 선물들을 나누어 준다.

    “이건 여자꺼, 그리고 이건 남자꺼.”

    남자, 여자를 구분하는 선물인가?

    곽을 열어보니 금색 시계다.

    일본산 유명 메이커, 내가 살던 시절에도 들어본 것 같은 브랜드다.

    평소 출판사에서 주던 선물과는 좀 다르다.

    보통 때엔 지로가 한국에 들어와서 백화점에 들러 과일종류를 사왔었는데, 이번엔 좀 크게 쏜 모양이다.

    좀 과해 보이기는 하지만.

    어시들이 선물을 확인하며 화들짝 놀란다.

    “어? 이거 세이코네요? 와, 예쁘다.”

    “이렇게 비싼 걸 선물해도 괜찮아요?”

    놀러온 이대봉이 사람들의 반응을 통역하자 미치코가 입을 가리며 웃는다.

    “괜찮아요, 괜찮아. 여러분들 덕분에 출판사가 돈 많이 벌었으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죠.”

    그렇다면이야 납득이 가긴 하지만.

    하긴, 최근에 엄청나게 책이 많이 팔리긴 했으니.

    “고마워요.”

    “저도요.

    “제임스 선생님도요.”

    “내 것도 있어요?”

    “그럼요. 제임스 선생님의 활약으로 요즘 음식만화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을 정도니까요. 전에 도쿄 시부야거리에서 어떤 중화요리집이 생겼는데, 거기 밖에 중원요리왕 일러스트도 있더라니까요.”

    “오, 그래요? 가보고 싶네.”

    “나중에 또 초청할게요.”

    “정말! 약속!”

    이대봉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웃으며 손가락 도장까지 찍어준다.

    “아, 그리고 선생님.”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네?”

    “삼사라 TV애니, 오퍼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카기 선배한테 들으셨어요?”

    “아뇨.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어? 아닌가?”

    뭐야,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왜 이렇게 어리바리하게 말하는 거야?

    “아, 맞다. 이거 선생님께는 비밀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깜빡했다.”

    “네?”

    “이건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선배가 알면 또 야단맞아요.”

    “······.”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애니관련 오퍼를 받고 금방 작가에겐 알려주지 않는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일이다. 아직 확정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떠들어 놨다가 취소라도 되면 그것도 골치니까.

    아무튼 이 여자는 좀 덜렁대는 것도 문제고, 저 깃털처럼 가벼운 입도 문제다.

    하지만, 그 정도야 뭐 귀엽게 봐줄 정도로 화실식구들과는 잘 지내고 있으니 상관은 없지만.

    그러고 보면 나도 가끔 실수는 하니까, 누굴 욕할 입장도 아니다.

    “이야기 좀 해봐요.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호기심이 들었는지 이대봉이 미치코를 살살 꼬드긴다.

    그러자 미치코가 잠시 눈알을 굴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애니 부분 말고요, 다른 것도 좀 있었어요.”

    어이구, 술술 튀어나오는 구나.

    하기야, 이대봉 같은 잘난 인물이 저렇게 말하면 대부분 잘 들어주긴 하지.

    이럴 때만큼은 정말 이대봉이 부럽네.

    “뭔데요?”

    “이번에 드래곤볼에 등장했던 칼파나의 인기가 대단해서 출판사로 이런저런 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는가보더라고요. 소년점프 계열의 잡지사에서도 관련 내용을 기사화 하고 싶다고 연락도 왔었고요. 또 게임회사에서도 연락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오락실에 있는 그런 거 말인가요?”

    “아니, 그거 말고 가정용 게임기요.”

    “아, 가정용.”

    “아무튼 프라모델 회사에서까지 연락 오는 걸 보면 진짜 엄청 관심을 받고 있는 건 틀림없어요.”

    “오.”

    미치코의 말에 이대봉이 호들갑을 떨며 반응하자 더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사람이 수다를 시작하면 끝이 보이질 않는다는 거다.

    어느새 대화를 시작한지 몇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떠들고 있다.

    그러나 이 대화도 쌍둥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자 끝이 났다.

    “아, 고마워요!”

    “······고마워요.”

    애들이 미치코가 선물한 시계에 기뻐한다.

    선희의 경우엔 좀 밍숭맹숭한 표정이지만, 분명 기뻐하고 있는 게 맞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카기 씨 전화에요.”

    박수미의 말에 미치코가 깜짝 놀란다.

    “어머, 혹시 날 찾으면 안 왔다고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입에 검지를 가져가며 말한다.

    뭐야, 분명 선물은 출판사에서 주는 거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여기 온건 모른다고?

    조금은 별난 구석이 있는 여자긴 해도 저렇게 부탁까지 하는데 할 수 없는 일이지.

    “네. 전화 바꿨습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런데 저기 혹시······.

    “안 왔어요.”

    - 네? 아, 네. 그······렇군요.

    음, 뭔가 어색했나?

    아무래도 들킨 것 같은데.

    쩝.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잠시 뜸을 들이던 지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로가 물으려고 했던 말은 미치코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 저기 혹시, 미국만화잡지인 ‘헤비메탈’ 이라고 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번역판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가끔 구해다 보거든요.”

    헤비메탈은 1977년에 창간된 미국의 성인판타지 만호잡지로 일반적인 성인잡지와 달리 높은 퀄리티와 아트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 유명한 뫼비우스도 이곳에서 활동했을 정도다.

    물론 지극히 미국적인 잡지라 한국이나 일본에선 만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 알려진 잡지는 아니다.

    하지만 현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전 세계의 유명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하는 세계적 잡지이다.

    -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 잡지가 왜요?”

    - 거기 잡지에서 저희 출판사로 정식 요청이 들어와서요.

    “무슨 요청요? 그쪽 잡지는 성향이 많이 다를 텐데.”

    - 삼사라를 단편으로 소개해 보고 싶다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써니 작가님이 컬러로 단편을 해주시면 어떨까하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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