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03화 (203/425)

어둠의 클럽 (4)

“전보다 훨씬 재밌어요.”

미치코가 콘티를 보며 감탄했다.

아니, 그보다 콘티 마무리하자마자 연락했더니 이 여자 진짜로 다음날 화실로 찾아왔다. 그것도 혼자.

지로에겐 미리 연락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대단하다싶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디, 인근 지역에 사는 줄 알겠다.

마치, 그냥 아침에 버스 같은 걸타고 찾아온 그런 느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때였다.

“까아악! 너무 재밌어!”

그러다가 자신의 요란한 반응에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처음부터 읽는다.

편집자는 보통 콘티를 두 번이상은 읽어보긴 하지만, 저렇게 요란한 리액션으로 보는 경우는 솔직히 처음이긴 하다.

저런 모습을 보면 편집자라기보다는 그냥 만화 팬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어시들이 몰래 킥킥거리며 웃는다.

아무튼 격한 반응을 보인 미치코가 콘티노트를 덮고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기대한건 아닌데, 생각보다 훨씬 재미가 있어요.”

“저도요. 이번에 바뀐 내용은 정말 재미있다니까요.”

경희도 미치코의 반응에 동조하며 말한다.

“그죠? 나도 이렇게 재미있는 단편은 정말 오랜만인데.”

그렇게 뭔가를 떠올리더니 그다음엔 자신이 봤던 단편에 대해 조잘거리며 떠든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엄마가 열 번을 넘게 불러도 듣지 못했다는 자잘한 이야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런 얘기가 재밌는지 경희도 미치코에게 딱 붙어서 같이 참새처럼 짹짹거리며 떠들어 댄다.

콘티가 어떤지 물어봤는데, 뭔가 이상한 분위기로 변해가자 내가 입을 열었다.

“어때요? 장편으로서 기대감은 있습니까?”

그제야 자신이 정신을 잃고 수다삼매경에 빠졌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머쓱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곧장 입을 열었다.

“그럼요. 단편이 끝나자마자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게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거였으니까요. 아, 그리고 지금 떠오른 건데요. 이 제니라는 소녀요. 얘의 시점으로 에피소드를 풀어가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제니는 이번 수정판에서 새롭게 등장시킨 조연급 캐릭터다.

호기심이 많고, 주인공 흡혈귀에 대한 동경심도 있어서, 미치코의 말대로 신비감이 드는 느낌도 더할 것 같기는 하다.

장편이라면 프롤로그 부분이 아마 적당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거야 정미자가 결정할 부분이긴 하지만.

아무튼 미치코는 콘티를 읽고 나서는 뭔가 영감이 많이 떠오르는지 자신의 이런저런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개중엔 괜찮아 보이는 것도 있고, 그냥 그런 것도 있고.

물론 이 부분도 정미자가 판단하겠지.

내가 슬쩍 돌아보니 경희가 실시간으로 열심히 통역중이다.

경희는 이런 상황이 재미있는지, 본인 스스로 기분이 업이 되어서는 추임새까지 넣으며 잘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미치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직도 그녀는 흥분한 채로 떠들고 있다.

“······여기 부분요. 딱 보니까 심장이 두근두근 했다니까요. 예전에 봤던 에이스를 노려라 장면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재밌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믿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신입으로서의 패기라기보다는 연신 가볍다는 느낌에 가까워서.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직설적이고 직관적인 편집자가 있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아무튼 어둠의 클럽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동안 떠들던 미치코가 멈칫했다.

“왜 그러세요?”

“아, 제가 너무 쓸데없는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나랑 경희가 동시에 웃었다.

“그래도 괜찮은 의견이 많던데요.”

내 말에 미치코의 표정이 밝아진다.

“정말인가요, 선생님?”

“네.”

“감사합니다. 사실, 아카기 선배였으면 표정을 이렇게 해서는······.”

그렇게 말하며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는 남자 목소리를 흉내를 낸다.

“어이, 카와다. 너는 편집자가 왜 그렇게 쓸데없는 말이 많은 거냐? 필요한 얘기에 집중하라고! 이렇게 하셨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천진하게 웃는다.

“와, 비슷해, 비슷해. 카와다 씨 잘 하시네요.”

경희가 요란하게 반응하자 다시 한 번 더 흉내를 낸다.

“입이 너무 가벼워. 그러면 곤란해.”

그러자 경희가 자지러진다.

정미자를 비롯한 어시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하고 실버는 ‘제게 뭐가 재밌지?’하는 표정이다.

아무튼 열심히 웃어대던 그녀가 주변 분위기에 놀라 다시 움찔하더니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 참, 까먹을 뻔 했네.”

그렇게 말하며 손뼉을 짝 하고 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소녀만화잡지 쪽 편집장님과는 미리 얘기했으니까, 이 네임은 복사해서 바로 가져가도록 할게요.”

“바로요?”

“네.”

그렇게 대답하더니 살짝 머리를 갸웃한다.

“이 네임, 미완성인가요?”

“아뇨. 그건 아닌데,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뭐, 미리 이야기가 되었다면 바로 작업에 들어가도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렇게 말하고는 정미자를 돌아봤다.

이미 경희를 통해 상황을 이해한 정미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날 돌아본다.

내가 물었다.

“어때요?”

정미자가 큰 결심을 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미치코가 돌아간 그 날부터 정미자는 매일 시간을 쪼개 틈틈이 작업을 진행했다. 평소엔 퇴근 이후, 그리고 휴일엔 일부러 출근해서 작업을 했다.

집에서보다는 화실에서의 작업효율이 높다 이유였다.

하지만 단편이 50페이지나 되는 원고를 혼자 작업해야 관계로 아마 완성하는 데엔 굉장한 시간이 걸릴 거다.

그 때문에 처음엔 주변사람들이 돕겠다고 나서기는 했는데(특히 실버가 적극적이었다.) 정미자는 그것을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림 작업만큼은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해보겠다는 게 이유였다.

아무튼 그런 그녀의 뜻에 따라 그냥 지켜만 보기로 했다.

물론, 선희나 실버가 오며가며 작업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것까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

날도 화창한 오후.

어느새 쌍둥이들의 방학도 끝이 났다.

덕분에 화실이 전보다 휑한 느낌이다.

가장 큰 이유야, 수다쟁이 경희가 빠진 탓이겠지만.

물론 경희가 없을 땐 박수미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긴 하다.

아무튼 불볕더위도 한풀 꺾인 상황이라, 이젠 한낮에만 에어컨을 사용해도 그럭저럭 지낼 만 할 정도였다.

물론 모기는 여전히 극성이라 저녁이 되면 화실엔 항상 모기향이 피워져 있다.

“오오, 시원해! 이제야 살 것 같다.”

방금 화실에 들어온 이대봉에 에어컨 앞에 서서는 셔츠를 팔락거리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어우, 제임스 오빠. 냄새나, 그만해!”

박수미가 코를 움켜쥐며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더니 이대봉을 노려본다.

“맞아. 일하는 곳에 들어와서는 그게 무슨 짓이야?”

구자희도 박소미와 같은 행동을 하며 거든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 때문에 이대봉이 삐진 얼굴로 버럭 했다.

“나 냄새 안 나거든!”

“오빠가 무슨 이영하라도 돼? 냄새가 왜 안나?”

이영하가 누구지?

“이영하도 냄새는 날거다.”

“말도 안 돼.”

“맞아.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건.”

두 여자들의 반응에 이대봉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배우에 대한 환상이 심한 거 아니야?”

“이영하 정도면 환상이 아니지.”

이번엔 정미자가 끼어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대봉이 콧방귀를 뀌었다.

“웃겨. 이영하가 뭐라고. 그리고 그 남자는 그냥 에로영화 배우잖아.”

그 말에 실버가 머리를 끄덕이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그렇지.”

그 말에 여자들이 발끈한다.

“에로배우라니, 제임스 오빠, 그 말 취소해!”

“맞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맞잖아. 에로배우. 그런 영화 엄청 찍더만.”

“그건 예술이잖아. 예술.”

“제임스 오빠가 영화를 알아?”

“흥, 예술이 다 얼어 죽었니? 무슨 헛소리야? 그냥 에로 성인영화잖아. 심야영화.”

두 여자와 이대봉의 싸움이 격해진다.

하지만 결코 밀리지 않는 이대봉, 역시 전투력 만렙.

그런데 이번엔 그런 이대봉의 말에 실버가 머리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그렇지, 예술이 아니지.”

그러자 정미자가 실버를 노려보며 말했다.

“실버 씨는 왜 끼어들어요.”

“크음.”

그런데 이번엔 이대봉이 나서며 실버를 변호한다.

“불쌍한 실버를 왜 구박해? 여기는 옳은 말도 못하는 북한이냐? 자아비판이라도 해야 돼?”

“여기서 북한이 왜 나와?”

“하고 싶은 말도 못하면 안 되니까 하는 소리지. 그나저나 너 얼굴이 반쪽이네.”

“뭐?”

갑자기 이대봉이 훅 들어오니 놀라는 모습이긴 한데, 어째 기분이 나쁘다는 느낌은 아니다.

역시 저 ‘반쪽’이라는 말 때문일까?

“요즘 매일 작업하느라 힘든 모양이네. 그런데 어쩌냐, 몸매는 그대론데.”

“오빠!”

그때 실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이대봉이 화들짝 놀랐다.

“야, 넌 왜 그래?”

“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그게 뭔데?”

“아무튼 한 대 맞고 이야기하자.”

“야, 이친 폭력배야!”

그렇게 화실이 시끌벅적한 가운데 전화기가 올린다.

곧바로 박소미가 전화를 받더니 나를 부른다.

“선생님. 아카기 씨요.”

곧바로 전화를 들었다.

“네. 아카기 씨.”

-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 주변이 좀 시끄럽네요. 오늘 무슨 날인가요?

“아니에요. 그냥 말씀하세요.”

- 아, 네. 오늘 전화를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어둠의 클럽 네임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 하더니 곧장 이야기를 이어간다.

- 저쪽 편집부에선 흥미가 있는 모양입니다. 가져갔던 정미자 씨 그림도 괜찮다는 평이구요. 일단 써니 선생님의 어시라는 것 말고는 따로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건 미리 정미자와도 이야기가 된 부분이었다.

그냥 써니 어시라는 유리한 정보만 주고 나머지는 나중에 자리를 잡고 나서 결정하면 될 문제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자리를 꽤 잡고 있는 우리들도 아직 여유를 두고 천천히 진행 중인 부분이고, 더불어 정미자도 단편이 실린다고 해도 당장 만화가로 나가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편의 경우엔 1년에서 2년 정도 테스트 기간을 거치는 게 보통이니까. 물론 우리나 스미레의 경우가 좀 특별한 경우였던 거고.

정미자도 당장 원고가 통과된다고 서둘러 독립할 생각은 없다니까.

화실에서 좀 더 배우면서 틈틈이 단편을 만들며 준비를 해나가겠다고 한다.

- 자세한 부분은 정미자 씨에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전화 바꿔드릴게요.”

- 네. 감사합니다.

곧장 정미자를 불렀다.

“미자 씨.”

“네?”

“전화 받아보세요. 아카기 씨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겁니다.”

주춤거리던 정미자가 긴장한 얼굴로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그런 그녀가 대화를 화며 표정이 밝아진다.

대충 내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이해했겠지만 지로로부터 제대로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남다르겠지.

“감사합니다.”

전화기를 들고 머리까지 숙이며 인사한다.

그런 그녀를 힐끔 보던 실버가 슬쩍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이대봉을 비롯한 주변 어시들이 실실거리며 실버를 바라보자 그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원고에 몰두한다.

아무튼 정미자를 통해 다른 어시들도 미래에 대한 새로운 길을 찾았을 것이다.

언젠가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만화가가 많아질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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