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02화 (202/425)
  • 어둠의 클럽 (3)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것을 본 지로가 미치코에게 조그맣게 물었다.

    “난 괜찮은 것 같던데. 뭐가 아쉽다는 거야?”

    “이거 소녀만화잖아요. 그럼 판타지적인 부분이 강조되어야 되는데 이건 그게 부족해요.”

    “판타지요?”

    내 질문에 미치코가 머리를 끄덕거린다.

    “네. 그러니까, 여자의 판타지.”

    여자의 판타지라.

    뭔가 알 듯 모를 듯하다.

    그런 내 모습을 이해했는지 곧장 미치코가 설명을 덧붙인다.

    “여자만의 판타지가 소녀만화의 핵심이잖아요. 아름다운 남성이나, 남자 같은 여자. 그러니까, 여학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은 너무나도 고귀하고 여성스러운 여자와 자유로운 남성스러운 여자. 혹은 아름다운 남자. 물론 모두 다 눈부시게 아름다워야 하구요. 또······.”

    미치코가 소녀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들을 열심히 나열해 나간다. 얼핏 두서없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무엇을 얘기하려는 건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성공한 순정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그 클리셰가 이 만화엔 제대로 표현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내가 그녀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이를테면 그런 거죠. 방금 말했던 매력적인 주변의 캐릭터들이 주인공을 주목한다.”

    이 시절 인기 순정만화의 전형적인 공식.

    캔디도 그렇고, 유리가면, 갈채 같은 작품들의 공통적 클리셰다.

    아무튼 미치코의 말인 즉 슨, 결국 흔한 클리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아서 재미가 없다는 말이다.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흔한 이야기라.”

    “흔하니까, 익숙하고 친근하죠. 그래서 쉽게 먹힐 거고.”

    생각해보니, 원래 정미자가 생각했던 이야기도 사실 특별할 것이 없는 아이디어와 전개였다.

    그냥 연출이 기존작품들과 달라서 색다르게 보였을 뿐.

    내가 간과한 건 바로 흔한 설정에 대한 거부감이었던 것 같다.

    정미자가 애초에 원했던 이야기가 평범하다는 것이 단점이라고 은연중에 판단했다. 그래서 이야기에 새로움을 많이 넣으려고 했었는데.

    결국 그게 오히려 더 이야기를 어렵게 만들어 재미를 반감시킨 게 아닌가 싶다.

    사실, 흔한 클리셰의 덩어리의 작품이라고 하면 보통 전문가들에게는 까이며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인기 만화는 결국 그런 작품들인 것이다.

    실제로 아주 특별한 작품일수록 일반 독자에게는 오히려 외면 받는 게 현실이니까.

    소녀만화라는 특성이 중요하다고 분명히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결국 그 말을 스스로 지키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미치코의 말이 백프로 맞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녀 혼자의 의견일 수 있는 말이니까.

    하지만, 미치코는 나름 그것에 대해 여러 작품까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제가 포의 일족을 좋아하는데요, 그 작품에서 보면······.”

    그녀의 말에서 등장하는 작품은 세 가지. 거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장면이라던가. 혹시 실망스러운 장면들까지 곁들여 이야기하니, 확실히 순정만화, 아니 소녀만화 쪽은 미치코가 나보다 훨씬 전문가였다.

    아무튼 미치코의 이야기를 경희가 모두 통역해주자 정미자도 납득했는지 머리를 끄덕인다.

    아니 납득이라기보다는 뭔가 몰랐던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다.

    이쯤 되면 미치코의 역할이 정해진 것 같다.

    곧바로 정미자에게 내가 물었다.

    “카와다 씨와 스토리 미팅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러자 정미자의 표정이 밝아진다. 자신도 그걸 원했던 모양이다.

    “카와다 씨만 좋다면 전 찬성이에요.”

    곁에서 경희의 통역을 들은 미치코의 눈이 살짝 커진다.

    이번엔 내가 미치코에게 물었다.

    “카와다 씨. 어둠의 클럽, 스토리미팅 같이 해볼래요?”

    “······제가요?”

    “네.”

    기뻐하는 눈치다.

    하지만 곧 걱정스러운 표정을 변했다.

    “하지만 ······전, 어둠의 클럽 담당도 아닌데. 괜찮을까요?”

    “담당이 정해진 건 아니잖아요. 거기다 어쨌건 지금은 저희 화실 만화 담당이니까요.”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충분한 것 같은데.”

    내 말에 잠시 주춤하던 미치코의 표정이 이내 밝아지더니 머리를 끄덕인다.

    “네. 기회를 주신다면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시간도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곧바로 경희를 불렀다.

    “통역 좀 부탁해.”

    “알았어.”

    이야기에 낄 수 있는 게 기쁜지 냉큼 대답하고는 곧장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 미팅을 시작하고 대대적인 콘티수정이 시작되었다.

    분위기가 어두우면서도 무난한 이야기에 미치코의 의견이 더해지자 확실히 이야기의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소녀만화의 감성을 솔직히 잘 모른다는 내가 봐도 꽤 괜찮은 느낌으로.

    물론 내가 소녀만화를 전혀 모르거나, 아예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나름 유명하다는 만화는 좀 보긴 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주력은 소녀만화보다는 남자만화에 많이 특화되어 있다 보니 좀 전문성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아무튼 대화를 통해 설정이 상당히 좋아진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적용시켜 콘티를 새롭게 만들어나갔다.

    정미자도 며칠 동안 콘티공부를 해서 그런지 콘티 만드는 것이 상당히 능숙해진 느낌이다.

    물론, 선희나 박상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저녁이 되자 지로와 미치코가 완성된 원고들을 챙겨 화실을 나섰다.

    그러면서 미치코가 내게 말했다.

    “선생님, 어둠의 클럽 네임이 완성되면 연락 꼭 주세요.”

    “네, 그러죠. 그런데 이번엔 한 달 후 오실건가요?”

    “아뇨, 연락주시면 바로 올게요.”

    “네? 바로요?”

    연락을 하면 바로 온다고?

    지금 우리 화실이 도쿄에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곧장 미치코가 머리를 끄덕인다.

    “네.”

    “설마, 두 분 일본에 가시지 않고, 한국에 남아계실 생각이신가요?”

    “아뇨. 원고 때문에 오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럼 진짜 연락을 하면 바로 온다는 겁니까?”

    “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구나.

    “모처럼 편집자로서의 역할을 받았는데 당연하죠.”

    “아니, 그 문제가 아니라.”

    “제가 보기엔 이래도 책임감은 꽤 있는 편이거든요.”

    하, 이런.

    아무튼 계속 경희의 통역을 듣던 정미자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저기, 다음에 천천히 오시면 그때 가져가셔도 상관없어요.”

    정미자가 그렇게 말했지만, 미치코는 단호했다.

    “아니죠. 저 혼자라도 꼭 올게요.”

    “아니, 그러면 더 부담스러운데.”

    “괜찮아요, 괜찮아. 혼자 잘 찾아올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문제가······.”

    행동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직 세상물정을 몰라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그래서 지로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런데 미치코의 그런 행동에도 지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네, 이 일은 처음부터 카와다가 맡은 일이니까, 맡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래?

    다음날 토요일 오후.

    일찍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쌍둥이들과 화실식구들 모두가 간만에 외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며칠 전에 미치코에게 받은 식사권을 이용할 셈이었다.

    화실식구들 모두 나름 깔끔한 외출복을 차려입고 화실을 나섰다.

    성준희도 이것 때문에 준모까지 잘 차려 입히고 출근했다.

    아무튼 저 꼬마 녀석이 제일 신나는 모양이다.

    맛있는 거 먹으로 간다고 난리법석이다.

    일단 택시 세대를 잡고서 거기에 모두 나눠 타고는 곧바로 시내로 출발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시내에 도착해 내리자마자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시내에서 유명한 호텔인건 알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모두 깜작 놀라고 있다.

    구자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여기 호텔 맞아요?”

    “네. 카와다 씨가 중 티켓에 적혀 있잖아요.”

    “그래도 이건 생각보다 너무 큰데요.”

    “그러게요.”

    모두 놀라면서도 흥분에 들뜬 표정을 지으며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넓고도 고급스러운 실내의 호텔로 들어가면서 모두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곧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2층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복도를 지나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넓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이국적인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지로를 만났을 때 호텔레스토랑에 간적이 있지만, 그때보다 훨씬 커서 쌍둥이들도 꽤나 놀라는 눈치다.

    다른 화실식구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이곳에서 놀라지 않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인 모양이다.

    아무튼 우르르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에서 젊은 직원이 우리들 앞으로 다가왔다.

    “예약 하셨습니까?”

    그 말에 모두 주춤한다.

    내가 대표로 나서며 말했다.

    “아뇨. 예약은 안했는데.”

    “죄송하지만, 예약을 하지 않으신 분들은 입장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젊은 직원의 눈이 우리들을 복장을 빠르게 훑는다.

    그런 눈빛이 뭘 뜻하는 건지는 알지만, 그래도 출판사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티켓을 주지는 않았을 거다.

    “이거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

    곧장 티켓을 꺼내 직원에게 보여주자 직원이 머리를 갸웃거린다. 그리고는 잠시만 기다려달려는 말과 함께 프론트 쪽으로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던 박수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카와다 씨가 아무 때나 와도 된다고 한 거 맞아요?”

    “네.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저 직원 반응 보니까 아닌 것 같은데.”

    “아, 일부러 택시까지 타고 왔는데.”

    “뭐, 아니면 근처 괜찮은 식당에 가서 고기나 먹지 뭐.”

    “그래도 아쉽다. 이런 곳에서 밥 먹는 기분도 알고 싶었는데.”

    “전에 호텔 가봤잖아.”

    “거기랑은 비교가 안 되지.”

    “하긴.”

    그런데 그때 직원이 허겁지겁 뛰다시피 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한명이 아니고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직원을 포함해 세 명이다.

    그 모습을 보던 경희가 불안한 표정으로 날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 뭐 잘못된 거야?”

    “난 모르지.”

    “어째 불안한데.”

    표정은 저쪽이 더 불안해보이기는 하는데.

    아무튼 빠르게 다가왔던 직원들이 갑자기 머리를 푹 숙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모두 어리둥절해 하는데 그때 머리를 들어 올린 중년의 남성이 입을 열었다.

    “레스토랑 지배인입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이거 되는 거 맞죠?”

    “그럼요.”

    그렇게 말하더니 곧장 우리를 안내하더니 뷰가 좋은 창가 쪽으로 간다. 그곳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우리를 안내하고는 다시 지배인이 말했다.

    “여기는 전망이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그의 말대로 한눈에 시내가 눈에 확 들어온다.

    모두가 신기해하며 자리에 앉아 창밖을 기웃거린다.

    그때 지배인이 남녀직원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이 들고 온 고급스러운 메뉴판 여러 개를 우리 앞에 놓아둔다.

    “주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여기 메뉴판에 있는 거 아무거나 시켜도 공짜 맞아요?”

    경희가 묻자

    지배인이 밝게 미소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메뉴판에 있는 건 모두 무료입니다.”

    그 말에 모두 가지고 있던 티켓들을 주섬주섬 꺼내더니 그것을 경희가 모아 지배인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아, 네. 감사합니다.”

    티켓을 조심스럽게 받아들더니 곧장 주문을 받는다.

    우리야 뭐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그냥 적당한 걸로 가져다 달라고 했고, 잠시 후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의 향연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양은 작은데, 엄청 맛있네.”

    “이런 거 영화에서 부자들이 호텔에서 먹던 그거, 뭐지? 프랑스 요리, 그거 맞죠?”

    “와, 엄청 맛있네.”

    “준모야,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응.”

    준모는 맛있는지 조그마한 커다란 포크로 고기를 입에 가져가며 맛나게 먹는다.

    그렇게 화실식구들은 오랜만에 고급레스토랑에서 사치스러운 식사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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