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클럽 (2)
일단 저녁 퇴근시간부터 바로 정미자의 ‘어둠의 클럽’ 콘티 수정작업에 들어갔다.
되도록 콘티는 단순화 시키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스토리 부분에서 기본적인 대사는 정미자에게 맡기고, 그 큰 줄기부분에 대한 것만 참견했다.
일단 이번 정미자의 만화가 다른 순정만화에 비해 리얼리티가 높은 편이라, 배경이 되는 공간부터 일반적인 저택으로 수정하고, 캐릭터의 설정부터 새롭게 잡았다.
물론 화실엔 우리만 있는 건 아니다.
실버는 별로 할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몇 가지 원고 수정해야할 것이 있단다. 자신의 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나 뭐라나.
왜 남았을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모른 척 했다.
그런데 선희도 같이 남아있다.
얜 아무래도 새롭게 태어날 ‘어둠의 클럽’ 이라는 만화가 궁금한 모양이지만.
“리얼리티를 높으려면 개인적으로 주이공의 시점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건 약간 떨어져 보는 느낌이라, 조금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것 같고.”
내 말에 정미자가 곧바로 물었다.
“주인공의 심리에 집중하는 게 좋다는 건가요?”
“아무래도 흡혈귀라는 주인공 캐릭터의 심리상태가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재미니까요.”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정미자가 납득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야기엔 등장하지 않지만, 주인공에 대한 과거의 이야기정도는 미리 만들어두는 게 좋아요. 장편이 안 되더라도 다름 작품에서 공부가 되고, 된다면 뭐 말할 필요도 없는 거구요. 그럼 주인공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기가 더 쉬워질 테니까.”
그렇게 몇 가지 내 의견을 정미자에게 말했다.
정미자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뭔가가 떠올랐는지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대로 살려두었다.
영원한 삶과 늙지 않는다는 것의 매력.
거기다 아름다운 외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캐릭터의 묘한 매력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좋은 소재다.
실제로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일본순정만화는 1985년이 지금을 기준으로도 제법 있다.
‘붉은 손톱자국’, 이나 ‘포의 일족’ 같은 경우엔 제법 유명하기도 하고.
일단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흡혈귀의 특징은 아름다운 외모와 매력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일반적인, 특히 삼사라 같은 만화 속에 등장하는 좀비 같은 종류의 몬스터와는 분명히 다른 종류인 거다.
독자 타깃을 정확히 설정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하는 건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기존에 만들어진 콘티에다 흡혈귀라는 단순한 느낌보다는 치명적 매력을 어필하는 것에도 집중했다.
그런데 우리의 작업을 듣던 선희가 원고용지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어? 이게 뭐야?”
“집. 내가 본거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걸 그려봤어. 도움이 될까 싶어서.”
원고용지엔 연필로 3층짜리 주택의 대략적인 모습이 여러 방향으로 그려져있다.
그런데 개인주택치고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와, 이집 너무 예뻐요.”
정미자가 감탄한다.
“이거 뭘 보고 그린거야?”
“일본에 있을 때 서점에서 본 잡지에서.”
“······.”
늘 보는 일이긴 한데, 항상 놀라는 건 변함이 없다.
“건물 실내는 기억하고 있어?”
“응.”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금방 눈앞에서 실내 구조를 그려준다.
아예 구조를 확실하게 무슨 아파트 단면도를 보여주듯 그려버린다. 이것만 보면 주인공의 동선을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될게 틀림없다.
“고맙습니다, 작은 선생님.”
그런데 실버는 혼자 이쪽을 계속 힐끔거리기만 할뿐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하여튼 이런 때만큼은 조용하다니까.
이렇게 하루 동안 대략적인 방향을 잡은 뒤 다음날부터 제대로 콘티작업을 시작했다.
일단 원고보다는 이야기를 설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콘티에 할애하는 모양이다.
물론 중간 중간에 작업된 콘티를 내게 보여주며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렇게 퇴근이후의 시간을 이용해 대략 3일간 작업 후 콘티가 완성이 되었다.
이젠 제대로 된 원고를 해야 하는데 분량이 50페이지나 되는 탓에 아마도 작업시간은 제법 오래 걸릴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틈틈이 데생을 해나가고 있던 어느 날, 지로가 찾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미치코랑 함께다.
“어? 또 놀러 오신 거예요?”
경희가 놀라 물었더니 미치코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또 놀러 오면 안 되는 거였어요?”
“에이, 그건 아니죠. 담당도 아니신데 또 오셔서 의외라······.”
“담당이에요, 저.”
“네? 정말요?”
“네.”
미치코가 웃으며 대답하자 경희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시선을 지로에게 옮긴다.
“그럼 일본아저씨, 잘린 거······.”
“그런 거 아닙니다.”
지로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경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
“그냥 사장님 명령으로·······.”
나도 그건 의외다.
신입이라더니, 이런 것도 사장이 직접 결정하나?
그런데 그때 지로가 서둘러 나선다.
“아뇨, 사장님이 아니라 편집장님입니다.”
“아, 맞다. 제가 신입이라 그런지 사장님이랑 편집장님이 가끔 헷갈리더라고요.”
미치코가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는다.
아니, 아무리 신입이라도 그렇지, 그게 헷갈릴 일인가?
하지만, 저 허당기를 보면 뭐 납득이 되긴 하지만.
그런데 분위기를 바꾸려는지 미치코가 박수를 짝짝 치며 말한다.
“자자, 일부터 하죠, 일.”
“이게 일이야, 적당히 좀 해.”
“아, 그렇구나.”
지로의 참견에 다시 또 어색하게 웃는다.
그런 지로를 보며 내가 물었다.
“역시 요즘 일이 많으셔서 부사수가 생긴 모양이에요.”
“부사수요?”
“같이 일하는 부하직원.”
“아, 네. 맞습니다. 혼자 일하기 벅찰 것 같다고 이렇게 능.력.있.는. 부하를 붙여주셨죠.”
‘능력 있는’ 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미치코를 슬쩍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뭐, 상관없다는 뜻인지 이해를 못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경희가 가장 반가워하는 모습이다.
아니, 어시들도 그렇고 선희도 반가워하긴 마찬가지.
아무래도 지로가 좀 딱딱한 이미지라 여자들이 어려워하긴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아 참, 새로운 담당이 된 기념으로 선물 준비했어요.”
미치코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자그마한 가방을 열었다.
선물이라는 말을 해도 뭔가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모두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다. 나 역시 뭐, 마찬가지고.
하지만 어쩐지 미치코만 혼자 제일 신나 보인다.
도대체 뭘 준비한 건가 싶어 그냥 모두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가방에서 조그마한 푸른색의 편지봉투 같은 걸 여러 장 꺼낸다. 그러더니 가장 먼저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여기, 선생님 거요.”
“이게 뭔데요?”
“초대권요.”
“초대권?”
초대권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봉투를 열었다.
뭘 도대체 초대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푸른 봉투 속에서 나온 건 시내 유명 호텔레스토랑의 식사권이라고 적혀있다. 거기에 더불어 메뉴자유라는 말도 덧붙여있다.
물론 한글로.
다른 사람들도 봉투를 받아 그곳에 적혀있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이게 뭐에요? 식사권? 이거 들고 가면 밥 공짜로 주는 건가요?”
경희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나서며 묻자 미치코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진짜요?”
“네.”
그런데 그때 막내어시인 김기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상품권 불법이잖아요.”
그 말에 경희가 깜짝 놀라더니, 그것을 통역해준다.
“어? 그래요?”
미치코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이게 불법이에요?”
그때 식사권을 무표정하게 들여다보던 실버가 입을 열었다.
“석유파동 이후, 75년에 금지되었습니다. 상품권이 물가를 들썩이게 만든다고.”
“아, 그랬군요. 죄송해요, 전 몰랐어요.”
뭘 죄송하기까지야.
한국인인 나도 몰랐는데.
그나저나 실버 저 인간은 역시 살아있는 지식백과다. 진짜, 저 인간 관심 있는 분야가 얼마나 많은지 감도 안 잡힌다.
아니 오히려 뭐가 관심 없는 분야일지가 더 궁금할 정도다.
아무튼 그 얘기를 들은 경희가 울상이 된다.
“그럼 이거 불법이라 못 사용하는 거예요?”
하지만, 미치코다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이건 개인적인 선물이니까, 상관없지 않을까요? 돈을 받고 판 것도 아니고. 애초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따로 발행한 거고요.”
그 말을 하며 실버를 돌아본다.
그 와중에 경희는 어시들에서 우리들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통역하느라 바쁘다.
아무튼 다른 이들도 곧 상황을 이해하고는 곧장 실버에게 시선을 모은다.
이쯤 되면 실버가 법집행인 같은 느낌이다.
“뭐, 상품권 발행이 불법이긴 한데, 그 정도라면 괜찮을지도.”
“와아, 그럼 이걸로 정말 호텔에서 밥 먹어도 되는 거죠?”
“그럼요.”
“아무 거나요?”
“네. 아무거나.”
그리고 곧장 통역을 하자 모두 좋아라한다.
근데,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닌가?
뭐, 지로가 곧장 출판사에서 주는 선물이라고 하니까, 뭐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덕분에 호텔에서 비싼 음식을 맛볼 수 있다고 모두 좋아하면 된 거고.
그렇게 깜짝 미치코의 깜짝 이벤트가 끝난 뒤, 두 사람이 완성된 원고를 확인한다.
삼사라와 다크 프린세스, 그리고 파시엔시아까지.
“이 많은 작품을 써니 선생님이 혼자서 하시는 거예요?”
“데생만.”
“데생만이라도 대단한 거예요. 저도 만화 그려봐서 아는데, 이정도 퀄리티로는 1작품 주간연재도 힘들죠.”
그때 지로가 미치코를 툭 치며 말했다.
“야, 네가 그런 걸 가르칠 분들이냐?”
“아, 그렇지. 참.”
“으이그.”
지로가 머리를 두통이 생긴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봐도 앞으로 갈 길이 참 멀어 보이긴 하다.
아무튼 대충 원고를 다 확인했다 싶었을 때, 그때 내가 정미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정미자가 서둘러 콘티와 데생원고를 들고 다가왔다.
“이거······, 한 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이건 뭡니까?”
지로가 묻자 내가 입을 열었다.
“정미자 씨가 만든 네임이랑 데생인데요, 이거 한번 보시면 어떨까해서요. 뭐, 일본으로 치면 소녀만화 스타일이긴 한데.”
“아, 그렇습니까? 저희 출판사에도 얼마 전에 창간한 소녀만화잡지가 있으니까요.”
“그래요?”
“네. 일단 한번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콘티를 펼친다.
그때 곁에 있던 미치코가 둘의 대화가 궁금한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있다가 지로가 노트를 펼치자 같이 쳐다본다.
하지만, 일본어가 아니라서 읽을 수는 없을 거다.
한참을 읽던 지로가 머리를 끄덕인다.
“상당히 재미있네요. 신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느낌이고요. 하지만 제가 소녀만화 쪽은 전공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더니, 이번에 미치코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 소녀만화 좋아해?”
“그럼요.”
“내가 여기 글들 읽어 줄 테니까, 네가 판단한번 해봐.”
“제가요?”
“그래. 이제 너도 담당이 생긴 편집자잖아.”
“넵!”
미치코가 기뻐하며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장 지로가 읽어주는 대로 콘티를 살펴본다.
그리고는 다 읽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재미는 있는데······. 좀 아쉬워요.”
아쉽다고?