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04화 (204/425)

콜라보 (1)

“이거 고쳐도 돼?”

“응?”

“이거.”

그렇게 말하며 콘티노트를 내밀어 보인다.

오늘부터 새롭게 들어갈 부분의 내용이었다. 물론 콘티는 보름도 더 전에 완성한 부분.

“너무 고치면 뒷부분이 다 틀어지는데.”

“장면만.”

“장면?”

“응. 이렇게.”

선희는 설명대신 곧장 연습장에다 새롭게 넣었으면 하는 컷 장면을 빠른 속도로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선희가 가리킨 건 원래는 5컷 정도의 지나가는 듯한 장면인데, 어째 그리는 양이 좀 많은 것 같다.

평소에도 이런 건 종종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보통은 알아서 고칠 정도라 내게 일부러 묻거나 하지는 않는데.

하지만 선희가 그림을 그려갈수록 난 그 그림에 조금씩 빠져들어 갔다.

예전처럼 디테일한 그림이 아님에도 장면의 느낌은 더 생생할 정도다.

예전엔 그림에 시간을 갈아 넣은 느낌이라면, 지금은 그곳에 감정을 진하게 타 넣는 것 같다.

머리털이 살짝이나마 곤두서는 기분이다.

어느새 수십여 컷이 완성되었다.

기괴한 형태의 행성에 던져져 그곳을 이리저리 헤매며 돌아다니는 것 같은 신비감이 느껴지는 장면들.

“······어때?”

“어?”

“이거, 바꾸고 싶은데 괜찮아?”

“아, 어. 그래.”

나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 역시 우리 선희. 오빠가 완전 얼이 빠져버렸어.”

어시들에게 커피를 돌리던 경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선희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 거린다.

“봐, 내 말이 맞지?”

“응.”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뭐가 맞는데?”

“지금 오빠의 그 반응 말이야.”

“······?”

“실은 어제 저녁에 선희가 그 장면을 한참동안 보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장면을 바꾸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바꾸면 되지 왜 그래? 라고 했더니, 선희가 오빠가 실망하지 않을까? 하고 하더라고.”

그렇게 말하며 경희가 선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에구 우리 착한 선희, 어쩌니?’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말했지. 실망할 것도 많다, 라고. 일단 오빠한테 생각한 것을 보여주라고 했어. 그런데, 지금 보니까, 역시 내 말이 맞았네.”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허리에 얹고는 우쭐해한다.

“역시 이 언니 말이 맞지?”

“······내가 언······.”

“야, 이럴 땐 좀 박자를 맞춰줘라.”

“아닌 건 아닌 거야.”

“나 참, 꽉 막혀가지곤.”

그러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이내 싱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

“오빠표정 보니까, 역시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고. 내 말 맞지?”

그렇게 묻자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장면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전체적인 흐름이 더 좋아졌어. 마음에 들어.”

“그래? 그럼 나도 한번 봐.”

그렇게 말하며 내 손에서 콘티노트를 뺏어간다.

그러더니 잠시 후, 경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기, 이거 그냥 장면만 늘린 거는 아니지?”

“너는 그걸 보고도 헛소리냐?”

내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솔직히 오빠가 너무 놀라는 것 같아서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장면인가 궁금했거든. 그런데 잘 모르겠네.”

“이리 줘.”

그런 경희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선희가 냉큼 노트를 빼앗고는 곧장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야, 기분 상한 거니?”

“······.”

“선희야아, 응? 선희야아.”

“······.”

선희가 자리에 앉은 뒤에도 경희가 어깨까지 주물러주며 애교를 부린다. 그제야 선희도 조금 풀린 표정이다. 하지만 그 표정이 너무 미세해서 보통은 알아볼 수는 없을······.

“작은 선생님 기분 풀리셨네.”

“그러게.”

박소미와 구자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정미자도 말없이 웃는다.

성준희도 마찬가지.

의외인 건 실버까지 그렇다는 거다.

“작은 선생님, 기분이 풀리신 거예요?”

“맞아.”

“난 모르겠는데.”

“저도요.”

신입인 김기철과 차미정만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고, 그것을 정미자가 설명하며 다시 웃었다.

“조금만 지내보면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머리만 갸웃거릴 뿐이다.

어쨌건, 이젠 화실 사람들도 선희의 미세한 감정변화를 눈치 챌 정도가 된 모양이다.

뭐, 실버는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선희의 컷 감각은 날이 갈수록 발전해가고 있다.

만화가의 그림실력이야 발전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렇게 연출의 느낌 진화가 빠르게 느껴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그만큼 어떠한 장면으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동안 그 장면에 대해 고민했다는 증거다.

아까 경희도 그렇게 말했었다.

선희가 한참동안이나 콘티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아마도 경희가 본 것 아니, 생각한 것 보다 그 이상 긴 시간 고민했을 것이 분명하다.

흐음.

이거 내가 만드는 스토리 이상의 느낌으로 표현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내가 처지는 기분이라 뭐랄까, 좀 더 분발해야 한다는 정도로는 부족한 느낌이다.

그런데 그때 실버가 날 보며 실실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야, 너 엉덩이가 간질간질 하겠다.”

아마 내 표정을 보고 뭔가를 눈치 챈 모양이다.

덩치는 산만한 인간이 이럴 때 보면 눈치가 백단이다.

그때 요란한 복장의 이대봉이 화실에 들어섰다.

“여어, 모두들 잘 있었나?”

“어?”

“어머나?!”

“앗, 제임스 오빠!”

커다란 선글라스에 알록달록한 티셔츠를 입고 미를 바짝 넘긴 그를 보며 모두가 깜짝 놀랐다.

“나, 지금 돌아왔다.”

이대봉이 손바닥을 자신의 입술을 쪽 하더니 우리에게 뿌린다.

그 모습에 실버가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이······.”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그를 굉장히 반겼다.

왜냐하면 그는 며칠 전 미치코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 다녀온 길이니까.

“자자, 모두 진정들 하라고. 내가 온 게 그렇게 기쁜 거니?”

“당연하지. 오빠 일본에 가서 야쿠자들에게 납치당한 건 아닌가 하고 걱정 많이 했걸랑.”

“맞아, 맞아.”

“뭐라는 거야?”

이대봉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나서는 곧 쀼루퉁한 표정으로 여자들을 노려본다.

그러더니 곧장 내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윤환이도 나 보고 싶었니?”

“그만하지?”

“칫, 너는 이래서 재미가 없는 거라고.”

“관심없어.”

“그런건 관심을 좀 가져도 돼.”

그렇게 말하더니 ‘아 참.’ 하며 박수를 한번 짝 치더니 서둘러 화실 밖 거실 쪽으로 나가더니 큰 쇼핑백 하나를 들고 들어온다.

그 모습을 본 여자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거 뭐야? 혹시 옷 선물이야?”

“아, 제임스 오빠, 최고!”

“역시 큰손이라니까.”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이대봉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아, 이거?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넣었던 가방이야. 어때, 가방 예쁘지?”

그 순간 싸해지는 분위기.

그러다 곧 박소미가 가재미눈을 뜬 채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건. 그냥 자랑하려고 가져온 거네?”

“당연하지.”

그 말에 실버가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저 놈에게 바랄 걸 바래야지.”

“야, 아니거든. 그래도 선물은 가져왔어!”

하지만 이젠 모두 기대하지 않는 눈빛들이다.

그런 분위기에 이대봉이 주둥이를 쭉 내밀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런 인간들에게 뭔 정이 있겠어.”

그렇게 말하더니 이번에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는 곧장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 속에서 포장된 냄비를 꺼낸다.

멋들어진 종이 가방에서 갑자기 은색의 냄비가 튀어나오니까, 이게 참 이질적이다.

하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게 뭔데?”

“후후후, 기대하라고.”

“집에서 삼계탕이라도 해 온 거야?”

“비슷해.”

그렇게 말하며 냄비를 들고는 곧장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갔다. 그리고는 잠시 후 연기를 풀풀 피우며 그것을 들고 왔다.

그 순간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진다.

뭔가 닭볶음탕에다 묘한 향신료가 섞인 듯한 냄새.

그런데 그게 참으로 잘 어울려서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 기분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화실식구들의 표정에서도 나와 비슷한 느낌이 전해져온다.

냄비를 들고 내게 다가온 이대봉이 접시를 하나 내밀고는 냄비 뚜껑을 열며 말했다.

“너만 먹어. 저것들은 이거 맛볼 자격이 없어.”

그 순간 냄새가 강렬하게 퍼져나간다.

생각과 달리 깐풍기같은 비주얼이다.

하지만 그 향기가 남다르다.

“이거 뭐야? 깐풍기야?”

내 물음에 이대봉이 버럭 했다.

“뭔 소리야? 깐풍기라니! 날 무시하니?”

“그럼 뭔데?”

“자자, 일단 먹어보라고.”

그렇게 말하며 국자로 푹 떠서는 접시에 담더니 곧 내게 내밀었다.

“자, 이건 수저.”

“어,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수저를 받고는 냄새를 맡는다.

와, 이거 냄새가 장난이 아닌데.

이정도면 배불러도 먹어야 할 것 같은 스멜이다.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려있다는 건, 보지 않더라도 느껴질 정도다.

이거 부담스럽네.

그때 이대봉이 입을 열었다.

“이거 좌종당계(左宗棠鷄)라는 건데, 중원요리왕이 등장하는 실제 중국요리야. 나도 책에서만 봐서 정확하게 몰랐는데, 그 요리법을 이번에 일본에 가서 알아왔다니까.”

“아.”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긴 했지만, 내가 좌종당계가 뭔지 알 리가 없지.

한편으로는 중국요리 레시피를 왜 일본에서 알아온 거지? 라고 생각했다가 지금 시대를 이해하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한 번씩 내가 있는 시대를 잊고는 해서.

“왜? 이거 눈앞에서 보니까, 막 웃음이 나오고 그러는 거야?”

“뭔 소리야? 아무튼 잘 먹을게.”

그런데 어디선가 꿀꺽하며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멈칫했다가 다시 입에 가져가려는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하지만 몇 번이 울리는 동안에도 전화벨이 멈추지 않는다. 머리를 들어보니 모두 날 보며 정신을 놓고 있는 표정이라 전화벨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때 정신을 차린 성준희 곧장 전화기를 들었다.

흠, 이제야 맘 놓고 먹어볼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윤환아, 지로 씨 전화.”

“······.”

“전화.”

“······알았어.”

한숨을 푹 쉬며 일단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곧바로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당신 때문에 안녕 못하다고,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

슬쩍 돌아보니 경희가 서둘러 이대봉에게 다가가 검지를 내밀며 ‘딱 한번만’하며 말하고 있다. 물론 이대봉은 머리를 흔들며 ‘안 돼!’라며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고.

그렇게 정신을 그쪽으로 팔고 있는데 다시 전화기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 선생님~! 선생니임! 여보세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곧장 대답했다.

“아, 죄송해요. 딴 생각 때문에.”

- 바쁘셨던 모양이군요. 제가 적절하지 않은 시간에 전화를 걸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좀 중요한 문제라서.

“중요한 문제요? 뭔데요?”

- 소년점프 쪽에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소년점프요? 거기서 왜?”

- 정확하게는 드래곤볼 담당이신 토리시마 씨로부터요.

드래곤볼?

- 이번 천하제일무도회 장면에 삼사라의 캐릭터를 잠시 우정출연하면 어떻겠냐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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